"진영아."


새 앨범을 위해 만든 동우의 곡을 들어보던 진영이, 갑자기 진지해진 동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모니터를 보며 진영에게 들려줄 구간을 찾아 마우스를 움직이던 동우가 여전히 진영을 쳐다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우리, 다시 만날까?"


헤드폰 때문에 잘못 들었다 생각했다. 음악이 멈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그래도 뭔가 다른 소리가 들린 거라 생각했다. 동우는 늘 보여주는 여유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역시, 잘못 들었다 생각한 순간, 마우스를 잡은 동우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게 보였다. 여유있는 게 아니라, 여유있는 척하고 있다. 진영은 동우와 마찬가지로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로 마음이 식어서 헤어진 건 아니었다. 갑자기 늘어난 스케줄에 서로를 위한 시간이 줄어들었고, 게다가 진영이 연기를 시작하면서 개인스케줄이 늘어,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더더욱 없어졌다. 거기에다 팀의 프로듀서로 늘 음악 작업을 우선시하던 진영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동우를 위해 내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점점 어색해지고, 점점 말을 섞지 않게 되고, 그렇게 헤어지자, 그만두자 얘기 없이 끝나버렸다.


여전히 팀 내에서는 큰형들로, 음악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동갑내기 친구로 남아있었지만, 그 이상이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어색함이 드디어 조금은 없어졌는데, 드디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쑥쓰러워하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게 되었는데, 드디어 옆에 서기만 해도 몸이 굳어져 뭘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단계를 넘어섰는데, 이제 딱 그 정도 거리만 유지하면 되겠다, 그게 동우도 원하는 거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낼 줄 몰랐다.


마음이 식어서 헤어진 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아직 마음에 담고 있다. 여전히 동우를 보면 심장이 조금 떨린다. 조금 떨리게 될 때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예전처럼, 보기만 해도 심장이 뛰고 괜히 푸스스 웃게 되고 정신이 없어 헛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여전히 동우가 바로 옆에 서면,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질 것 같아 몰래 심호흡을 한다. 여전히 동우를 참 많이 좋아한다. 처음 그때의, 스무 살의 불타오르던 사랑은 아니어도, 알아온 시간이 길어진 만큼 깊어진 마음이다. 그래서, 더 망설이게 되는 거다.


동우는 여전히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얘기처럼 이 말을 꺼내기까지, 동우는 얼마나 고민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을까? 진영보다 신중하고, 진영보다 현실적이고, 진영보다 현재에 충실한 동우가, 혼자 얼마나 많이 고뇌했을까? 다른 애들한테는 어깨에 손 올리는 것쯤은 숨 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동우가, 진영의 옆에 서면 몸이 경직되는 걸 진영도 느꼈었다. 그런 조그마한 것들에서, 동우 역시 아직 마음으로는 끝난 게 아니란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 힘들었던 건 진영 혼자만이 아니었다. 다시 시작하는 게 무서운 것도, 다시 헤어질까 봐 벌써부터 걱정되는 것도, 진영 혼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동우는 용기를 내주었다.


"그럴까?"


진영 역시 지나가는 얘기처럼 흘렸다. 그렇게, 두 번째 연애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연애는 조심스럽다.


진영은 음악 작업의 맥을 끊는 진동에 약간 짜증이 차올랐다. 진동하는 핸드폰의 액정을 확인했다. 방금 느꼈던 짜증은 잊은 채,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동우다.


"오늘 만날래?"

"아, 오늘?"

"힘들면 말고..."

"곡 작업하던 게 있어서..."


진영은 말을 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처음 연애할 때 곡 작업 때문에 거절하는 것에 많이 예민하던 동우였으니까. 한 번은 그 일로 크게 다툰 적도 있었다. 괜히 말했다, 싶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대답하는 동우의 목소리가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다. 진영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냐, 만나자. 이거 어차피 잘 풀리지도 않던 거..."

"괜찮아. 괜히 나 때문에 하던 일 놓고 나올 필요 없어."


역시, 동우가 삐친 거다. 말투가 아까보다는 조금 차가운 것 같다. 괜히 눈치가 보인다.


"아니야, 지금 잠깐 쉬려고 그랬었어. 정말이야. 아까부터 막혀 있었거든."


동우는 잠시 말이 없다.


"너 지금 작업하고 있는 노래가 지난번에 얘기한 그거야?"

"아, 응."

"지금 상영하는 영화 중에 그 노래랑 좀 내용이 비슷한 게 있어서, 같이 보자고 하려던 거였거든. 너 막혔을 때 그런 식으로 기분전환 하는 거 좋아하니까."


일부러 생각해서 연락해 준 거였구나. 더 미안해진다.


"그럼 그거 보러 갈래? 내가 지금 나갈게."

"아, 내가 데릴러 갈까?"


잠시 고민이 된다. 동우가 차를 갖고 오면 그만큼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지만, 그냥 영화만 보고 헤어질 수 없을 거다. 이 곡을 오늘 안에는 끝내야 하는데... 그래도, 생각해 보니 며칠만에 얼굴 보는 거니까, 곡 작업은 나중에 밤새서 해도 되는 거니까. 잠 좀 덜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래, 기다릴게."

"금방 가."


전화를 끊고 진영은 파일이 저장 되었는지 확인하고 컴퓨터를 껐다. 어차피 오늘 밤 다시 오기는 힘들 테니까.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바로 화장실로 향해 지금 상태를 확인했다. 몇 년 동안 같이 살면서 정말 볼꼴 못 볼꼴 다 보여줬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냥, 작업실에서 곡이나 쓸 생각에 대충 입고 온 게 후회되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갈아 입을 시간이 없다. 아쉬움이 섞인 눈으로 한 번 더 거울을 쳐다보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동우는 이미 와 있었다. 혹시 여기에 와서 전화를 걸었던 걸까? 아무리 집이 가까워도 이렇게 빨리 오지는 않았을 텐데. 자신이 화장실에서 거울을 쳐다보며 매무새를 고치는 데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진영은 미소를 머금고 동우의 옆자리에 올랐다. 동우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피곤해 보인다."

"아, 뭐."

"괜히 영화 얘기를 꺼냈나?"

"아냐. 진짜 보고 싶어."


괜히 다시 눈치가 보여 동우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동우는 별말 없이 차를 몰았다.


"미안해, 바빠서 잘 시간도 없는데... 내가 생각없이 전화했어."


동우의 말에 진영이 다시 동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진영이 눈치를 보는 만큼, 동우도 진영의 눈치가 보이는 거다.


"아냐, 네가 전화해서 진짜 좋았어."

"너 요즘 곡 작업 때문에 한참 바쁜 거 아는데, 행사 뛰고 나 개인 스케줄 있고, 그래서 한동안 얼굴도 제대로 못 본 것 같아서... 보고 싶었거든. 다음엔 좀 더 신경 쓸게."


진영은 다시 동우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연습 끝나고 영화 보러 가자."

"나 곡 작업 하던 거 끝내야 돼."

"너 요즘 매번 그런다? 난 너한테 그깟 노래보다 못한 존재야?"

"그깟 노래? 우리 다음 앨범에 실을 곡이잖아."

"그래, 항상 그렇지. 앨범이 더 중요하고 곡 작업이 더 중요하고 스케줄이 더 중요하고. 네 머릿속에 내 자리는 딱 그 정도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언제 그런 말한 적 있어?"

"말할 필요가 있어?"

"너 요즘 왜 자꾸 그러는데? 왜 그렇게 삐딱해?"

"됐다, 말을 말자."

"야! 말하다 말고..."


그때 동우는 연습실 벽을 세게 걷어찬 후 밖으로 나갔었다. 진영 역시 화가 나 쓰고 있던 헤드폰을 바닥에 던져버렸었고. 오랜만에 스케줄이 없는 날이라고 동우가 좋아서 영화를 보자고 했었는데, 다음 앨범 준비해야 한다며 거절했었다. 그때는 서로를 배려하는 것도, 신경 쓰는 것도 잘 못하는 스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늘 그런 서로가 서운하고, 화가 나고 그랬던 때였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앞으로 평생 같이 있을 텐데, 나중에 같이 할 시간이 많은데, 지금 왜 굳이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만나야 해? 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지금은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 나이는 아니다. 서로의 상황을 너무 잘 아니까, 그리고 지금은 동우도 곡 작업을 하니까, 좀 더 이해를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가끔 그렇게 서로에게 마음껏 화내고 서운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지금은, 늘 조심스럽다.


진영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영화관에 도착했다. 진영은 차가 멈추는 걸 느끼고 현재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동우가 뭐라고 얘기한 걸 알았다.


"미안, 잠시 뭐 좀 생각하느라."

"괜찮아. 나도 곡 쓰다 어디 가면 계속 그 생각만 할 때가 있어."


동우는 거울을 보며 모자를 깊이 눌러쓴다. 그게 아니라 우리 옛날 생각이 나서, 라고 말하고 싶지만, 동우는 이미 차에서 내린 후다. 뭐, 그때 얘기를 해 봤자 뭐가 좋겠어? 진영 역시 챙겨온 모자를 쓰고 차에서 내린다. 마스크에 안경에 중무장을 하면 오히려 더 튈 것 같다. 누가 알아보더라도 그냥 친구들끼리 영화보러 온 거라고 생각할 텐데. 참 다행이지만, 약간 슬프기도 한 생각이다.


영화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작업실에서 잠시 나왔더니 정말 동우의 말대로 기분전환이 된 것 같다. 역시, 나오길 잘 했다. 진영은 모자에 눌린 머리가 신경 쓰여 저도 모르게 자꾸 머리를 만졌다. 그래도 오랜만의 데이트인데, 너무 작업하다 나온 모습인 게 신경 쓰인다. 어차피 이따가 동우의 집에 가면, 머리가 더 망가질 테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진영이어서, 막상 동우의 차가 멈추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 걸 알았을 때, 적잖이 놀랐다. 벌써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당연히 동우의 집으로 갈 줄 알았다. 게다가, 동우는 시동을 끄지 않은 채 진영을 쳐다보고 있다. 진영은 약간 얼떨떨해 하며 안전벨트를 풀렀다.


"영화 보여줘서 고마워."

"이제 노래가 좀 술술 써질 것 같지 않아?"

"아, 응. 그러네."

"그럼 수고해."


그렇게, 동우는 진영을 남겨두고 가버렸다. 진영은 너무 황당해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동우 딴에는 곡 작업 마저 끝내라고 데려다주고 간 것 같은데, 그렇게 배려해줘서 고마워야 하는데, 하나도 고맙지 않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집으로 데려가서 현관에서부터 입술을 집어삼켰을 거다. 조금쯤은, 밀어붙여도 되는데... 조금쯤은, 막무가내로 해도 되는데... 예전에는 너무 밀어붙여서, 너무 막무가내여서 화나고 서운했었는데, 지금은 너무 그러지 않아 서운하다니, 참 웃긴 상황이다.


진영은 다시 작업실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이제 오기로라도 이 곡을 오늘 안에 끝낼 거다. 그리고, 내일 동우에게 들려주며 네 덕분에 끝냈다고 콕 집어 말해줄 거다. 아주 고마워 죽겠다고.


한편, 동우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스스로를 칭찬해 주었다. 영화고 뭐고, 얼굴을 본 순간부터 어디 으슥한 데로 끌고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저녁 내내 잘 참았다고. 옛날엔 아무런 생각 없이 들이대고 봤을 거다.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는 서로 얼굴만 봐도 불타오르던 때라, 둘이 있을 수 있는 공간 어디든 찾아 입술부터 겹쳤었다. 이제 그러기에는 너무 철이 많이 들었으니까. 예전같이 막무가내로 굴어 다시 진영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파트 안에 들어선 동우는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뭔가, 좀 많이 쓸쓸한 느낌이지만, 이제 무조건 밀어붙일 나이는 아니니까, 이제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동우는 헬스장으로 향했다. 힘도 넘쳐나는데, 운동이나 해야지, 생각하며.


다음 날, 진영은 밤새 곡 작업을 했는지 어제보다 더 초췌한 몰골로 노래를 끝냈다며 동우에게 들려주었다. 역시, 전날 밤 그렇게 들여보내길 잘한 거다. 그렇게 동우는 다시 스스로를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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