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동우의 얼굴은 점점 말라갔다. 그건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그렇게 동우의 집을 나온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 한 마디 건넨 적이 없었다. 그래서... 동우의 결혼식 이틀 전, 비서실에 그 여자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그리고 그 여자가 진영에게 만나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 진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웃기게도, 여자가 잡은 장소는 동우의 어머니와 같은 카페였다. 일부러 지난번 앉았던 테이블과 최대한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여자를 기다렸다. 그 여자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미안해요, 바쁜데 불러내서."

이 여자는 늘 사과부터 건넨다. 진영은 커피를 시키려다가, 기억을 해 내고 주스 두 잔을 시켰다. 여자는 그런 진영에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누군지 알죠?"
"네."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진영 씨... 라고 불러도 되나요?"
"네."
"진영 씨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부탁이요?"

이 상황에서 저 여자가 할 부탁이란 건 하나밖에 없다. 동우를 더는 만나지 말라는 거다. 이미 안 만나고 있는데, 그런 얘길 동우에게 못 들었나 보다.

"제발 동우 씨 좀 설득해 주세요. 이 결혼식 취소하도록."

이 카페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늘 예상을 빗나간다. 여자는 간절한 눈으로 진영을 쳐다본다.

"무슨 얘긴지..."
"우리 둘 다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 아니잖아요. 둘 다 불행해질 거에요. 난, 우리 아버지 때문에 이 결혼을 해야만 되요. 하지만 동우 씨는 아니잖아요. 동우 씨가 싫다고 하면 안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동우 씨 좀 설득해줘요."
"하지만 아이는요?"

생각보다 저 말이 쉽게 나왔다. 동우의 아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렸는데, 그 말이 쉽게 나오는 걸 보니 그만큼 당황한 것 같다.

"아이 때문에 하는 결혼이라서 더 하기 싫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 좀 도와줘요."

이 여자의 이런 태도가, 이런 말투가, 이런 행동이 화가 났다. 여자라는 이유로, 아이를 가졌단 이유로 동우와 결혼하는 거면서 그걸 부정하고 있다. 진영은 절대 할 수 없는 걸 하면서, 그게 싫다고 도와달라고 하고 있다. 그런 이 여자가 짜증났다.

"동우와 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날 이후로 둘이 본 적도 없고, 얘기를 나눈 적도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진영의 조금은 차가운 말에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이 여자는 왜 늘 이리 죄인처럼 구는 거지? 더 짜증이 났다. 이 여자를 보고 있으면, 정말 드라마처럼 물이라도 얼굴에 뿌릴 것 같다. 그래서 진영은 일어섰다.

"더 하실 얘기 없으면 전 이만..."
"진영 씨."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절박함 같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미안해요. 진짜, 정말 미안해요."

저 여자는 마지막까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과를 했다. 진영은 여자를 한 번 더 쳐다본 후, 자리를 떴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끼익, 하는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타이어가 타는 냄새와 함께. 진영은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 여자가 도로에 누워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많은 피가, 여자의 치마 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소문은 왜 그리 빨리도 퍼지는지, 곧 회사에 난리가 났다. 사장의 약혼녀가 차에 뛰어들어 자살 기도를 했고, 그 결과 아이는 유산됐다고, 그래서 결혼은 취소됐다고. 그리고 그 차에 뛰어든 게 동우의 숨겨둔 애인을 만난 후였다고. 회사에서 막아 기사화되진 않았지만, 이미 회사 전체에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전에는 그저 비웃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대놓고 진영을 욕했다. 임신한 여자에게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길래 자살 기도를 하게 만들었냐고. 하지만 제일 황당한 건 진영이었다. 저 여자가 왜 저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바깥에서도, 어느 누구 하나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동우는 여전히 진영을 무시하고 있었다. 모두에게서 고립된 진영은, 그래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제는 거의 오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동우의 결혼식이 열렸어야 할 날에서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진영은 퇴근을 하고 회사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아무리 회사 안에서는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를 악물며 버틴 진영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회사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제일 가까운 버스정류장에는 차마 가지 못 하고, 요즘은 좀 더 먼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곤 했다.

고개를 숙이고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데, 옆에서 클랙슨 소리가 났다. 무시하다가, 여러 번 들리길래 그쪽을 돌아보니, 하얀 차가 진영을 따라오고 있었다. 몸을 숙여 안을 보니 그 여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여자가 타라고 손짓했다. 황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에 올라탔다.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여자에게서 뭐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너무 억울했다.

"미안해요, 전화번호를 몰라서. 비서실에 전화했다간 무슨 얘기가 더 나올지 모르고."

여자는 다시 사과로 말을 시작했다. 진영은 그런 여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도, 표정이 좋다. 뭔가 큰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여자는 별다른 말 없이 차를 한강까지 몰았다. 그냥 차 안에서 얘기를 하고 싶다면서. 차가 멈추고 나서야 여자는 진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요. 내가 진영 씨를 이용했어요."
"네? 무슨..."
"뱃속의 아이를 없애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방법이, 그럴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진영 씨를 그 이유로 이용했어요."

여자의 얘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자는 혼란스러워하는 진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가... 동우 씨 아이가 아니었거든요."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아버지는 절 어떻게든 동우 씨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하셨어요. 그래서, 전 오래 만나던 남자친구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헤어진 후에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되더라구요. 그러다 알게 됐어요, 임신했단 걸."

여자의 얼굴에 감정이 없다.

"그래서, 그 남자와 동우 씨에게 얘기를 했는데, 내가 결혼하길 바란 남자는 애를 지우라고 하더라구요.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난 거 아니냐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를 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던 사람이... 내가 파혼을 바란 남자는 내게 결혼을 서두르자고 얘기했구요. 동우 씨가, 자기 애가 아니어도 상관 없다고, 빨리 결혼하자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너무 고마웠어요."

마치 진영을 만나러 오기 전 대사 연습이라도 한 듯, 막히지 않고 말한다. 듣는 진영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데.

"그런데, 결혼식 날짜가 다가올수록, 도저히 못 하겠더라구요. 뱃속의 애가 족쇄처럼 느껴졌어요. 나와 동우 씨를 둘 다 불행하게 만들 그런 족쇄. 그런데 소문이 금방 퍼져서, 내가 누구랑 결혼할 사람인지 다 알아서, 애를 지울 수가 없더라구요. 애가 내 뱃속에 있는 한, 동우 씨는 이 결혼을 하려고 할 거고, 그러면 동우 씨나 나나 행복할 수 없었을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든 없애고 싶었어요."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진영을 쳐다본다.

"경악스럽죠? 애 지우는 얘기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대답을 바란 건 아닌지 바로 말을 잇는다.

"하지만 전 평생 아이를 볼 때마다 내가 동우 씨에게 지은 죄와,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가 떠올라 힘들고 괴로웠을 거에요. 전 이기적인 사람이라, 그렇게는 못 살겠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마지막 방법을 떠올렸어요. 진영 씨를 제물로 삼는 거."

진영은 점점 얼굴의 핏기를 잃어가는데, 여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제 저런 얘기를 저렇게 감정 없이 하는 여자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말이 되잖아요. 남편 될 사람의 애인과 만난 후 자살 기도. 그래서 진영 씨를 불러냈고. 하지만 진영 씨에게 그날 한 말은 다 진심이었어요. 제발 이 결혼을 누구라도 막아주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결국 진영 씨가 그런 대답을 하리란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진영 씨 나가고, 차에 뛰어들었어요. 제발 뱃속의 애가 죽기를 바라면서. 뭐, 솔직히 그러다 내가 죽었어도 상관은 없었어요. 그 정도로 절박했으니까. 그리고, 제가 원한 대로 됐어요."

여자가 다시 진영을 쳐다보았다.

"괴물같죠, 저? 하지만... 전 제가 이렇게 망가져서 기뻐요. 이제 아버지가 절 어느 누구에게도 팔아버릴 생각을 못하게 됐으니까. 이제 전 자유에요. 아버지가 절 버렸거든요. 쓸모가 없어졌으니까. 그래서, 기뻐요."

이 여자는 또 얼마나 힘들게 인생을 살았고, 어떤 아버지 밑에서 자랐길래 이런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진영은 이 여자가 한편으로는 소름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쌍했다.

"진영 씨한테는 정말 못할 짓 했어요. 진짜, 큰 죄를 지었어요. 평생 미안해하며 살게요. 그리고, 평생 고마워하며 살게요. 그러니까, 저 욕하고 미워하지 말아줘요. 저 같은 거에 그런 시간, 에너지 허비하지 말고 살아요. 저 그럴 가치 없는 사람이니까."

창백해진 얼굴의 진영은 저 여자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설명을 바라긴 했지만, 이런 얘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할 말을 다 했는지 여자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까운 버스정류장에 내려달라는 말에 여자는 군말 없이 길가에 차를 세웠다. 내리려는 진영을 여자가 잡았다.

"동우 씨, 정말 불쌍한 사람이에요. 난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줄 알았는데, 동우 씨가 더 불쌍해요. 동우 씨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 그만큼 더 불행하니까요. 내가 저지른 일 뻔히 알면서, 내가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거 알고, 돈을 주더라구요. 어디 멀리 가서 다 잊고 행복하게 살라고. 그래서, 염치없지만 받았어요. 진짜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데, 동우 씨는 행복하지 않으니까, 그게 마음에 걸려요. 그러니까, 저 두 사람에게 조금만 덜 미안할 수 있게, 두 사람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끝까지 이기적이네요, 저."

진영은 여자를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차에서 내렸다. 전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래도, 불쌍한 마음은 남아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진영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다음 날, 용기를 내 동우에게 연락을 해 보려던 진영은,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동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3일장을 치른 뒤, 동우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진영에게는 지방발령이 지시됐다. 결국, 회사를 떠나란 말이다. 그건 다시 말해, 동우가 이제 정말로 진영을 끊어냈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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