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빈 이 녀석과 약속한 수요일, 역시 녀석도 뽕을 뽑을 모양인지 아침 일찍 나오라고 톡을 보냈다. 그래서 아침 7시에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녀석을 기다렸다. 자기가 일찍 나오라고 해놓고 또 10분 정도 늦었다. 그래놓고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바로 도착한 버스에 날 끌고 올라탔다.

"두 사람이요."

그렇게 맨 뒷자석까지 갔다. 내가 창가에, 녀석이 내 바로 옆에 앉았다.

"어디 가는 건데?"
"영화 보러."
"이 시간에?"
"조조로 보게."

뭐, 너도 30만 원이 참 출혈이 컸겠지. 비슷한 상황에 있어던지라, 이해가 됐다.

그래도 영화관에 도착하자, 녀석은 팝콘과 콜라까지 사서 들어갔다. 그런데... 커플석이라니!

"야, 이게 뭐야?"
"뭐?"
"왜 이런 자리를 예약했냐고."
"오늘 우리 데이트하는 거니까."

무슨 저런 경악스러운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지. 듣는 내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뭐, 무슨, 뭐?"
"지난번에 네가 30만 원으로 일일 데이트권 샀잖아. 나도 그런 건데? 그러니까 오늘 우리 하루 종일 하는 게 데이트인 거잖아."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걸 설명해주듯, 당연하다는 말투로 말한다.

"그, 그런 얘기 없었잖아!"
"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우리 오늘 하루 종일 데이트하는 거라고."

그럼 그렇지, 이 녀석 날 이렇게 괴롭힐 심산이었구나. 오글거려 죽어버리게. 내가 오기로라도 오늘 아무리 손발이 오글거려 없어져 버려도 다 참아낼 거다.

어쨌든, 영화관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내가 전부터 보고 싶어하던 거라 재밌게 봤다. 물론, 커플석이라 바로 옆에 앉은 녀석이 신경 쓰였고, 가끔 팝콘을 같이 집을 때 손이 스칠 때마다 "으헉!" 하며 놀랬지만, 그것 빼고는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11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아침을 안 먹고 나와서, 팝콘을 배불리 먹었는데도 너무 배고프다. 그때, 반갑게도 녀석이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가자."

옳다구나, 하고 따라가는데,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뭐지? 싶었지만 따라 탔다. 그렇게, 다시 학교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한 시간 거리의 학교에 도착하니 너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점심 먹자며?"
"저기서 먹을 거야."

녀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우리 학교 앞 유명한 맛집이다. 그래, 웬만한 데 보다야 저기가 맛있으니까. 그렇게, 점심으로 보쌈을 먹었다. 지난번에 녀석이 점심을 사서 내가 사겠다고 했지만, 녀석이 괜찮다고 하길래, 두 번은 말 안 했다.

배가 터지게 밥을 먹고 나오니, 이번에는 이 녀석이 뭔 일을 꾸밀까, 슬슬 다시 걱정이 되었다. 그때 녀석이 말했다.

"PC방 갈래?"

나도 모르게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식당 바로 옆에 있는 PC방으로 날 이끌었다. 바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 시켜먹고 싶으면 다 시켜."
"진짜 그래도 돼?"
"응."

녀석의 말에 바로 과자를 주워 왔다. 자기가 괜찮다고 해놓고, 녀석이 놀란다.

"방금 점심 먹었잖아."
"밥 배 과자 배는 원래 따로 있어."
"오죽하겠냐."

녀석을 사뿐히 무시하며 게임을 켜고 로그인을 했다. 옆을 보니 녀석도 같은 게임에 로그인을 하고 있다.

"뭐야, 너도 그 게임 해?"
"응."
"너 티어가 뭐야?"

이런, 녀석이 나보다 높다. 그래도 차마 자존심 때문에 같이 하자는 말은 못 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을 하며 틈틈이 녀석의 스크린을 훔쳐보는데, 와, 정말 잘한다. 나도 어디 가면 못 한다는 소리는 안 듣는데, 나보다 훨씬 잘한다. 아, 저 녀석한테 묻어가면 정말 티어 올리는 건 일도 아닐 것 같다. 그래도, 어떻게 같이 하자고 그래. 다시 내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같이 할래?"

웬일로 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도 예의상 한 번 거절해 봤다.

"아냐, 딱 봐도 네가 나보다 잘하는데, 뭘."
"너도 잘하는데, 왜."
"그래도..."
"뭐, 싫음 말고."
"아, 아냐. 같이 해."

그렇게 같이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맞는다. 저 녀석이랑 나랑 캐릭터가 딱히 겹치지도 않고, 게임을 계속 이기니 신나서 더 재밌게 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저녁 때가 다 되어 있었다. 어떻게 몇 시간이 그렇게 훌쩍 지나갔지?

"야, 이거 막판."

역시 시계를 확인한 녀석이 말했다.

"왜, 잘 되는데 조금만 더 하자."
"저녁 먹을 시간이잖아."
"그냥 여기서 라면 시켜먹으면 안 돼?"
"삼겹살 먹으려고 했는데, 뭐, 싫음 말고."
"오케이, 막판."

내 빠른 태세전환에 녀석이 웃는 게 들렸지만 그닥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오늘 하루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꽤 재밌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맛있는 점심에, 좋아하는 게임까지 원없이 하고, 그것도 녀석 덕분에 거의 다 이겼고. 진짜 날 괴롭히려고 한 게 아니라 사과하려는 게 맞는 것 같다. 그걸 보니,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 것 같기도.

그렇게 마지막 판까지 이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PC방을 나섰다. 녀석이 마음껏 시켜먹어도 된다고 그래서, 이것저것 주워먹은 게 몇만 원이 나온 거 빼면. 이건 진짜 너무 양심이 찔려서 결국 내가 냈다. 이미 어둠이 깔린 거리를 조금 걸어 우리 학교 학생들이 애용하는 삼겹살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오늘은 자리가 꽤 비어 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삼겹살을 시켰다. 지난 주였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만, 오늘 본 이홍빈 이 녀석은 그닥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아, 소주도 시키자는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삼겹살에 소주 한 병씩, 딱 기분 좋을 정도로만 마셨다. 어차피 녀석이나 나나 내일 아침부터 수업이 있으니까,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제 슬슬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녀석이 한 병을 더 시켰다.

"야, 너 내일 수업 있잖아. 그만 마시고 가자."
"찬식아."

갑자기 다정하게 부르는 이름이 낯설어 순간 다시 닭살이 돋았다. 생각해 보니, 3년만에 처음 듣는다. 녀석을 다시 만나고, 한 번도 서로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것 같지가 않다.

"찬식아."

내가 대답이 없자 다시 부른다. 이제 좀 오글거린다.

"왜?"
"오늘 하루, 어땠어?"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에 당황했다.

"어?"
"내가 최대한 네가 좋아할 만한 데이트를 준비한 건데, 어땠냐고."

날 쳐다보는 녀석의 표정을 지난번과 같이 읽을 수가 없다. 도대체 저 표정의 의미가 뭐지? 그래서 저딴 단어 쓰지 말라고 면박을 줄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 자체는 정말 좋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정말 즐거웠다. 그래서, 녀석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재밌었어."
"그래? 다행이다."

저 녀석, 겨우 소주 한 병에 취했나? 왜 저래?

"찬식아."

다시 목소리를 깔아 부른다. 아까보다는 손님이 조금 더 많아져서, 식당 안이 더 시끄럽다. 뭐라 말하는데, 잘 들리지 않아 결국 녀석의 옆자리로 옮겼다. 너무 진지한 녀석에, 아무래도 그때 일을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그건 들어줘야 될 것 같아서 그랬다.

"못 들었어."
"난 널 괴롭힌 적이 없어."

기껏 자리까지 옮겨 가며 얘기를 들어주려 했더니, 또 오리발이다. 아, 역시 이홍빈이 이 자식은 나쁜 놈인가?

"네가 날 얼마나..."
"내가 널 좋아하는데, 어떻게 널 괴롭혀."

열내며 하던 말이 갑자기 쏙 들어갔다. 이 새끼가 미쳤나? 아님 진짜로 취했나? 아니, 취하면 진담을 말하지 않나? 그럼 이게 진심이야? 아니면 진짜 내가 오늘 하루가 즐거웠다니까 어떻게든 망치려 이런 거지 같은 장난을 치는 건가?

"뭔 헛소리야?"
"고등학교 때 좋아했었다고, 널."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취한 눈빛은 아니다. 장난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 진짜, 진심이라는 거야?

갑자기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게 밖으로 도망갔다. 최대한 빨리 걸어가는데, 나도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는지 조금 어질했다. 취기가 아니면, 방금 들은 말 때문에 쇼크를 받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잠깐 벽을 잡고 서서 쉬었다. 그러다, 결국 녀석한테 따라잡혔다. 그것도 지난 주 녀석이 밀어붙였던 그 골목길에서.

녀석이 내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내 얘기 마저 듣고 가."
"싫어. 내가 왜 네 헛소리를..."
"네가 나 3년 동안 오해해서, 그동안 나 많이 미워했잖아. 그러니까, 적어도 내 얘기는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이제야 녀석이 여러 번 지었던 이해 못 할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 또 장난치는 거잖아. 나 괴롭히려고."
"난 널 괴롭힌 적이 없어. 몇 번을 말해."
"네가 나 빵셔틀 시키고, 가방..."
"널 괴롭혔던 게 아니라고!"

녀석이 결국 큰소리쳤다.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 너무 아파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녀석이 바로 손목을 놓았다.

"미안해."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믿어주기도 그렇다.

"그래, 네가 날... 좋아... 그랬었다고 치자. 그럼 그래서 날 괴롭힌 거야?"
"내가 초딩이냐? 좋아한다고 괴롭히게? 네가 도대체 뭘 어떻게 잘못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난 널 괴롭힌 적이 없어. 정말이야."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니 이제 슬슬 짜증이 난다.

"너 나 빵셔틀 시켰잖아."
"무슨 헛소리야? 내가 너랑 같이 매점에 빵 사먹으러 갔던 거잖아."
"내가 싫다고 그래도 네가 끌고 같이 갔잖아."
"그거야 같이 있고 싶으니까."

순간 손발이 오글거렸다. 하지만 녀석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하다.

"너 나 가방셔틀도 시켰잖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나한테 학교 끝나면 집까지 가방 들고 가게 했잖아."
"그거야 둘 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네가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가방 들어주자고 그런 거잖아. 넌 나한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고."

그랬었나? 내가 가방 들어준 건 기억나는데... 왜 다른 건 기억 안 나지?

"내가 다른 애들하고 말만 하면 막 나 끌고 가고, 그래서 나 친구도 못 사귀게 만들었잖아."
"그거야 네가 쉬는 시간만 되면 반 여자애들하고 노니까, 여자애들하고 친해지지 말라고 그런 거고."

말하던 녀석이 갑자기 한숨을 푹, 쉬었다.

"네 기억 속의 난 얼마나 못되고 나쁜 놈이냐? 난 너한테 그렇게 심하게 했던 기억이 없는데."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기억 속의 홍빈이가 진짜 홍빈이가 아니라면, 뭐지? 왜 내가 그렇게 녀석을 왜곡해서 기억했던 거지?

"난 네가 내 마음을 아는 줄 알았어. 내가 진짜 쉬는 시간마다, 점심시간, 하교 시간, 다 네 옆에 꼭 붙어 있었으니까. 난 너랑 계속 함께 있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건데. 난 나름 표현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네가 왜 그러는지 알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옥상으로 도망가면서까지 날 피하길래,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알아서, 하지만 넌 날 싫어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내가 널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무서워서 도망갔던 거였어?"

녀석의 지금 표정이 낯설지가 않다. 생각해 보니, 그때 옥상에서 본 얼굴이다.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무서워서 그런 표정을 지은 게 아니었나 보다. 그건,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머릿속이 엉망이다. 이홍빈이 나쁜 놈에 죽일 놈의 웬수가 아니면, 뭐지? 날 싫어해서 괴롭힌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좋아했던 거라니. 그럼 난, 왜 그렇게 기억을 했던 거지?

아...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언제부턴가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녀석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의 그 너무도 진지한 시선이, 날 잡아먹을 것 같은 눈길이, 솔직히 무서웠다. 녀석 말대로 난 녀석의 마음을 알았었나 보다. 어린 마음에 그게 무서워서, 그래서 녀석이 날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라고 일부러 생각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만 기억에 저장해서, 내 머릿속에서 녀석은 날 고등학교 때 왕따시킨 나쁜 놈이 되어 있었나 보다. 결국, 정말 나쁜 놈은, 나였다.

얽히고설킨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하려 노력하며,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갑자기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지난번 밀쳐진 일이 떠올라 순간 얼었다. 하지만, 녀석은 내 얼굴을 손으로 부드럽게 잡고, 고개를 숙였다.

"무, 무슨..."

녀석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벌려 있던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와 입 안을 훑었다. 갑자기 모든 사고가 정지됐다. 그래서 피할 생각도, 밀쳐낼 생각도 못 했다. 녀석이 반대쪽 팔로 어깨를 감싸고, 내 혀를 빨아들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

한참 후에야 녀석이 입술을 뗐다. 처음 당하는 키스에 숨이 막혔던 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럼, 넌 이것도 내가 널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해?"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녀석이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난 너 대학교 와서 다시 보고 너무 반가웠는데. 다시 기회가 온 것 같아서. 그런데 넌 계속 날 피하고, 역시 날 싫어하는구나, 생각하고 있었어. 그랬는데 네가 데이트 경매에 나타나서 나한테 입찰하길래, 너도 결국 날 좋아했구나, 그걸 이렇게 표현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3년이나 날 기다리게 한 게 얄미워서 좀 놀려주려고 일부러 틱틱거리고, 장난치고 그런 건데... 그런데 충주에서 네 핸드폰 메모를 보고 허탈해졌어. 날 괴롭히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는 걸 알고."

녀석이 다시 한숨을 쉰다. 바로 코앞에서 그러니 녀석의 숨결이 내 입술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녀석이 그런 나를 보고 살짝 웃었다.

"그래도 네가 포기가 안 되더라. 내가 어릴 때 멍청해서 너한테 좋아하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그래서 네가 날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면 너도 나한테 마음을 좀 열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오늘 데이트 신청한 거야."

저 녀석 입에서 나오는 데이트라는 단어가 진짜 아까까지는 너무 오글거렸는데,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익숙해진 건가? 아니면... 뭔가 좀 달라진 건가?

"그래도, 오늘 나 겪어보니까, 나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지?"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면, 거짓말을 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다시 살짝 웃었다.

"그럼 내가 다시 데이트하자고 하면, 오케이 할 거야?"
"오늘... 같은 거라면..."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오늘 하루는 진짜 너무 좋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동안 녀석을 오해했던 게 미안하니까... 내 대답에 녀석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었다. 웃으니 잘생겨 보인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때 처음 봤을 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처음엔 약간... 동경도 했었다.

"알았어. 다음에도 내가, 진짜 네가 좋아할 만한 데이트코스 짜서, 제대로 데이트 신청할게."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내 손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너네 집도 이쪽이야?"

녀석이 갑자기 잡은 손이 간질거려서, 생각나는 질문을 아무거나 던졌다.

"아니."
"그럼 왜 이쪽으로 가고 있어?"
"너 집까지 바래다 주려고."

녀석의 말에 좀 닭살이 돋았다. 아직 완전히 면역력이 생긴 건 아닌가 보다.

"됐어, 그냥 가."
"원래 데이트 끝나면 바래다 주고 그러는 거야."
"그래도 좀... 민망해."

이제는 으슥한 골목길도 다 끝나가서, 녀석이 잡은 손을 빼려는데, 녀석이 오히려 더 꽉 잡고 깍지까지 꼈다. 결국 멈춰섰다.

"야, 뭐하는 거야? 누가 봐."
"난 상관없는데?"
"내가 상관 있어. 이제 바로 우리 집이란 말야."
"그럼, 내가 손 놔주면 넌 뭐 해줄 건데?"

아, 이홍빈 이 나쁜 자식. 역시 나쁜 놈이 맞다.

"뭐, 뭐 원하는데?"
"너네 집에서 커피 한 잔 줄 거야?"
"나 커피 써서 안 마시는데?"
"아, 이 초딩."

녀석이 다시 손을 끌고 나가려고 하길래, 다급하게 외쳤다.

"집, 집에 유자차 있는데!"

녀석이 날 보며 크게 웃는다. 아, 제대로 휘말린 것 같다. 이홍빈 이 나쁜 놈. 그렇게, 결국, 녀석을 집 안에 들이고 말았다. 아, 차라리 사나운 늑대가 더 안전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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