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런 고등학교, 그저 그런 대학교를 나와 취업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진영이 서류전형에서부터 이미 탈락하고 시작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쩌다 운 좋게 면접까지 가도, 더 대단하고 더 잘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한 대기업에 기적적으로 서류전형이 통과됐을 때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면접장에서도, 외국 한 번 가본 적 없는 진영 바로 양 옆에 조기유학을 다녀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두 명이 앉아, 진영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하며 기를 죽였다. 정작 진영에게는 통상적인 질문 한 두 개 정도가 다였다. 너무 당연하게, 그래서 떨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다음날 바로 합격 통보 문자가 올 줄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다음주 월요일부터 사장 비서실로 출근하라는 메세지와 함께 왔다. 말이 되지 않는다. 진영은 마케팅과를 지원했었는데, 비서가 하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비서실이라니? 하지만 대기업이다. 하다못해 주차요원을 하라고 했어도 감지덕지였을 거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도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혼자 조그만 원룸에 살고 있던 진영이었기에, 딱히 이 기쁜 소식을 함께 축하해 줄 사람이 없었다. 학교 동기들은 겉으로는 축하해 주면서, 속으로는 질투하고 약올라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럴 정도로 과분한 자리였다.

하지만, 월요일에 회사에 가서, 사장실 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을 때, 왜 그런 기적이 자기에게 일어났는지 알았다. 그건 기적이 아니라, 벌이었다.








"오랜만이다. 정진영."

진영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결재서류를 읽고 있는 동우를 굳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동우는 서류에서 고개를 들지도 않고 진영에게 손짓을 했다.

"앉아."

진영은 말없이 동우가 가리킨 자리로 가 앉았다. 동우는 다시 진영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 동우를 진영은 말없이, 계속 쳐다만 보았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비서실장과 다른 비서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걸 느꼈었다. 물론, 이쪽 일은 전혀 모르는 진영이 뽑혀, 선배들이 기분 나빠할 수 있다는 건 미리 예상했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낼 줄은 몰랐다. 사장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주차장 경비실에서 오고, 다른 비서들은 사장을 맞을 준비를 했지만, 진영에게는 탕비실로 가 커피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사장이 사무실로 들어간 뒤, 진영이 내온 커피를 선배 하나가 맛 보더니,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커피도 못 탄다며 다 갖다 버리라고 돌려 보냈다. 커피잔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오자 왜 이리 굼뜨냐며, 사장님께서 신입을 호출한 지 15분이나 지났다고, 첫날부터 찍히려고 하냐고 또 한소리 들었다. 이제 겨우 출근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지치고 있었다.

그래서, 15분이나 사장을 기다리게 한 진영은 방금 설거지를 해서 접어올린 셔츠 소매를 채 다 내릴 새도 없이, 자켓을 챙겨입을 새도 없이, 사장실로 떠밀려 노크를 하고, 들어오란 말에 들어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은 동우를 보았다.

15분을 기다리게 한 죄로 가시방석에 15분을 앉혀 놓을 셈인지, 동우는 진영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진영은 계속 꼼지락거리며, 구겨진 소매를 최대한 펴고, 멀쩡한 넥타이를 괜히 다시 만지고, 하면서 동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결재서류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꼼꼼히 읽은 뒤, 동우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진영에게 말했다.

"이제 나가 봐."
"어? 아, 네?"
"나가보라고."

진영이 머뭇거리며 일어서자 동우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진영이 문 쪽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동우가 일어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문 앞에 다다른 진영의 앞까지 걸어와서, 멱살을 잡아 문 쪽으로 밀었다. 진영의 등이 문에 쾅, 하고 부딪쳤다. 진영이 뭘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동우가 거칠게 진영의 넥타이를 풀고,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단추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동우는 드러난 진영의 목을 세게 물었다.

"윽, 도... 동우야."

진영이 발버둥쳤지만 동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엔 그 좀 더 위를 빨아 키스마크를 만들었다. 제대로, 잘 보이는 위치에. 하얀 목에 빨간 자국이 선명해졌을 때야 진영을 놓아주었다. 진영을 내려다보는 눈이 싸늘하다.

"어디 사장 이름을 함부로 불러, 일개 비서 따위가?"

진영이 방금 물린 목을 잡으며 동우를 올려다보았다.

"새로 온 비서가 첫날부터 이런 꼴이라니, 이거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동우가 진영의 볼을 톡 톡, 손가락으로 쳤다.

"우리 둘 다 잘 알잖아? 소문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그 말과 함께, 손을 진영의 등 뒤로 뻗어 문을 열어 진영을 밀어냈다. 매무새를 채 추스릴 새도 없이, 진영은 그런 모습으로 사장실에서 밀려 나왔다. 다른 비서들의 시선이 진영의 목에 고정되었다. 진영은 얼굴에 피가 쏠려서, 목을 손으로 가리고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래, 이건, 벌이었다.







어렸을 때는 진영의 집이 꽤 부유했다. 그래서 나름 고급 아파트에 살았다. 옆집에는 진영과 동갑인 이동우가 살았다. 둘은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거의 4년을 매일 붙어다녔다. 늘 술에 쩔어 있는 동우의 어머니 때문에, 둘은 보통 방과 후 진영의 집에서 놀았다. 진영의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늦게까지 단둘만 있었다. 그렇게, 둘에게는 서로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온 진영의 어머니가 동우를 보더니 손짓으로 집에 가라고 했다. 평소와는 다른 무서운 표정과 말투에, 동우는 인사만 하고 갔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진영은 동우와 놀지 않았다. 아니, 아예 무시 했다. 아파트에는 소문이 돌았다. 동우가 첩의 아들이라고. 그래서 아버지 성을 안 따르고, 이동우가 된 거라고. 그 소문의 시작은 진영의 어머니였다. 미용실에서 소문을 듣고 와, 진영에게 다시는 동우와 놀지 말라고 명령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아파트 뿐만 아니라 학교에도 곧 동우가 첩의 아들, 그것도 어머니가 술집 출신이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동우는 왕따가 되었다. 학교, 집, 어디에도 친구가 없었다. 믿었던 진영마저 어머니가 무서워 동우를 피했다. 결국, 동우는 첩의 자식이라 놀리는 애들과 큰 싸움을 벌였다. 동우의 아버지 힘으로 일은 무마됐지만, 동우는 이사를 갔고, 전학도 갔다. 그 이후로 동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장 이름이 신동우라고 했을 때, 동우란 이름에 놀랐지만 흔한 이름이니까,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동우가 신 회장의 유일한 자식이라, 아버지 호적에 이름이 올라 성이 바뀐 걸 몰랐다. 출근 첫날, 사장실에서 동우를 볼 때까지도 전혀 몰랐다. 10여년이나 지난 지금, 이렇게 둘 사이가 많이 변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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