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씨, 너 자꾸 궁 그 따위로 쓸 거야?"

홍빈이 짜증낸다. 찬식은 실수한 게 있어서 찔리지만 그래도 대꾸해 본다.

"야, 한 번 실수했다, 딱 한 번."
"그 한 번 때문에 졌잖아. 밥 네가 사."
"와 이거 순 날강도네."

티격거리며 PC방을 나선 둘은 결국 찬식이 사는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대학교가 달라지면서 이렇게 가끔 게임 하는 것 외에 만날 일이 없다. 그래서, 친하기는 하지만, 딱히 절친이라고는 할 수 없는, 딱 그 정도의 친구 사이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다시 한참 게임을 하던 홍빈은, 결국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으..."

홍빈은 알람 소리에 깼다. 웬 알람? 오늘 아침 수업도 없는데, 왜 알람을 켜 놨지? 다시 끄고 잠들었다.

잠시 후,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다시 깼다. 이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 홍빈 하난데, 도대체 누가 문을 연 거지? 놀라 일어나 앉아 문 쪽을 보는데 찬식이 들어온다.

"어? 너 오늘 어디 간다고 그랬잖아."

찬식이 홍빈을 보며 놀란다. 홍빈 역시 찬식을 보며 놀란다.

"너 뭐야? 어떻게 내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아?"
"뭐? 무슨 헛소리야. 네 비밀번호 내 생일이잖아."

뭐? 도대체 홍빈이 왜 찬식의 생일을 도어락 비밀번호로 해 놓는단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 홍빈이 혼란스러워하는데 찬식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옆에 와 앉는다. 그리고 갑자기 입술을 겹친다.

"뭐, 뭐하는 거야?"

찬식이 놀라서 올려다본다. 당황한 홍빈이 밀쳐 바닥에 떨어진 거다.

"아, 아파."

찬식은 팔을 비비며 일어선다. 얼굴에 놀람과 황당함이 섞여 있다.

"너 왜 그래? 나한테 뭐 화난 일 있어?"

도대체 아까부터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다. 전혀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

"너야말로 뭔 짓이냐? 미쳤냐? 뭐 잘못 먹었어?"

찬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홍빈을 쳐다본다.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우리가 사귄 게 몇 년인데..."
"뭐?"
"너야말로 뭐 잘못 먹었냐고? 남자친구한테 그게 할 소리야?"

사귄다고? 남자친구라고? 이게 미쳤나? 홍빈은 화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찬식을 쳐다본다. 그런데, 찬식 옆으로 보이는 게 뭔가가 이상하다. 홍빈은 주위를 둘러본다. 여긴 홍빈의 방이 아니다. 아니, 홍빈의 방이 맞는데,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 옷걸이의 자리도 다르고, 창문에는 처음 보는 블라인드가 쳐 있다. 그리고 정말 엄청 더럽다. 옷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다. 이렇게 더러운 방은 처음 본다.

침대 옆 책상 위 역시 잡동사니가 쌓여 있다. 그 중 대부분이 처음 보는 것들이다. 홍빈은 팔을 뻗어 액자를 집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건데 사진 속에는 홍빈과 찬식이 다정한 포즈로 서서 웃고 있다. 맹세코 이런 사진을 찍은 적도, 이런 액자를 책상에 올려놓은 적도 없다.

"이게 뭐야?"
"뭐?"
"이 사진 뭐냐고?"

아직도 화가 난 표정의 찬식이 이젠 짜증난다는 얼굴이다.

"그거 우리 300일에 찍은 거잖아. 무슨 쌍팔년도같이 액자에 끼워서 책상에 놓겠다고, 네가 인화했잖아. 기억 안 나?"

당연히 기억 안 나지. 그런 적이 없는데. 300일이라니, 무슨 헛소리야, 이게?

액자를 도로 내려놓는데 찬식이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리고, 홍빈의 왼손을 낚아챈다.

"너, 우리 커플링 어쨌어?"

이건 또 무슨 헛소리?

"뭐?"
"커플링 어쨌냐고! 그거 절대로 빼지 않기로 했잖아. 너 뭐야, 진짜?"

찬식의 왼손을 보니 반지가 껴 있다. 어제 만났던 찬식이 반지를 끼고 있었던가? 아니, 홍빈이 그런 걸 눈여겨 볼 만큼의 친한 사이가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러는 찬식이 미쳤거나, 홍빈이 돌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도저히 머리가 안 돌아가서 찬식을 멍하니 올려다보는데, 찬식이 홍빈의 손을 거의 내팽개친다.

"그래, 알겠다. 너 요즘 바쁘다고 연락도 안 되고, 어제도 교수님 도와줘야 한다고 전화도 씹더니, 다른 사람 생긴 거지? 그런 거지, 너?"

얼굴은 화가 났는데 눈물이 조금 고이는 것도 같고, 목소리는 떨린다. 저게 설마 연기일까? 홍빈을 놀리려고 찬식이 이렇게까지 할까? 자는 데 몰래 들어와서 방을 처음 보는 물건들로 채우고, 둘이 사귄다고 헛소리를 하러 이 아침에 찾아올 만큼? 아니, 찬식은 홍빈이 사는 곳도 모른다. 그런 정보를 교환할 만큼 친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더 미치겠다, 지금 이 상황이.

"잠깐, 정말 미안한데, 잠깐만."

홍빈은 침대에서 일어나 제대로 방 안을 둘러본다. 역시,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 아까 찬식이 한 말이 떠올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역시, 밖에도 뭔가 다르다. 건물 옆 나무의 크기가 다르고, 저 멀리 보이는 가게의 간판이 다르다. 뭔가, 다 미묘하게 다르다.

문을 일부러 닫고, 도어락 키패드에 홍빈이 아는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다시 한 번 해봤다. 역시 열리지 않는다. 결국 문을 두드린다.

찬식의 얼굴이 이제는 화남과 어이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뭐하냐, 너?"
"이 문, 비밀번호가 뭐야?"
"너, 이제 내 생일도 까먹은 거야? 너 정말..."
"진짜, 제발, 기억 안 나서 그러니까, 한 번만, 이거 비밀번호 뭔지 알려줘."

찬식은 홍빈을 자세히 쳐다본다. 이제 화가 났다기보단 걱정하는 얼굴이다.

"930814."

문을 닫고 다시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린다. 맹세코 저게 비밀번호가 아니었다.

홍빈은 약간 비틀거리며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찬식이 옆에 와 부축해 준다.

"빈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서 그래?"

단 한 번도 찬식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말투다. 이제,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다. 홍빈은 침대에 돌아와 주저앉았다. 찬식이 옆에 앉아 등을 어루만진다.

혹시, 홍빈이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지난 며칠, 혹은 몇 달, 혹은 몇 년을 기억 못하는 건가? 그래서 이 방도, 찬식도 다르고, 상황이 전혀 달라진 건가?

"오늘 며칠이야?"
"뭐?"
"오늘 며칠이냐고."

찬식이 이제는 홍빈이 조금 무섭다는 듯한 얼굴을 한다.

"4월 15일."

오늘이 맞다. 분명 어제가 4월 14일이었다. 아니, 잠깐만.

"그럼 올해가 무슨 년도야?"
"빈아, 너 왜 그래? 나 이제 무서워지려고 그래."
"제발, 올해가 무슨 년도야?"
"2017년."

올해가 맞다. 결국, 새벽 4시에 자고 지금 몇 시간 후에 깬 거다. 기억상실증이 아니다.

"우리, 언제부터 사귀었어?"
"빈아..."
"진짜, 마지막으로, 이것만 말해줘. 언제부터야?"
"고 2 때."

고 2 때 기억이 아무리 희미해도, 그런 기억은 전혀 없다.

"어... 어떻게 사귀게 됐는데?"
"너 정말 왜 이래... 장난치는 거면 그만해. 나 진짜 무서워."
"정말, 마지막으로 이것만 대답해주면 돼. 정말이야.

찬식이 홍빈을 쳐다본다. 그 눈에 담긴 걱정이, 사랑이, 너무 진심이다.

"비 많이 온 날, 나 우산 없어서 네가 같이 씌워줬잖아. 그러다 우리 둘 다 너무 젖어서 우리 집 가서 내가 너한테 옷 빌려줬고. 그때 네가 우리 둘이 같이 옷 갈아입는데 나 덮쳤잖아. 그래놓고,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기억 안 나?"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비가 많이 온 날, 우산을 받고 가는데 학교 건물 처마 밑에 서 있는 찬식을 보았다. 그때, 우산을 같이 쓰자고 할까, 고민하다 그냥 지나쳤었다. 그럼, 그때 지나치지 않았다면 지금 홍빈은 찬식과 사귀고 있을 거라는 말인가?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생각, 또 생각한다. 이건 꿈인가? 아니면 자다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지금까지의 삶이 꿈이고, 깬 지금이 현실인가? 도대체 뭐지?

홍빈의 두 손을 찬식이 잡아 내린다. 홍빈이 고개를 들자 찬식은 정말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머리 아파? 너, 그래서 기억도 잘 안 나고 그러는 거야? 빈아, 말을 해줘야 알 거 아냐."

홍빈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다. 홍빈의 얼굴이 정말 너무 힘들어 보이는지, 찬식이 끌어당겨 안아준다.

"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내가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다 괜찮을 거야."

정말 그 말투가 너무 다정해서, 그 안아주는 품이 너무 따뜻해서, 그래서 홍빈은 찬식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꽉 안았다. 찬식이 계속 괜찮을 거라며, 등을 쓸어주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주는데, 그게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좀...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어제였다면 절대로 찬식을 보고 느꼈을 리 없는 그런 감정을... 그래서 고개를 들고 찬식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어제 만났던 찬식이라면 도대체 무슨 짓이냐며 주먹을 날렸을 테지만, 지금 옆에 있는 찬식은 입술을 벌려 홍빈을 받아준다. 그래서 홍빈은 확신했다. 이건 아주 괴상하고 황당한, 그런 꿈이라고.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없으니까. 이렇게 찬식과 하는 키스가 기분이 좋을 리 없으니까.

혀로 치열을 훑고 서로의 혀를 감아올리고, 찬식은 너무나 당연한 듯, 너무나 자연스레 홍빈이 하는 모든 걸 받아들여 준다. 홍빈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찬식을 아예 눕혀 놓고 제대로 키스하고 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찬식의 목에 키스마크를 만들고 있다. 손이 찬식의 허리를 쓰다듬다 셔츠 속으로 파고들려 하고 있다. 찬식은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 몸을 살짝 들어 홍빈이 손을 넣기 쉽게 해준다. 한 두 번 해본 게 아니다. 적어도, 이 꿈 속에서는, 둘의 이런 모습이 당연한가 보다. 쇄골뼈를 빨아들이자, 찬식이 신음소리를 낸다.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좋다는 표현을 한다. 그것 역시 너무 자연스럽다. 살짝 벌린 입술이 너무 귀엽고, 섹시하다. 이 꿈은, 너무 위험하다.

홍빈은 힘들게 정신을 차리고, 찬식의 쇄골에서 입술을 떼고, 옷 속에서 손을 빼고 몸을 일으킨다. 찬식은 약간 몽롱한 눈으로 올려다본다.

"왜 그만해?"

아, 더 하고 싶다. 정말로 진짜로 여기서 더 하고 싶다. 꿈이니까, 더 해도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이상 했다가는 정말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아... 오늘은 좀..."

중간에 멈추는 홍빈을 보고 놀라는 찬식을 보니 이 꿈 속의 홍빈은 완전 짐승인가 보다. 그럼 그냥 해버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너무 흐트러져 있어 자꾸 나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찬식의 옷깃을 잘 여며준다. 찬식이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친다. 홍빈은 갑자기 뻘쭘하다. 그래서,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난다. 홍빈이 연 셔츠 단추를 다시 채우며 찬식이 묻는다.

"너 오늘 어디 간다고 했잖아. 머리 아파서 안 간 거야?"
"아... 아마도?"

도대체 어딜 간다고 한 거지? 이따가 알바를 가야 하지만, 그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찬식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러는 넌? 나 어디 간다고 했는데, 왜 여기 왔어?"
"아..."

찬식이 침대에서 일어난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키스마크 때문에 방금 둘이 무슨 일을 했는지 다시 떠올라 홍빈은 서둘러 시선을 위로 올린다. 찬식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다.

"지난번에 너네 집 왔을 때, 완정 엉망이었잖아. 요즘 너무 바빠서 청소할 시간도 없다고. 그래서 너 몰래 방 청소도 해 주고 밀린 빨래도 해 주고, 그러려고..."

저런 말을 저렇게 얼굴 붉히며 하면, 너무 귀엽잖아. 아, 저 입술에 다시 키스하고 싶다. 홍빈은 다시 정신을 다잡는다.

"고... 고마워."
"그럼 너 오늘 어디 안 가도 되는 거야?"

찬식이 갑자기 다가와 홍빈의 목에 팔을 두른다. 아, 이 녀석은 정말, 어떻게 이런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지? 심장이 뛰어 미치겠다.

"그... 이따가 알바."
"뭐? 네가 무슨 알바를 해. 요즘 연구로 바쁘면서."
"연구?"
"너 요즘 교수님 연구 도와드리고 있잖아. 너 또 깜빡한 거야? 왜 그래, 정말?"

이 꿈 속의 홍빈은 범생인가 보다. 찬식이 다시 걱정스런 눈길로 쳐다봐서, 아무리 꿈 속이라도 더 걱정시키는 건 아닌 것 같아서, 홍빈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럼 우리 오늘 어디 놀러가자."

간만에 홍빈이 시간이 났다며 즐거워하는 찬식을 보며, 홍빈은 찬식하면 생각나는 장소를 단번에 말한다.

"그럼, PC방?"
"뭐? 무슨 PC방이야."
"왜, 가서 옵치 하자."
"옵치...가 뭐야?"
"뭐?"
"옵 그거 뭐냐고."

진짜 모르는 눈치다. 에이, 설마.

"오버워치. 우리 맨날 하는 게임이잖아. 몰라?"
"처음 들어보는데?"

이건 꿈이 아니었다. 악몽이었다. 오버워치가 없는 꿈이라니, 악몽이 틀림없다.






이슬실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