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다. 동우는 늘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나가고, 다시 들어와 서류검토를 하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퇴근을 했다. 진영을 따로 호출하는 일은 없었다. 가끔 진영이 선배 비서들에게 등떠밀려 차나 결재서류 등을 들고 사장실에 들어와도, 별다른 말이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진영이 들어갔던 모습 그대로 바로 나오면, 다른 비서들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내 인생이 당신들에게는 그저 재밌는 볼거리에 지나지 않는 거냐, 라고 따지고 싶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쇼를 1열에서 볼 수 있으니, 좋겠다며 비웃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서실에 있으니 원하지 않아도 소문은 제일 먼저 듣는다. 게다가, 일부러 진영보고 들으라는 듯, 다른 비서들은 늘 동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동우의 약혼녀가 어디 중소기업 사장의 딸인데, 그 아버지랑 동우의 어머니가 밀어붙여 성사된 약혼이라는 얘기, 동우가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남자, 여자 안 가리고 난잡하게 논 것으로 유명해서 제대로 된 집안 딸과는 결혼할 수 없을 거라는 얘기 등, 당사자의 가슴을 후벼파는 얘기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었다.

회사 사람들에게 동우는 참 좋은 가십거리인 듯했다. 사실, 얼핏 얘기 들어보면 어디 막장 드라마같은 내용이다. 술집 출신의 여자가 중년의 재벌회장 애를 가져서 어디 살림을 차려 줬고, 회장이 암에 걸린 후 다른 애가 없어서 동우가 중학교 때 호적에 올라갔다는 얘기, 피는 못 속이는지 그 아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더럽게 놀기로 유명했다는 얘기, 지금은 정실부인도 죽었겠다, 회장도 암이 재발해 입원해 있겠다, 술집 출신의 여자가 사모님 행세하고 다닌다는 얘기... 정말 텔레비전을 틀면 나올 것 같은 이야기 투성이였다.

진영은 일부러 귀를 막고 못 들은 척했다. 어쨌든, 진영을 사장의 애인이라 생각하면서도 진영 앞에서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얼마나 동우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였기 때문이다. 동우도, 그런 소문이 도는 걸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왜 동우가 그렇게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진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혼녀의 아버지가 다녀가고, 바로 다음 날, 진영은 다시 사장실로 호출됐다. 이제는 익숙한 풍경인 소파에 앉아 서류를 읽는 동우를 쳐다보며, 동우의 손짓에도 앉지 않고 서서 기다렸다. 동우는 상관이 없다는 듯, 진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잠시 후, 결재서류를 내려놓고, 동우가 진영을 올려다보았다.

"벗어."

이번엔 망설임도 없이 자켓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쳐 놓았다. 그리고, 동우가 보는 앞에서 넥타이를 풀어 그 위에 얹어놓고, 셔츠 단추도 몇 개 알아서 풀었다. 동우는 그 특유의 비릿한 웃음이 아닌,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단추가 뜯어지는 게 싫어서..."

진영의 말에 동우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곧, 다시 무표정이 되었다.

"이리 와."

진영이 동우 앞으로 걸어갔다. 지난번처럼 옆에 앉으려 하는데, 갑자기 팔을 끌어당겼다. 진영의 허리를 잡아 돌려 앉혔다. 졸지에, 무릎을 꿇은 채 동우와 얼굴을 맞대고, 동우의 무릎 위에 앉은 모양새가 됐다. 동우는 당황하는 진영을 무시한 채 다시 바지 단추에 손을 댔다. 이번엔 아무 말 없이 동우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바지의 단추를 풀고, 셔츠를 끌어내고, 이번에는 진영이 풀지 않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진영은 처음 전개되는 상황에 점점 더 당황하기 시작했다.

셔츠가 벌어지고, 동우는 그 안으로 손을 넣어 진영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익숙하게 다시 목을 물었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세게가 아니라, 혀를 써가며 빨아들이고, 잘근잘근 씹는 듯 깨물었다. 진영은 더욱더 당황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래서 동우에게 말을 했다.

"이번엔 누구를 위한 연출이야?"

동우는 진영의 목에서 입술을 떼고, 진영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읽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다시 같은 자리를 세게 물었다. 신음하는 진영의 목에 입술을 댄 채로 슬쩍 웃는 것도 같았다. 입술을 점점 밑으로 미끄러트려, 이번엔 쇄골뼈를 물었다. 진영은 다시 신음했다. 아까처럼 살짝, 살짝 깨물고, 빨아들이고, 혀로 핥았다. 진영의 몸이 조금 뜨거워졌다. 동우는 그 상태로 잠시 멈춰 있었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듯이.

그때, 역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문과 등지고 있는 진영은 누군지 보지 못했고, 동우는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입을 열 때까지 철저히 무시했다.

"재밌는 구경을 시켜주는구나, 아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진영은 일어나려 했다. 동우는 진영의 허리를 더 꽉 안아 꼼짝 못하게 하고, 진영의 어깨 너머로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편히 앉아서 보실래요?"

동우와 말을 섞어본 게 몇 번 안 되지만, 저렇게 서릿발 서린 목소리는 처음이다. 진영은 순간 소름이 끼쳤다.

"네가 날 위해 특별히 제작한 쇼인데, 내가 거절하겠니?"

진짜 자리라도 잡고 계속 구경할 기세다. 진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보통 이 정도 하면 끝나는 건데, 설마 동우가 아무리 자기 어머니가 미워도 여기서 뭘 어떻게 더... 라고 생각하는데, 동우가 입술을 덮쳐왔다. 고개를 돌려 피하려는 진영의 뒤통수를 꽉 잡아 고정시키고, 진영의 입술을 깨물어 벌리게 한 뒤 혀로 입 안을 헤집었다. 거의 폭력에 가까운 키스다.

그 순간에, 진영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나 소리내어 웃고 싶었다. 그리고, 엉엉 울고 싶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일이 있기 불과 며칠 전, 둘은 늘 그렇듯 진영의 집에서 같이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늘 보던 만화가 아니라,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무슨 영화나 드라마였던 것 같다. 스크린에서 나오는 결혼식 장면을 보고, 동우가 진영을 보며 말했었다. 난 너랑 결혼할 거라고. 남자끼리 어떻게 결혼하냐는 진영의 말에 상관없다고, 자기는 무조건 할 거라고, 하는 동우가 참 귀여웠다. 그래서 "나랑 결혼해 줄 거야?"란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우가 다가와 입술에 쪽, 뽀뽀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 표현하는 거라며, 결혼해서 동우 집에서 같이 살자며,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그 어린 나이에 뭘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그랬었다.

지금 이 키스로, 동우는 진영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짓뭉개 버렸다. 그때의 동우가 생각나 웃음이 나고, 그 추억이 이런 식으로 더렵혀지는 게 슬퍼 울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동우의 어머니가 나갔는지, 동우가 입술을 떼고, 이제 다 끝났다는 식으로 진영의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고 무표정한 얼굴로 진영을 쳐다봤을 때, 진영은 동우의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겹쳤다. 놀라 벌어진 동우의 입술 사이로 혀를 넣어 동우의 혀를 찾았다. 방금 한 아프기만한 키스가 아니라, 부드럽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동우의 입 안을 훑었다. 어떻게든 방금 있었던 일을 덮으려고, 그래서 그 소중한 추억을 지키려고, 그 생각 하나로만 그렇게 했다. 잠시 얼었던 동우가 다시 진영의 허리에 팔을 감고,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제, 정말, 되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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