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미쳤다. 연이은 전쟁으로 지구의 반 이상이 폐허가 되었고, 나머지 나라들의 경제도 다 무너졌다. 하지만 경제가 망해버리면 결국 망하는 건 가난한 사람들이지, 부자들은 아니다. 부자들은 오히려 더 부를 축적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져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전쟁이 끝난 후, 어제같은 오늘이, 오늘같은 내일이 이어지는 나날에, 부자들은 지루한 삶의 단조로움을 깨기 위해 얼마든지 돈을 내게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돈을 벌기 위해 어떠한 일도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그 중 요즘 가장 인기있는 건 배틀그라운드라는 리얼리티 예능이다. 이미 전쟁을 여러 번 겪은 사람들에게, 컴퓨터로만 하는 게임이나 대본을 따라 짜고 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재밌을 리 없었다. 배틀그라운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음지의 예능 방송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액세스 할 수 없는 다크웹에서 스트리밍되는 게임으로, 가진 것 없고 잃을 것도 없는 100명의 사람들이 한 섬에 모여 서로 죽고 죽이며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회비를 내야만 가입할 수 있는 사이트에서 스트리밍 되는 이 게임은, 곧 부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회비가 더 올라가고, 회원수가 더 늘수록, 게임은 더 발전되어 갔고, 그만큼 상금도 올라갔으며, 그에 따라 지원자의 숫자도 가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규칙 없이 100명을 모아 어디 떨겨놓고 각자 알아서 서로 죽이게 내버려두는 게임이었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 종류와 포맷이 생겼다. 팀전도 할 수 있고, 개인전도 할 수 있다. 빨리 끝나는 게임을 원하면 총과 다른 최신식 무기들을 갖고 싸울 수 있지만, 요즘은 단번에 멀리서 죽일 수 있는 총이 아닌 다른 무기, 즉 낫, 몽키스패너, 쇠지렛대, 하다못해 후라이팬 등을 사용하는 소위 고전 스타일의 게임이 유행하고 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는 한 평생을 가난에 허덕이며 살다 죽어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지금, 배틀그라운드는 새로운 복권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99대 1이라는 경쟁률은 복권과는 비교가 안 된다. 물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게임이지만, 이기면 복권에 버금가는 상금을 타고, 평생을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된다. 평생을 고생하며 사느니, 차라리 목숨을 걸어서라도 횡재를 바라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공 찬식도 지금 섬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서로를 볼 수 없도록 검은색으로 바뀐 컨택트 렌즈 때문에 어두워진 세상에서 혼자가 된 심정으로, 곧 다가올 죽음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섬이 가까워지자 마이크가 켜지는 소리가 들리고, 군인인 듯한 사람의 딱딱한 안냇말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배틀그라운드에 온 걸 환영한다. 이번 게임은 개인전이며, 고전 방식을 따른다. 각자 위치를 잡고, 게임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렌즈가 투명하게 바뀌면, 그때부터는 각자 알아서 하면 된다. 렌즈는 소형카메라이기 때문에 절대로 빼서는 안 되며, 빼는 즉시 기권 밑 사망으로 처리되고, 드론이 위치추적기로 찾아가 확인사살할 것이다."


찬식은 쓴웃음을 지었다. 섬 곳곳에 숨어 있는 카메라로도 모자라, 최근에 도입된 카메라 렌즈는 1인칭 시점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시청자들이 선호하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100인 중 누가 우승자가 될지 어마어마한 금액을 걸고 내기도 하기 때문에, 혹시 모를 비리나 반칙을 미리 예방하는 차원에서 절대 렌즈를 빼면 안 된다는 새로운 규칙이 나왔다. 즉, 카메라를 장착하지 않은 참가자는 쓸모가 없으니 죽여없애겠다는 말이었다. 스피커의 목소리는 말을 이었다.


"귀에 낀 소형 이어폰은 빼도 상관 없지만, 생존을 위해 가급적이면 끼고 있는 게 도움이 될 거다. 섬은 약 100 에이커이며, 무기, 음식, 보호장비, 약 등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1시간이 지나면 경고와 함께 섬의 가장자리, 즉 바닷가로부터 독가스를 살포하기 시작하며, 1시간이 지날 때마다 점점 더 안으로 퍼지기 시작하니 알아서 섬 안쪽으로 이동하도록. 개인전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참가자와도 교류할 수 없고, 잠깐이라도 동맹을 맺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외에는 어떠한 규칙도 없다. 살아남는 자가 우승자다."


찬식의 등에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은 전혀 없었다. 찬식은, 그저 참가자에게 주는, 일종의 출연료인 천만 원을 받기 위해 지원한 거였으니까. 그래도 살기 위해 발버둥은 치겠지만,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조용해진 비행기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잠시 후, 해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비행기 안에 세찬 바람이 불어들기 시작했다. 섬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뭐가 다가올지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찬식은 누군가 자신의 팔을 거칠게 잡고 끌어당기자 갑자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개의치 않고 찬식을 끌어다 해치를 통해 밖으로 던져버렸다.


갑자기 공중에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얼어버린 뇌와는 다르게 생존본능이 깨어났는지, 비행기를 타기 전 교관에게 배운 대로 손은 낙하산의 줄을 찾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귀에 낀 이어폰에만 의지한 채 땅바닥으로 떨어진다니, 두려움에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귀에서는 침착한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발 500미터. 낙하산의 줄을 잡아 주십시오."


렌즈가 도입되기 전에는 안대를 쓰고 각자 위치에 내려주었기 때문에, 미리 안대를 벗어버리는 일이 흔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면 안 되는 게 이 게임의 첫 번째 규칙인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낙하산 하나에만 의지하고 땅으로 떨어지는 건 너무 위험하고 무서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렌즈가 도입되고, 그런 반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해발 300미터. 낙하산을 펼 준비를 해 주십시오."


패닉 상태에 빠져 줄을 찾아 헤매다 겨우 손에 잡은 찬식은 심호흡을 하며 줄을 더 꽉 쥐었다.


"해발 200미터. 낙하산을 펴 주십시오."


찬식은 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등 뒤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갑자기 아무런 저항 없이 떨어지던 몸이 뭔가에 걸린 듯 멈칫했고, 떨어지는 속도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찬식은 잠시 멈췄던 숨을 겨우 다시 쉬었다.


"해발 100미터. 착지 준비를 해 주십시오."


찬식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힘을 주려 노력했다.


"90미터... 80미터... 70미터..."


귀에서 들려오는 카운트다운을 들으며 찬식의 몸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잘못 착지했다가는 다리라도 부러지기 십상이었다. 찬식은 교관이 가르쳐준 대로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말고 충격의 순간에 대비했다. 잠시 후, 찬식의 왼쪽 어깨가 땅과 닿음과 동시에 찬식은 몇 바퀴를 굴렀다. 어깨가 아팠지만, 그래도 탈골되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던 찬식은 떨리는 손으로 낙하산의 버클을 풀었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자, 그래도 첫 단계는 무사히 통과했다는 생각에 기쁨이 밀려왔다. 잠시 후, 찬식은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설 수 있었다. 빨리 렌즈가 열리길 빌며, 찬식은 서성이기 시작했다.


영원같은 시간이 흐른 후, 귀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착지 완료. 생존자는 96명 입니다. 10초 후 게임을 시작합니다. 10, 9, 8..."


착지하면서 벌써 네 명이나 죽었다니. 찬식은 기뻐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갑자기 눈앞이 환해져서 찬식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 후에야 밝은 빛에 익숙해진 찬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착지 장소에는 최대한 충격을 줄여주는 풀밭이 펼쳐져 있다. 이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찬식은 풀밭 한쪽에 서서 주위를 서둘러 둘러보았다. 우선 무기를 찾고, 숨을 곳을 찾는 게 먼저였다. 주위에 건물은 없었고, 저 멀리 지프차 한 대가 있었지만, 평생 차를 본 적도, 운전해 본 적도 없는 찬식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착지할 때 다칠까 봐 풀밭 안에는 아무것도 숨겨놓지 않기 때문에, 우선은 이 곳을 벗어나 어디라도 가야 했다. 찬식은 무작정 지프차 쪽으로 향했다.









섬에 온 지 열 시간이 지났다. 이어폰으로 열 시간이 지났다고, 더 섬의 안쪽으로 들어가라는 경고를 들으며 찬식은 찾아낸 빵을 먹고 있었다. 착지 지점에서 한참을 걸어간 후 발견한 건물 안에는 낫과 빵, 그리고 물이 있었다. 찬식은 그닥 좋은 무기는 아니지만, 낫을 챙기고, 빵을 조금 먹었다. 그리고, 건물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찬식은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가장 구석진 곳에 숨었다. 손전등을 찾지 않는 이상,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섬에서 밤에 돌아다니는 건 위험했다. 분명 찬식의 시점으로 게임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 찬식에게 돈을 건 사람들이 숨어만 있는다고 욕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아침이 될 때까지는 계속 여기 있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금, 밤 열 시가 된 시간에 찬식은 여전히 숨어있는 채로 아까 먹다 남은 빵을 마저 다 먹고, 물도 거의 다 마신 채로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는 건 위험하지만, 괜히 잘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앞으로 점점 더 섬 가운데로 사람들이 몰리면, 그만큼 쉴 수 있는 시간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구석에서 잠들기 전, 찬식은 방금 먹은 빈 빵 봉지와 물병 등을 입구 앞에 늘어놓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잘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라도 누가 오는 걸 미리 알 수 있도록. 그리고, 갑자기 든 생각에 했던 그 작은 행동으로 찬식은 조금 더 살 수 있었다. 새벽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고, 머리맡에 놓고 자던 낫을 손에 들고 일어섰을 때, 침입자는 이미 가고 없었다. 하지만 찬식은 불안한 마음에 더 이상 잘 수가 없었다.









해가 뜬 후, 밖으로 나오니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불안한 찬식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났다는 경고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직 공기는 맑았다. 처음 독가스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무색이었어서, 참가자들은 독이 퍼지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중독되어 죽었다. 그게 너무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독가스에 색을 첨가했고, 지금은 독가스가 초록색으로 움직이는 게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해졌다.


다행히도 찬식은 섬의 가운데 쪽에 착지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방향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괜히 바닷가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도 우선은 어느 방향을 봐도 공기가 맑았기 때문에, 아무데로나 움직여 빨리 더 좋은 무기와 음식 등을 찾는 게 중요했다.


한참을 걸어간 후 다시 빈 건물을 찾았다. 아니, 비어 있다고 생각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순간 함정인 걸 알았다. 문 옆에 스패너를 들고 숨어 있던 사람이 무작정 공격을 했다. 찬식은 피하며 낫을 휘두르려 했지만, 공격한 사람을 보고 멈칫했다. 여자였다. 그것도, 너무 작고 약해보이는 여자. 여자를 공격할 수 있을까? 찬식은 망설였다. 그리고, 그 망설임 때문에 죽을 뻔했다.


여자의 스패너가 찬식의 머리를 세차게 내려치려는 순간, 열린 창문으로 뭔가가 날아들어왔다. 그리고, 여자는 쓰러졌다. 여자의 가슴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단번에 죽어버린 여자를 보며 기겁하기도 전에, 찬식은 여자의 옆으로 몸을 눕혔다. 화살을 쏜 사람이 다시 공격할 거란 예상에. 하지만 더 이상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영겁의 시간을 차갑게 식어가는 여자 옆에 누워있던 찬식은,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끔찍해하면서, 여자가 메고 있던 가방을 시체에서 벗겨 피로 얼룩진 가방을 등에 메고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조금 더 걸어가자 도시가 나왔다. 물론, 다 비어있는 건물이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과 도로를 보며 도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곳에 뭔가 많이 있을 테지만, 그만큼 더 위험하기도 할 거다. 찬식은 우선 한쪽 건물에 숨어 여자의 가방을 뒤져보았다. 뭐 별거 없었다. 여자가 손에 쥐었던 스패너를 차마 그 굳은 손에서 못 뺏어와 여전히 무기는 낫 하나였다. 뭐라도 더 찾아내야만 했다.


찬식은 다시 가방을 메고, 조심히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로 후라이팬을 든 남자와 마주쳤다. 남자가 망설임 없이 팬을 휘둘렀다. 찬식 역시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팔을 들어 막았다. 어제 착지할 때부터 왼쪽 어깨가 아팠었는데, 왼팔에 팬을 맞으니 팔이 마비가 된 것처럼 힘을 줄 수 없었다. 찬식은 왼손에서 떨어지려 하는 낫을 오른손으로 옮겨 남자에게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막상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찬식을 보며 남자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팬을 다시 들었다.


그때, 팅,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에서 팬이 날아갔다. 다음 순간, 화살이 다시 날아와 남자의 목에 꽂혔다. 쓰러지는 남자를 피하며 찬식은 몸을 숙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사람의 실루엣이 건물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찬식은 다른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가 어디로 가는지 생각도 하지 않으며 무작정 구석으로, 더 구석으로 도망갔다. 겨우 조금 안전해졌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서야 방금 겪은 일이 떠올라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찬식은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팔에 파묻었다.


어쩌자고 이런 곳에 온 거지? 누구 하나 죽일 수도 없으면서. 벌써 두 번이나 죽을 뻔했다. 그리고, 그 두 번 다 다른 누군가가 구해주었다. 그런데, 구해준 게 맞나? 혹시 찬식을 공격하려다 잘못 쏜 게 아닐까? 도대체 누구지? 도대체, 이건 뭐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돈 때문에 죽고 죽이는 게 말이 돼? 그저 게임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었는데, 막상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니 찬식은 뭘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빨리,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그게 설령 죽는 것이라도. 


정리가 되지 않는 생각들이 휘몰아치는 머리를 부여잡고 찬식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제발 누가 와서, 그 화살을 쏘는 사람이라도 와서 죽여주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하지만 너무 잘 숨었는지, 아무도 오지 않았고, 찬식은 한참 후 다시 일어섰다. 이런 와중에도 배는 고팠고, 목은 말랐다. 찬식은 느릿느릿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귀에서 여전히 침착한 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생존자는 17명. 섬의 안쪽으로 향해 주십시오."


그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17명! 그 중 찬식이 한 명이었다. 벌써 그렇게 많이 죽었다니. 그리고 독은 더 퍼지고 있었다. 찬식은 지금 들어온 건물이 꽤 높다는 걸 기억해내고, 최대한 위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힘들게 걸어올라가 옥상에 다다르자, 도시와 그 주변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저쪽에서 초록색이 보였다. 드디어 방향을 잡은 찬식은 잊지 않기 위해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펴보고, 건물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이곳저곳 뒤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건빵과 물 몇 병, 그리고 운좋게도 석궁을 찾았다.


아까 그 사람도 석궁을 쏘는 거였나? 찬식은 석궁에 화살을 끼워넣고, 한 번 쏴봤다. 쏘는 것 자체도 어려웠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성공했지만 겨눈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화살이 나갔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잘 쏜 거지? 몇 번을 시도한 끝에, 찬식은 석궁은 짐만 될 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석궁을 버리고 다시 손에 낫을 들었다.


몇 번 쉬어가며 높은 건물에서 내려와, 찬식은 아까 잡은 방향을 따라 더 섬의 안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전처럼 주위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이제 솔직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석궁의 주인이 찬식을 죽일 생각이라면, 제발 빨리 죽여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느 누구도 마주치지 않은 채 도시에서 벗어나, 계속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다시 귀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생존자는 9명. 섬의 안쪽으로 향해 주십시오."


찬식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초록색이 보이는 걸 보니, 그만큼 독가스가 섬을 많이 잡아먹었다는 뜻이었다. 이제 남은 공간은 그리 넓지 않을 것이고, 그 공간에 9명이 다 모여들 거라는 말이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넓은 들판 한쪽에 서 있는 작은 창고를 발견하고, 찬식은 우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뭘 찾으려는 건 아니었다. 찬식은 가방에서 남은 빵과 물을 꺼내 다 먹고 마시고, 가방을 버렸다. 손에 낫 하나만 든 채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몸이 홀가분해진 만큼 마음도 가벼웠다.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생존자는 5명. 섬의 안쪽으로 향해 주십시오."


귀에서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찬식은 다시 뒤돌아보았다. 초록색 독가스가 거의 손에 잡힐 듯한 거리까지 와 있었다. 찬식은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몸을 숨길 생각도, 다른 사람을 공격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앞만 바라본 채 거의 기계적으로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오히려 화살이 날아와 그 여자나 남자처럼 단번에 죽여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옆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누군가 손에 뭔가를 들고 찬식에게 달려오기 시작했을 때도, 그냥 그 사람을 쳐다만 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그 사람이 어깨를 맞고 더 큰 비명을 질렀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이제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화살이 하나 더 날아오고, 그 사람이 결국 눈앞에서 죽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봤을 때도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냥, 다음 화살을 기다릴 뿐이었다. 귀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생존자는 2명. 섬의 안쪽으로 향해 주십시오."


그 목소리와 함께, 다른 생존자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에도, 놀라지 않았다. 이제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사람이 손에 든 석궁을 집어던지고, 찬식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하고, 드디어 찬식의 눈에 그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을 때, 지금까지 배제했던 모든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절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홍빈아!"









가진 건 몸뚱이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밖에 없는 가난한 연인들에게, 이 세상은 너무 가혹했다. 결국, 찬식은 결단을 내린 거였다. 천만 원이면 홍빈 혼자서 뭐라도 할 수 있겠지 싶어서. 홍빈 혼자서라도 살아남겠지, 싶어서. 그래서 그 천만 원을 홍빈의 계좌에 보내고, 이 곳에 온 거였는데...


가까이에서 본 홍빈은 상처투성이였다. 석궁만 갖고 싸운 게 아니란 얘기였다. 그리고, 그만큼 많이 싸워야 했다는 뜻이었다. 찬식은 그제서야 어떻게 한 번 제대로 싸운 적 없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 첫날 밤의 침입자가 누구였는지도. 찬식의 입에서 탄식 비슷한 말이 흘러나왔다.


"빈아..."


홍빈은 성큼성큼 걸어와 찬식의 멱살을 잡았다. 석궁을 쏠 때 단 한 번도 떨리지 않았던 손이 지금 떨리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빈아... 난..."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계좌에 천만 원이 들어왔어. 내가 그 뜻을 모를 것 같아? 내가 널 이런 곳에 혼자 보낼 것 같았어?"


눈앞에 홍빈이 서 있다는 게 현실이라는 걸 드디어 깨닫게 되자, 찬식은 단번에 정신이 들었다. 찬식은 홍빈의 멱살을 마주 잡았다.


"그렇다고 쫓아오면 어떡해! 내가 왜 여길 왔는데!"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이를 악물고 내뱉는 홍빈의 말에 찬식은 할 말이 없었다. 홍빈의 목소리가 떨렸다.


"옛날에, 너 그때 병원에 입원했을 때, 신장 아파서 떼어낸 거 아니란 거 알아. 그거 팔아서 그 돈 가지고 우리 한참 살았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게 내 평생 한인데, 네 신장 팔아서 나 먹여살린 것도 모자라 이제 네 목숨까지 팔아서 나 혼자 살라고? 내가 어떻게 그래!"


홍빈의 멱살을 잡았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모르는 줄 알았는데... 저절로 목소리가 작아졌다.


"일도 못 구하고, 집세도 못 내서 쫓겨나기 직전이고, 뭐라도 해야 해서..."


찬식의 멱살을 잡고 있던 홍빈의 손이 다시 떨려왔다. 홍빈은 손을 놓고, 뒷걸음질을 쳤다.


"나도 그래서 왔어. 뭐라도 해야 해서. 너 절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 없어서."


홍빈이 뭘 하려는지 깨닫기도 전에, 홍빈이 눈에서 렌즈를 빼버렸다. 그 의미를 깨닫는데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 안 돼! 빈아! 안 돼!"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었던 찬식이 앞으로 한 걸음을 뗐다.


"오지 마! 너까지 다쳐!"

"안 돼! 제발... 안 돼..."


엔진 소리는 너무도 빨리 다가왔다. 저 위로 드론 하나가 날아왔다. 그리고, 경고도 없이 발포를 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홍빈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찬식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을 그렇게 쓰러진 홍빈을 쳐다보았다. 귓가에서 그 끔찍한 목소리가 침착하게 말했다.


"생존자 1명이 남았습니다. 게임을 종료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찬식은 귀에서 이어폰을 빼서 내던지고 홍빈에게로 달려갔다. 목숨이 끊어진 그 몸을 끌어안고 찬식은 절규했다. 홍빈을 살리려고 온 건데, 결국 찬식 때문에 홍빈이 죽었다. 그것도, 게임 내내 자신은 돌보지도 않으며 찬식을 멀리서 지켜주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찬식은 흐느끼며 계속, 홍빈에게 조금 전 들은 말을 되풀이했다.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빈아... 너 없이 내가..."

 



























************************ Alternate Ending *****************************


"찬아, 찬아!"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느낌에 찬식은 눈을 떴다. 퉁퉁 부은 눈꺼풀이 제대로 떠지지를 않았다. 누군가 찬식을 안아주는 게 느껴졌다.


"찬아, 괜찮아. 다 괜찮아."


다정한 목소리와 안아주는 따뜻한 팔에 찬식은 겨우 눈물이 멈췄다.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찬식의 고개를 위로 향하게 한 후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무슨 꿈을 꿨길래 그렇게 대성통곡을 해?"


겨우 눈을 떠 위를 쳐다본 찬식은 홍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나오려는 눈물을 삼켰다.


"꿈에..."

"그래, 꿈에 뭐?"


찬식은 저도 모르게 다시 울먹였다.


"꿈에... 배그했는데..."


얼굴을 닦아주던 손이 멈칫했다. 홍빈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번졌다. 찬식은 그러는 홍빈을 모른 채 여전히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죽었어."


홍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홍빈은 다시 눈물로 범벅이 된 찬식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으이구. 게임하다 죽을 수도 있는 거지, 뭘 그걸 가지고 그렇게 울어? 너 요즘 배그에 꽃혀서 그것만 하더니 꿈에서까지 게임하냐?"

"게임이 아니었단 말야."


너무 생생했던 꿈 때문에 아직도 가슴이 이렇게 아픈데, 홍빈이 그걸 몰라줘서 찬식은 왠지 섭섭했다.


"배그했다며?"

"그게... 배그는 배그인데... 진짜 같아서... 네가 죽었어. 내 눈앞에서."

"뭐야, 네가 나 죽였냐?"


홍빈의 입꼬리가 더 심하게 떨렸다. 툭하면 팀킬하는 찬식이 꿈에서까지 그랬나, 생각하니 너무 웃겼다. 하지만 찬식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응, 나 때문에 죽었어, 네가..."


울먹이는 찬식에 적잖이 당황한 홍빈은 게임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서둘러 달래주었다. 히끅거리며 눈물을 다시 삼키던 찬식이 진정이 되자, 홍빈은 다시 찬식을 끌어당겨 안았다.


"찬아, 이제 그만 자자."

"나 두고 안 갈 거지?"

"나 아침 일찍부터 스케줄 있는 거 알잖아. 조금 있다가 가야 돼."


찬식은 다시 홍빈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거 말고. 나 두고 먼저 죽지 않을 거지?"


홍빈은 찬식 몰래 눈알을 굴렸다.


"얘가 왜 이래, 오글거리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홍빈은 찬식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잠시 후 찬식이 웅얼거렸다.


"꿈이라서 다행이다. 완전 리얼해서 진짠 줄 알았어."

"그래, 꿈이었으니까 이제 다 잊어버리고 그만 자자."


홍빈은 찬식을 더 가까이 끌어당겨 안고 다시 잠을 청했다. 거의 잠이 들려는 찰나, 갑자기 찬식의 손이 올라와 홍빈의 볼을 꼬집었다.


"아야!"


홍빈은 다시 눈을 뜨고 찬식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왜 꼬집어?"

"아,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무슨 생각?"


아픈 볼을 비비며 홍빈이 묻자, 찬식은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그게 꿈이 아니라, 지금 이게 꿈이면 어쩌지, 라는 생각."


홍빈이 다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그러면 네 볼을 꼬집어야지 왜 날 꼬집어? 네 꿈인데."

"아, 그렇네?"

"하... 제발 그만 자자."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홍빈을 올려다보다, 찬식도 다시 눈을 감았다. 만약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차라리 이대로 깨지 않는 게 더 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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