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이 구겨진 옷을 최대한 제대로 갖춰 입고 사장실 밖으로 나왔을 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비서들 중 하나가 메모지를 건넸다. 보니 한 카페의 이름이 적혀 있다. 누가 불러낸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기다리게 하는 건 아무래도 실례 같아서,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역시, 동우의 어머니였다.

왠지, 드라마에서 참 많이 본 것 같은 장면이다. 진영은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아 우아한 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마시는 그녀를 관찰했다. 어릴 때 몇 번 봤을 때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학교 끝나고 동우가 집에 가방을 놓고 올 때, 몇 번 집 안을 훔쳐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경우, 술병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거실 한켠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동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익숙한지, 신경쓰지 않고 담요를 덮어주거나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진영이 부끄러워서, 자세히 보지 않았었다.

지금 보는 그녀는 참, 돈을 많이 들인 모습이다.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얼굴에 표정이 없다. 진영을 봐서 그러는 건지, 표정을 지을 수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왠지 후자일 것 같다. 몸매도 날씬하고, 옷도 세련되고, 어느 모로 보나 부잣집 마나님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진영은 왠지 이 상황에서, 그녀가 가방에서 돈봉투를 꺼내거나, 앞의 물잔을 진영의 얼굴에 뿌리거나, 할 것 같았다.

"네가 동우 새 장난감이라고?"

저런 대사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네?"
"회사에 도는 소문은 다 내 귀에 들어오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녀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옆에 놓은 가방을 집었다. 돈봉투다, 생각했지만, 그녀는 컴팩트를 꺼내 립스틱이 번졌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지 뭐야?"

누가 모자지간 아니랄까 봐, 거울을 보며 진영에게 말을 거는 게 동우와 닮았다.

"너, 이름이 정진영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컴팩트를 탁, 내려놓았다.

"낯짝도 참 두껍다, 너?"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얼음장같이 차다. 진영은 들어올리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네 에미가 우리 동우한테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데, 네가 우리 아들한테 얼마나 상처를 줬는데, 네가 얻다 대고 여길 나타나?"

아까는 부드러운 마나님 같던 목소리가 표독스럽다. 만약 저 얼굴이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면, 진영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을 것 같다. 진영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착하고 예쁘던 아들이, 너랑 네 에미 때문에 망가졌어. 그 일 이후로 애가 변했어. 너와 네 에미가 그렇게 만들었어. 첩, 술집 여자, 그게 우리 동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욕하려면 나를 욕해야지, 왜 힘없는 애를 괴롭혀? 쓰레기들."

혓바늘에 독이 발라있는 것처럼, 그녀가 독기 서린 말을 내뱉는다. 그 말에 받는 상처가, 타들어갈 듯이 아프다.

"그렇게 잘났다고 반상회까지 열어 그런 고급 아파트에 첩과 그 자식이 살게 둘 거냐고 난리치던 네 에미는, 사업 망하고 참 힘들게 살다 갔다더라? 난 우리 아들이 지금 한국에서 손꼽히는 회사 후계자가 됐는데. 세상 참, 재밌지 않니?"
"그래도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진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순간, 화가 났다. 아무리 제 어머니가 잘못 했어도, 이런 식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떨리던 손이 멈췄다. 자존심 하나로 살던 어머니가 가난해진 후로 너무 작아져 버려서, 어린 마음에는 많이도 원망 했었는데, 나중에는 그런 원망이 사라졌었다. 물론, 첩의 자식과 다시는 놀지 말라고, 그런 애랑 노는 애는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하던 모습은 아직까지 상처로 남아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얘긴 데도...

동우의 어머니는 진영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컴팩트를 다시 가방 속에 넣었다.

"너, 원하는 게 뭐야?"

말투가 바뀌었다. 사무적이다. 진영은 그녀의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왜 우리 동우 옆에 붙어 있냐고, 너."
"전 사장님 비서입니다. 그저..."
"방금 그런 걸 보고 잘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겠다?"

비웃는 투다.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진영도 솔직히 자기가 뭘 원하는지, 동우와 무슨 관계인지 말할 수 없다.

"뭐, 알아보니 네가 딱히 우리 동우한테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대학교 때 남자 몇 명 사귄 거로 보아, 너도 그쪽인 모양이고, 네가 가진 것도 없고, 하니까 우리 아들한테 붙어서 뭐라도 받아먹을 생각인 것 같은데, 내가 그런 걸 욕할 처지는 아니고."

다시 화가 치민다. 하지만 이건 저 여자가 일부러 진영의 화를 돋우려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경고다. 이미 알아볼 만큼 알아봤다고, 그러니까 허튼 짓 하지 말라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동우, 결혼할 여자 있는 건 알지?"

다시 창 밖을 보며 딴청부리며 말한다. 그녀에게 다시 동우가 겹쳐 보인다. 진영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주선한 결혼이야. 나 힘들 때 도와주신 분 딸이거든."

이 다음에 무슨 대사가 올지 알 것 같다.

"그래서, 너, 우리 동우 애인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하지만 이 여자는 또 예상을 빗나간다.

"우리 동우가 너 갖고 논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니? 차라리 너같이 애 배서 발목 잡을 수 없는 애가 낫지. 한창 재밌게 갖고 놀던 장난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모양인데, 질릴 때까지 갖고 놀게 둬야지. 안 그래?"

왜 동우가 이 여자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 진영은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진영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까, 놀고 싶을 만큼 놀고, 나대고 싶으면 나대도 돼. 어차피 저쪽 집 사람들도 우리 동우 어떤 앤지 아니까, 네가 뭘 어떻게 해도 이 결혼은 깨지지 않아. 나중에, 우리 아들이 너한테 질리기 전에, 한몫 미리 두둑히 챙겨놓기나 해. 그래야 덜 억울하지 않겠어?"

걱정말라고, 당신처럼 첩은 되지 않겠다고 쏘아붙이고 싶다. 하지만, 저 여자처럼 바닥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지금 저 여자는 어릴 때 자기 아들한테 상처를 준 진영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거다. 제 딴에는, 아들을 위해주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까 났던 화가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할 말을 다 한 건지 그녀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진영도 같이 일어섰다. 그녀는 진영의 인사를 무시한 채 카페에서 나갔다. 진영은 다시 자리에 앉아 다 식은 커피를 마셨다. 저 여자와 만난 지금, 드는 단 한 생각은, 저 여자 밑에서 자란 동우가 참 많이 안쓰럽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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