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할 일 많다고 투덜거리는 동우가 찬식까지 왔으니 의뢰받은 일에만 집중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진영의 생각과는 다르게, 동우는 늘 그렇듯이 진영과 같이 하루를 보냈다. 오히려, 전처럼 저녁에 어디 가지도 않고, 저녁까지 내내 같이 있어주었다. 같이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게임도 하고, 했다. 바쁘지 않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지금 여장을 하고 있는 동안엔 찬희란 이름을 쓰는 찬식이 할 일만 남았다고 했다. 찬식은 찬식대로 딱히 바쁘진 않은지, 저녁 때는 곧잘 동우 집으로 보고하러 왔다. 그렇게, 셋이 같이 저녁을 먹는 게 일상이 됐다.

어느 날 저녁, 이제 내일이면 다 끝날 것 같다며 찬식이 기쁜 듯이 소식을 전했다. 진영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미소지어 보였다.

"이제 곧 영국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네. 아, 빨리 가고 싶다. 우리 애인이 나 엄청 기다릴 텐데."

가끔 여자 몸을 입고 있다는 걸 까먹고 거실에 대자로 퍼져 있는 찬식에게서 눈을 돌리던 진영이 멈칫했다.

"애인이 있어요?"
"네. 완전 멋있는 사람."
"천사에요?"
"네? 아뇨. 그냥 보통 사람."
"천사가 사람 사귀어도 돼요?"

둘이 거실에서 얘기를 나누는 동안 투덜거리며 키친에서 요리를 하던 동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안 돼. 쟤 저거 알려지면 천벌 받을 거야."
"진짜?"
"응. 타락천사가 되어서 지옥 깊숙한 곳에 떨어질 거야. 다시는 빛을 못 보는 곳에."
"정말이야?"
"아니, 농담이야."

아이씨, 저게 진짜. 진영은 귀찮은 걸 무릅쓰고 키친까지 가 동우에게 주먹을 날렸다.

"내가 네 말은 다 믿는 거 알잖아! 왜 자꾸 그런 농담을 해!"
"아, 아파. 이게 아무리 빌린 몸이라도 치면 아파."
"빌린 몸?"
"응. 이 몸 주인이 죽고 난 후에 내가 빌렸어."
"정말?"
"아니, 농담이야."

이제 화도 안 난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주먹질을 몇 번 더 하고 거실로 돌아갔다. 그런 둘을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던 찬식이 일어나 앉았다.

"가만 보면 둘 다 너무 귀여워요. 진영 씨나, 선배나. 진짜 잘 어울려."
"왜 선배라고 불러요?"

찬식이 한 말을 약간은 붉어진 얼굴로 무시하며 그 대신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한다. 동우는 기분이 내킬 때만 대답해 주지만, 찬식은 늘 친절히 대답해 주니까.

"우린 같은 엘더 밑에서 일하거든요. 선배가 나보다 2년 전에 스카웃 됐고. 그래서 그렇게 불러요. 그리고 선배랑 나랑 둘 다 원래 한국 출신이기도 해서, 그냥 이름 부르면 혼내요."
"한국 출신이요?"
"옛날에 사람이었을 때. 그래서 천사 이름은 따로 있는데, 전 공찬식이란 이름이 편하더라구요."
"그게 사람 때 이름이에요?"
"네. 아, 이건 비밀이에요. 내가 내 기록 몰래 보고 알아낸 거라서. 선배도 원래 이름이 신동우였고."

진영이 동우를 돌아본다.

"동우가 저 몸 이름이 신동우라고 그랬는데."
"아, 우리가 사람 때 이름 알고 있는 거 엘더가 알면 혼나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막 말해도 되요?"
"엘더가 요즘 세계 반대편 쪽에 테러랑 전쟁 때문에 바빠서, 우린 안 보고 있을 거에요."

천사는 뭐든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얘길 들어보면 또 아닌 것 같다.

"원래 한국 사람이었구나."
"네. 나 처음 온 날 봤잖아요. 그 모습이 내 원래 모습이에요. 영국서 쓰고 있는 몸은 튀면 안 되니까 백인처럼 생겼고."
"아... 동우가 그래서 저렇게 생겼구나."
"선배는 원래 저렇게 생겼어요. 선배의 영인체를 형상화한 거니까."
"네?"

역시 찬식은 이래서 좋다. 뭘 못 알아들으면 동우는 그것도 이해 못 하냐며 구박하는데, 찬식은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준다.

"그러니까, 몸은... 뭐, 굳이 말하자면 인형 같은 거에요. 선배나, 영국에 있는 내 몸처럼 오래 쓸 건 보통 인간의 몸처럼 만들어서, 우리가 그걸 옷처럼 입는 거거든요. 지금 이 몸은 며칠만 쓸 거라 내 능력으로 만들었구요. 몸 하나 만드는데 엘더의 능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잠깐 쓰고 버릴 거에 낭비하면 안 되니까."
"그렇구나..."
"선배가 한국 출신이니까,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에게서 의뢰를 많이 받아요. 그래서 선배 원래 모습의 몸을 엘더가 만들어 준 거죠. 뭐, 다른 데 갈 땐 잠시 보관해 놨다가, 다시 꺼내 쓰고, 그러죠."

뭔가 신기한데, 조금은 무서운 얘기다. 동우가 쓰지 않을 때는 저 몸이 어디 창고 같은 데 처박혀 있을 것 같아 무섭다.

"그래서 선배가 저 몸을 능력 개방하면서까지 고친 거에요. 진짜 자기 몸처럼 아끼는 거라."
"능력 개방이요?"
"네. 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내가 그릇 같은 거에 능력을 담아 쓴다고 했잖아요. 가끔 쓸 때는 그릇을 조금씩 열어서 능력을 덜어쓰지만, 그렇게 많은 능력을 한꺼번에 써야 될 땐 아예 개방을 해야 돼요. 그럴 때 본 모습이 보이죠. 왜, 진영씨도 봤다면서요."
"네. 진짜 멋있었는데..."
"천사 모습은 내가 더 멋있는데..."

찬식은 은근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진영은 그래서 맞장구쳐 주었다.

"네, 찬식 씨가 훨씬 더 멋있을 거 같아요."

키친 쪽에서 동우가 쳇, 하며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 기회를 놓칠세라 진영이 말을 이었다.

"애인도 멋있다고 해주죠?"
"하하, 애인은 내가 천사인 걸 몰라요."
"아..."
"그거 말해주려면 비밀유지 계약서 사인하고 해야 되는데, 그렇게 깊은 사이는 아니라서요."

찬식의 말을 들을수록 더 궁금해진다.

"그렇게, 막, 사람을 사귀어도 돼요?"
"난 보답자라, 사랑이 넘치는 천사에요. 어쩔 수 없어요."
"헛소리."

동우가 식탁에 음식이 담긴 그릇을 놓으며 말한다.

"쟤는 그냥 헤픈 거야. 강아지 같은 녀석이라, 조금만 귀여워해 줘도 바로 꼬리치고 좋아하거든."
"그래도 돼? 천사잖아."

셋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천사는 뭐 사랑하면 안 되나?"

찬식의 말에 진영은 조금 벙찐다.

"원래 처음부터 천사로 만들어진 엘더들도 다 사람의 감정을 어느 정도 느껴요. 사랑, 미움, 질투, 그런 거. 그런데 처음엔 사람이었던 우리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겠죠. 그리고 사랑하는 건 나쁜 게 아니니까. 우리가 하는 일도 결국엔 다 사랑해서 하는 일이잖아요. 소식을 전하고, 고마운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도, 결국 사랑 때문에 하는 건데, 그런 일을 하는 천사들에게 사랑을 못 하게 하지 않아요."

신기하다. 그리고... 다행이다.

"그럼 타락천사는 뭐에요? 사랑해서 그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타락천사는 사리사욕을 위해 인간을 해쳐서 타락한 천사에요."
"어? 그런데 동우도 그렇고, 찬식 씨도 그렇고, 인간을 해치고 있잖아요."
"우린 우리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니잖아. 의뢰받아서, 나쁜 사람 벌 주는 거야."
"넌 네가 좋아서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 정말, 정의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니까?"

동우가 대화에 끼어들면 무조건 싸움으로 번진다. 진영은 그래서 동우를 무시하고 찬식에게 집중한다.

"그러니까, 뭐, 이런 거에요. 천사가 인간을 사랑하게 됐다고 쳐요. 그건 괜찮아요. 하지만 그 사랑하는 인간이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천사가 그 인간을 해치거나, 죽이거나 한다면, 그건 타락이에요."
"그럼 정말 지옥 가요?"
"뭐, 경우에 따라 다른데, 엘더가 그랬을 때, 잘못을 뉘우치고 충분히 벌을 받으면, 다시 천사로 일 할 수 있어요. 다만, 예전만큼 높은 직책으로 가기는 어렵겠죠. 우리같이 스카웃 된 천사가 그런 일을 벌이면, 바로 천사 자리에서 쫓겨나고, 지옥으로 가요."

뭔가 복잡하다. 하지만, 동우가 사람을 사랑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날 아침, 주말인 데도 동우가 아침부터 진영을 깨웠다. 진영이 잠결에 짜증부렸다.

"뭐야, 오늘 토요일이잖아."
"그래서, 안 일어날 거야?"
"오늘 점심까지 자려고 했단 말야."
"찬식이 아침 먹고 바로 간다는데, 인사 안 할 거야?"

잠이 확 깬다. 진영은 서둘러 일어났다. 오늘이면 다 끝난다더니, 정말 끝났나 보다.

서둘러 씻고 동우의 집으로 갔다. 동우와 찬식은 이미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아, 한국 음식 그리울 거 같아. 영국 음식 완전 맛없어요."

찬식은 진영을 보자마자 투덜거렸다. 진영은 웃어보이려 했지만, 왠지 얼굴이 굳어 있는 걸 느꼈다. 그래도, 최대한 밝게 행동했다.

"그래서, 진짜 일은 다 끝낸 거에요?"

대답 대신 동우는 진영에게 핸드폰에서 기사를 검색해 보여주었다. 별거 없어 보이는 인터넷 기사였다. 한 촉망 받는 검사의 몰락에 대한 기사였는데, 뇌물 수수로 걸려서 검사장의 딸과 약혼까지 깨지고, 검사직을 내려놓게 됐다는 기사였다.

"오, 정말 얘기한 대로 다 했네?"
"너무 약해."

동우는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왜?"
"아이씨, 사람 둘을, 그것도 지 새끼를 죽인 놈인데, 겨우 이걸로 끝내는 게 말이 되냐고! 원래는 교통사고 내서 식물인간 만들려고 했는데, 의뢰인이 너무 마음이 약해서, 이걸로도 충분하다네. 아, 찝찝해."
"천사가 교통사고 내도 돼?"

바로 어제 들은 얘기 때문에 괜히 무섭다. 사리사욕에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는데, 동우가 뭐라도 할까 봐.

"내가 낼 게 아니라, 내 동기가 맡은 사건하고 엮을려고 그랬지."
"그건 뭔데?"
"중학교 때 친구 왕따 시켜서 자살하게 만든 놈."
"아..."
"그놈이 교통사고 내게 해서, 이 새끼 치게 하고, 얘는 식물인간 되고 걔는 감옥 가고, 딱 시나리오 좋았단 말야. 그 왕따 시킨 놈이 고등학교 때 또 왕따시켰던 애가 어디 감옥에 있는데, 거기서 꽤 힘이 있거든. 그래서 거기로 보내서 나올 때까지 괴롭힘 당하게 하려고 그랬는데. 아... 아쉬워."

정말 아쉬운지 주먹을 꽉 쥔다.

"선배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말 좋아하거든요. 고대로 당하게 하는 거."
"그런데 중학교 때 왕따 당한 걸 이제야 의뢰받았어? 너네 일 많이 밀렸어?"

분이 안 풀리는지 먹던 숟가락을 너무 꽉 쥐어, 결국 휘게 만든 동우는 다른 걸 찾으러 키친으로 갔다. 그 대신 찬식이 대답해 준다.

"아... 그 피해자는 그냥 다 잊고 살고 싶다고 해서, 천국 갔을 때 기억을 아예 지워달라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피해자 엄마가 얼마 전에 죽어서, 그 가해자들 다 응징해 달라고 의뢰했어요. 그래서 지금에서야 하고 있는 거에요."
"하긴... 부모님은 그런 거 못 참겠지..."

뭔가 오묘한 세계다.

"찬식 씨는 소식통인가 봐요. 모르는 게 없어."
"그게 아니라, 진영 씨 올 때까지 아침 내내 저 얘기 들었거든요. 그래서 저 얘기만 알아요. 사실 전 보답자라, 다 좋은 사람들만 만나니까, 이런 얘기가 무지 재밌더라구요. 좀 못됐죠?"

살짝 윙크하며 말하는데, 정말 너무 예쁘다.

"여자 모습 진짜 잘 어울리는데, 아깝겠다."
"뭐, 전 남자일 때도 멋있으니까 괜찮아요."
"입 닫고 먹어라."

식탁에 돌아온 동우의 한마디에 찬식이 입술을 삐쭉한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찬식은 일어섰다.

"그럼, 또 봐요, 진영 씨."
"네가 얘를 왜 또 봐? 빨리 가기나 해."
"왜요, 진영 씨 혼자만 보고 있을려구요?"
"네가 여자 모습이어도 때릴 수 있다, 나."
"쳇."

어떤 일이 벌어질지 왠지 예상이 가서 진영은 미리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니나다를까, 밝은 빛이 나고, 다음 순간 찬식이 사라졌다.

"그렇게 간 거야?"
"응. 입고 있던 몸 없애고, 바로 영국 간 거지. 보답자가 자리 너무 오래 비우면 안 되니까."
"그래?"
"보답자는 보통 한 곳에서 오래 있거든. 나같이 의뢰 받고 이리 저리 다니는 거랑 달라."
"그래서, 이제 너도 영국 갈 거야?"

갑작스런 진영의 질문에 동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너, 영국 가냐고."
"응."
"언제?"
"오늘."
"지금 바로?"
"이 몸 반납하고 바로."

다시 심장이 쿵, 한다.

"몸을 반납해?"
"이건 한국에서 쓰는 거니까. 영국 가서 거기에 맞는 체로 새로 받을 거야."
"그럼... 넌 내가 아는 동우가 아닌 게 되잖아."
"뭐, 그렇지..."
"안 가면 안 돼?"

목소리가 떨린다. 며칠 전 동우가 영국에 갈 거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려 노력했었는데,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눈물이 날 것 같다.

"난 의뢰 받으면 그 일 하러 가야 돼. 이제 여기 일은 끝났어."
"나는?"

동우가 다시 진영을 쳐다본다.

"너 내 수호천사 의뢰받은 거라며. 그것도 끝난 거야?"
"난 복수자야. 원래 누굴 보호하고, 그러는 건 보답자가 하는 일이야. 말했잖아. 원래 이 동네 보답자가 그거까지 해야 되는데, 여기 담당이던 천사가 후임도 없이 은퇴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너까지 떠맡은 거라고. 조만간 후임 정해지면, 그 천사가 네 수호천사까지 해 주겠지."

평소에는 닭살 돋는다며 절대 쓰지 않는 단어까지 쓰며 귀찮다고 하지도 않고 설명해 준다. 그래서, 동우가 정말 떠날 거라는 걸 알았다.

"그게 다야?"
"뭐?"
"너한테 난, 그냥 떠맡은 짐이었던 거야? 그게 다야?"
"진영아..."
"난... 그래도 네가 조금은..."

동우가 굳은 얼굴로 말한다.

"넌 그냥 내가 맡은 일이야. 그냥 잠시 어쩔 수 없이 맡았던 의뢰야."
"의뢰... 그냥 어쩔 수 없이 맡았던 의뢰였구나, 내가."

분명히 알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왜 이렇게 서운하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동우는 울먹이는 진영에 되려 화낸다.

"아이씨, 그래서 이런 거 하기 싫었는데! 난 나쁜 놈들 응징하기도 벅찬데, 이런 식으로 마음 쓰는 거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도 노친네가 부탁해서..."

갑자기 동우가 입을 다문다. 뭔가 말실수를 한 거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 엘더가 부탁했다니."

대답이 없다.

"날 의뢰한 게... 네 엘더야?"

대답이 없지만, 동우의 표정에서 그 답이 나온다. 왜 사람이 아닌 천사가 진영을 돌봐주라고 의뢰를 했을까? 생각하던 진영은 뭔가를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 질문을 한다.

"네 전에 은퇴했다던 천사가... 나야?"

갑자기 이해가 안 됐던 많은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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