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Please skip this part if you don't like less-than-perfect happy endings.

               꽉 막힌 해피엔딩을 좋아하시면 이 부분은 스킵해 주세요.








오늘도 진을 만나고 밤 늦게야 돌아온 시누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기 무섭게 잠들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누가 문을 쾅, 쾅 두드렸을 때, 짜증을 내며 힘겹게 눈을 뜬 건 당연한 거였다.

침대에서 몸을 채 움직이기도 전에, 문을 두드린 엘프가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챈시였다. 단번에 침대로 다가와 시누를 억지로 일으켰다. 시누는 짜증이 더 치밀었다.

"아, 이 한밤중에 무슨..."
"산불이 났어요!"
"뭐?"

정신이 확, 들었다.

"어디?"
"동쪽 밤나무 숲이요."

시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동쪽 밤나무 숲이라면, 은사시나무 숲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왜 챈시가 시누를 이렇게 거칠게 깨웠는지 알 것 같다. 게다가, 이번 가을은 유난히도 건조해, 모든 나무들이 메말라 있다. 불이 번지는 건 시간문제다.

시누는 벌떡 일어나 옷을 대충 걸쳐 입었다. 혹시나 몰라 활과 화살통을 챙겼다.

"멍청한 인간들! 밤을 주우러 와서 담뱃불을 그냥 버리고 간 모양이에요. 지금 마을에서도 다 불을 끄러 간다고 엘프들이 모이고 있어요. 시누, 같이 가실 거죠?"
"기다릴 시간이 없어. 다 모이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나 먼저 갈게."
"혼자서 뭘 어떻게 하려고... 시누!"

챈시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시누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마을 전체가 이미 들썩이고 있다. 다른 엘프들도 자다가 깨 일어나 서둘러 불을 끄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원래 인간의 출입이 안 되는 숲이다. 인간들이 불을 끄러 올 일이 없다는 얘기다. 엘프의 관대함으로, 넘쳐나는 밤을 주울 수 있게 몇몇 인간들이 밤나무 숲으로 오는 걸 눈감아 준 결과가 이거라니... 게다가 이렇게 모든 나무가 메말라, 불이 너무 쉽게 번질 수 있는 시기에... 숲의 가디언인 우드 엘프들에게 이렇게 산불로 숲의 나무들이 죽어가는 것은, 정말 살이 깎이는 듯한 고통이다.

아직 준비 중인 엘프들 사이로 시누는 밧줄 사다리를 내려뜨리고 서둘러 나무에서 내려왔다. 발이 땅에 닿자 뛰기 시작했다. 점점, 공기에서 타는 나무 냄새가 난다. 걸음이 더 빨라졌다. 곧 시누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가시에 얼굴이 긁히고, 팔다리에 생채기가 나도 계속 달렸다. 강가에 이르자,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에 뛰어들었다. 센 물살과 싸우며 겨우 건너, 반대편에 도착했다. 진이 겁에 질린 얼굴로 맞이했다.

"무슨 일이야? 저쪽이 점점 빨개지고 있어."
"불이야."

보니 불길이 벌써 꽤 가까이에 와 있다. 이곳까지 도착하기 전에 잡힐 것 같지가 않다. 시누는 무작정 오느라 제대로 준비를 하고 오지 않은 본인의 어리석음을 욕했다. 가진 거라고는 활과 등에 멘 화살통이다. 화살통을 뒤집어 활을 버리고 강가로 뛰어가 물을 담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

"불이 뭔데? 무슨 일인 거야?"
"불에 타면 나무는 죽어."

진의 얼굴이 더 창백해 졌다. 그런 말로 상처주는 게 미안하지만, 말을 돌려 할 시간이 없다.

"시누... 어쩌려는 거야?"

물을 퍼담아 진의 나무에 퍼붓고, 또 부었다. 어차피 시누 혼자 저 불을 끌 수는 없다. 차라리 불에 타지 않게, 아니, 더디게 타게, 나무를 적시는 게 더 빠르다. 강가와 숲 사이를 왔다갔다 하느라 점점 다리가 떨려왔다. 그래도 쉬지 않고 계속 진의 나무와, 그 주변의 나무들까지 적셨다. 이미 불길은 바로 옆에까지 와 있었다. 그래도 많이 작아진 거로 봐서는, 엘프들이 드디어 도착해 불을 끄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도 같다.

그래도 시누는 포기하지 않았다. 또 한 번 물을 퍼다 날랐다. 몸에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엘프가 땀을 흘리다니. 처음 듣는 얘기다. 이렇게 지치지 않았다면 신기하다,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이게 힘들어서 나는 땀인지, 식은땀이 흐르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불길이 은사시나무 숲의 끝을 삼키기 시작했을 때, 시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한 번 강가로 향했다. 그동안 내내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던 진이 시누를 붙잡았다.

"그만해."

시누는 진의 손길을 내칠 힘도 없어서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다 너까지 죽어."

울먹인다. 그 오래 전에 딱 한 번 본 후 다시는 보지 못했던 진의 눈물에 오히려 시누의 마음이 차분해졌다.

"죽게 두지 않을 거야."
"시누..."

강가에 다다라, 물에 몸을 담갔다. 화살통도 물로 가득 채웠다. 다시 숲으로 돌아와, 불길을 등지고 진의 나무 앞에 섰다.

"뭐... 뭐하려는 거야?"

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몸으로 막아서라도 널 지킬 거야."
"안 돼!"

진이 시누를 밀어내 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진이 절규했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 제발 그냥 가. 시누, 제발!"

시누는 그래도 자리를 지켰다. 바로 등 뒤에 뜨거운 불길의 혀가 느껴졌을 때, 화살통에 담아온 물을 머리끝부터 뒤집어쓰고 진의 나무를 품에 가득 안았다.

"안 돼, 제발! 시누, 제발 가!"

진의 눈물이 시누의 팔에 뚝, 뚝, 떨어졌다. 시누는 진에게 마지막으로 미소지어 보였다. 진이 온 힘을 다해 나무의 나뭇가지들을 움직여 시누의 머리와 어깨를 감쌌다. 불길이 둘을 덮쳤다.








숲에도 다시 봄이 찾아왔다. 산불로 타버린 나무들 사이로 다시 풀이 자라고, 들꽃이 핀다. 그리고... 산불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그루의 은사시나무에도 다시 새로운 잎이 난다. 타버리고 없어진 나무의 자리에도, 새로운 나무들이 싹을 틔운다. 진의 나무에도 새로운 잎이 나고 있다. 위쪽의 가지는 대부분 다 타버렸지만, 밑둥과 줄기가 살아남았다. 그렇게, 진 역시 살아남았다.

이제는 너무 작아진 은사시나무 숲 옆 강가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다. 진과 시누의 집이다. 시누는 웃옷을 벗은 채 엎드려 자고 있다. 등의 화상 흉터가 아직도 아프기 때문이다. 진이 최대한 막아주려 노력해서, 다행히 머리와 어깨에는 화상을 적게 입었지만, 등은 불길에 그대로 노출돼, 곳곳에 피부가 녹아내렸다. 그래도 은사시나무 숲을 덮치기 전, 불길이 많이 잡혔고, 불길에 휩싸인 시누를 보고 엘프들이 합심해서 물을 길어다 불을 끈 덕분에, 시누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문제는, 우드 엘프들은 딱히 의술이라 할 게 없고, 마법도 다룰 줄 모른다. 그래서 시누는 한동안 사경을 헤맸다. 진의 나무도 위의 반 이상이 타버렸다. 그나마 엘프의 재생력 덕분에, 시누는 저 정도로 회복된 거다. 그리고, 시누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불길을 막아준 덕분에, 진의 나무의 심장이 살아남아, 결국 진도 죽지 않았다.

늦잠을 자고 있는 시누가 깰세라 진이 조용히 옆에서 약초를 짓이기고 있다. 그렇게 준비된 약초를 시누의 등에 골고루 발라준다. 시누가 잠결에 신음한다. 미안한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 손길에 시누가 깬다. 진을 보며 잠결에 미소짓는다.

"잘 잤어?"
"일어났어?"

진이 머리에 쪽, 하고 입을 맞춘다. 시누는 기지개를 켜려다 아픈지 멈칫한다.

"아, 붕대감아 줄게."

얇게 자른 천을 갖다가 꼼꼼히 감아준다. 시누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지만, 등 뒤의 진이 신경쓸까 봐 신음을 삼킨다. 붕대를 다 감고, 진이 손을 씻으러 간 사이, 시누는 참았던 신음을 뱉어낸다. 진이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밝게 웃어보인다.

"아침 먹고 활쏘기 연습하러 갈까?"

등이 많이 다쳐 활 쏘는 게 어려워졌다. 사실, 지금 이렇게 팔과 등의 근육을 움직일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래도 시누는 아무리 아파도 꾹 참고 계속 연습을 하고 있다. 진은 미소짓는다.

"그런데, 불안하지 않아?"
"뭐가?"
"내가 너보다 더 잘 쏘게 될까 봐."

다시 침대에 앉아 있는 시누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과일을 씻으러 간다. 시누는 일어나 옷을 입고, 시누의 아침을 준비하는 진에게 다가가 뒤에서 안는다. 예전, 활 쏘는 법을 처음 가르쳐줬을 때에는 보기만 했던 하얀 목에 키스를 한다. 검은 머리카락에도, 많이 야위어 드러난 어깨뼈에도, 그렇게 입을 맞춘다. 나무가 다친 만큼, 진의 몸 역시 많이 약해지고, 말랐다. 하지만, 그래도 이 소중한 이를 지켜냈다. 그거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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