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의 어머니가 회사에 다녀간 후, 진영이 사장실로 호출되는 일이 잦아졌다. 즉, 비서실의 비서들에게 새로운 가십거리가 늘었다. 진영은 이제 될 대로 되라, 싶었다. 자기가 먼저 시작한 일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결국 동우의 아파트에까지 드나들게 되었다. 그렇게, 동우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동우와 같이 있으면서 알게된 건, 회사에서 들은 것처럼 난잡하게 놀고, 사고도 많이 쳤다던 동우가 일을 참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였다. 가끔 한밤중에 깨 옆을 보면 침대가 비어 있다. 그럴 때면 동우는 서재나 거실에서 서류를 읽고 있었다. 회사에서 그런 말을 듣긴 했다. 회사 일은 나몰라라, 하고 놀던 동우가 아버지가 입원한 후에는 많이 착실해졌다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동우는 거의 늘 회사 서류와 함께 하고 있었다. 회사 일이 아직 서툴어 많이 벅찬지, 계속 공부하듯 서류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마치 회사의 모든 서류를 다 읽으려는 듯이, 그렇게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공부를 했다. 어머니와의 사이는 어떨지 몰라도, 아버지를 많이 위하는구나, 생각했다.

또 한 가지는, 동우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적어도 단둘이 있을 때는. 진영이 먼저 키스를 한 그 순간부터 둘 사이에 뭔가가 변했다. 사장실로 호출했을 때 하는 명령적인 말투도, 진영이 커피 등을 사장실로 들고 왔을 때 무시하는 태도도 없어졌다. 둘만 있을 때의 동우는 권위적이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다정했다. 그때의 그 폭력적인 키스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 안을 때도, 진영이 힘들지는 않은지, 아프지는 않은지, 늘 신경썼다. 누군가를 위한 연출이 아니라 진짜여서, 진심이어서 그런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별 말을 하지 않는다. 뭔가 얘기라도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본가로 들어간 후 많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왜 그렇게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는지, 말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얘기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영 역시 할 말이 없었다. 뭘 물어보지를 않으니까, 대답할 수가 없다. 정작 몸을 섞으면서, 혀를 섞으면서, 말을 섞지 않는다. 그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아, 힘들어도 괴로워도 누구에게도 말 안 하고 담아만 두고 살아서, 그게 나쁜 식으로 표현되는 것 같아서, 늘 비꼬고 무시하고 비웃는 모습으로 위장하는 것 같아서, 동우가 안쓰러웠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던 진영은 말소리에 깼다. 옆을 보니 동우가 없다. 거실에서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는 듯하다. 나갈까 말까, 망설였지만, 나가지 않았다. 동우의 아파트에 오는 사람이래야 도우미 아니면 동우의 어머니일 것 같아서, 그 여자랑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바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타월 하나만 두르고 나오는데, 처음 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열린 방 문턱에 서서 진영을 보고 있었다. 진영은 당황했다. 게다가, 어젯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몸까지 보여서, 어쩔 줄 몰랐다. 뭔가라도 찾아 걸치려는데, 여자는 손사레를 쳤다.

"미안해요. 그냥... 여기 있다길래...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미안해요."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여자는 방을 나갔다. 진영은 서둘러 옷을 입었다. 이미 밖에서는 큰소리가 나고 있었다.

"네가 뭔데 저길 들어가?"
"미안해요. 그냥... 너무 궁금해서..."

거실로 나와보니 동우는 서서 여자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고, 여자는 죄인마냥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진영이 나오자 둘이 동시에 쳐다봤다.

"아... 저..."

왠지 저 여자가 누군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이 상황에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누가 봐도 잘못은 동우가 했는데, 저 여자가 저렇게 고개 숙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 불쌍하다. 동우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얘기가 떠올라 더욱 그랬다. 저 여자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을 거다.

"나 갈게."
"있어."

동우가 진영을 저지했다. 그리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보고 싶은 거 봤으면 가."
"그게 아니라... 동우 씨랑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예요. 둘이서 해야 할 얘기."

여자가 진영은 보지 않은 채 동우에게 말했다. 진영에게 나가 달라는 얘기다. 진영은 동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우의 집을 나섰다. 그곳에서 그 여자를 보는 게 껄끄러웠다.

주말 내내 동우는 연락이 없었다. 월요일에 출근해서야 진영은 그 이유를 알았다. 동우가 갑자기 결혼 날짜를 잡았다. 그것도 바로 2주 후로. 소문이 돌았다. 약혼녀가 임신했다고. 그래서 서두르는 거라고. 그 후, 동우가 진영을 사장실로 호출하는 일도, 집으로 부르는 일도 없었다.

동우의 어머니가 맞았나 보다. 결국, 갖고 놀다가 질린 장난감처럼 버려졌다. 하지만 그래도 진영은 회사를 관둘 수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의 비웃는 시선도, 고소해 하는 표정도 상관 없었다. 그냥... 그렇게라도 동우 옆에 있고 싶었다. 그런 자기 모습이 우스웠지만, 왠지 지금 회사를 떠나면,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동우를 버리고 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아무리 버려졌어도, 진영이 동우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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