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거실을 서성이고 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래서 나한테는 기억 조작이 통하지 않았던 거였어."
"진영아..."
"그래서 찬식 씨가 몸이 없는데도 나한테는 보였던 거고."
"그게..."

진영이 동우 앞에 갑자기 멈춰선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 네가 한 모든 얘기가 누가 봐도 미친놈이 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게 정상이잖아. 몸에서 빛이 나고, 그러는 건 얼마든지 속임수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난 처음부터 내가 미친 건가, 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어. 이제 보니 익숙해서였던 거야. 아무리 기억이 없어져도, 300년을 그 일을 했는데, 그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겠지."
"진영아..."
"내가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해."

동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진영을 올려다보던 동우가 한숨을 쉰다. 포기한 거다.

"예전에 찬식 씨가 한 말, 나에 대해 많이 들었다는 말, 그것도 네 얘기가 아니라, 네 엘더 얘기였던 거지?"
"그래, 맞아."
"내가 천사였어..."

너무 황당하고 웃기는 말이지만, 믿긴다. 그게 더 웃기다. 그리고 슬프다. 동우는 그런 진영을 올려다본다.

"너처럼 복수하는 천사였던 거야?"
"네 성격에 잘도 그랬겠다."
"그럼?"
"보답자."
"아..."

진영이 말없이 동우를 계속 쳐다보자, 동우가 한숨을 쉬고 얘기를 해 준다.

"엘더가 널 엄청 예뻐했다더라. 애가 의욕은 많은데 덜렁거리고, 헐랭해서 뭘 자꾸 실수하고, 또 마음은 넓어서 뭘 자꾸 퍼주려고 하고. 그래서 네가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했을 때 잘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고. 그런데, 부모는 이혼하고 애는 나몰라라하고, 너는 천사 때나 마찬가지로 헐랭하고 덜렁거려서 맨날 다치기나 하고, 그래서 너무 걱정되는데, 갑자기 이 동네 담당이던 천사가 후임도 없이 은퇴해 버리고, 너는 돌봐주는 사람 없이 여기 혼자 남겨져서 뭐 큰일이라도 날까 봐 걱정되고, 그래서 내게 의뢰한 거야."

뭔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천사도 의뢰를 할 수가 있어?"
"아니지. 그래서 나랑 거래를 했어."
"무슨 거래?"
"널 옆에서 돌봐주면 10% 빼주겠다고."

잠깐 멈칫한다. 무슨 말이야, 저게?

"10%?"
"300년의 10%."
"너한테 천사로 일하는 기간을 줄여주겠단 거래를 했단 말야?"
"응."
"그래도 돼?"
"우리 노친네는 천사장들 다음으로 높은 천사야. 아무도 뭐라고 못 해."

졸지에 천사들의 비리에 대해 알아버렸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넌 지금 가겠다는 거잖아. 그럼 거래 위반 아냐?"
"원래 내가 처음에 이 동네에 온 이유, 내가 원래 복수자로 맡은 의뢰 끝날 때까지 널 돌보는 게 거래였어. 이제 그 일은 끝났으니까."

진영이 갑자기 동우 앞으로 와 무릎을 꿇고 동우의 손을 잡았다.

"그냥, 있어주면 안 돼?"
"진영아..."
"그냥, 네가 계속 내 수호천사 해주면 안 돼?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동우가 진영을 잡아 일으켰다.

"원래 누굴 보호하고 하는 건 보답자의 일이야. 난 이 일에 적임자가 아냐. 여기 후임으로 오는 천사가, 나보다 훨씬 더 잘 해줄 거야."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너야. 그래도 안 돼?"
"진영아..."
"평생 나 혼자였어. 평생 외로웠어. 처음으로 누군가가 내 옆에 있어줘서, 너무 기뻤어. 그게 너라서 더 그랬고. 그러니 제발 있어줘."

쪽팔리게 눈물이 나온다. 동우는 그런 진영을 내려다본다.

"난 천사야."
"알아."
"그리고 너에 대해 모든 걸 알아."
"그것도 알아."
"그래서 여기에 있을 수 없어."

눈물이 툭, 툭, 하고 신발 위로 떨어진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네가 행복하려면 사람을 좋아해야 해. 수호천사는 그런 거야. 네 행복이, 네 몸과 마음의 건강이, 제일 중요해. 내가 옆에 있으면 넌 그게 안 돼. 그러니까 난 적임자가 아냐."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주는 동우는 처음인데, 기쁘지 않고 오히려 더 슬프다.

"이미 마음이 가버린 걸 어떡해? 접어지지가 않는데. 네가 좋은데. 같이 있고 싶은데."
"그 마음 받아줄 수 없어."
"동우야, 제발."
"널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이건 아냐. 옳지 않아."

진영은 그 말의 의미를 곱씹는다. 뭔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본다.

"내가 너한테 의뢰하면? 내 곁에 있어달라고 의뢰하면?"
"산 사람한테는 의뢰같은 거 못 받아."
"그럼 내가 죽어버리면?"

동우가 진영의 어깨에 양손을 올린다.

"죽은 사람에겐 수호천사가 필요 없잖아."
"그럼 내가 널 잡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다는 거네."

진영은 동우의 손을 잡아 옆으로 내린다. 몸이 떨린다. 계속 새어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킨다.

"알았어. 그럼, 잘 가. 지금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또 보면 못 할 것 같아서."
"진영아..."

진영은 비틀거리며 현관 쪽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서, 진영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동우야, 300년 채우면, 지상에 다시 태어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천국에 가서 살아. 지금 나처럼 비참하고, 슬프고, 힘들어 질지도 모르니까. 300년을 일해서 받은 상이 이런 삶이라면, 차라리 다시 태어나지 말 걸 그랬어. 이렇게, 평생을 외롭게, 사랑받지 못한 채, 혼자 사는게, 지옥이 아니면 뭐야."

동우는 할 말이 없었다. 진영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진영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기가 싫다. 그래서 도로 누웠다.

그동안 진영이 참아왔던 모든 게, 진영을 짓눌렀던 외로움이, 슬픔이, 아픔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와 덮쳐버린 것 같다. 기억은 안 나지만 300년을 일해서 얻은 두 번째 기회인 건데, 이렇게 외롭고, 슬프고, 아파도 되나, 싶다. 차라리 동우를 만나지 않았다면, 혼자 있는 게 이렇게 힘들고 외롭고 슬픈 거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면, 덜 힘들었을 텐데. 동우에게 저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은 걸 들어서, 죽는 것도 무섭지만, 살고 싶지도 않다. 무기력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낯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동우가 앉아 있었다.

겨우 눈을 뜬 진영은,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며 동우가 진짜 있는지 확인했다.

"잘하는 짓이다. 요즘 세상에 영양실조에 탈수증에 뭐, 빈혈까지? 가지가지 한다."

꿈 속의 동우가 저렇게 얼굴을 보자마자 구박할 것 같지는 않아서 진영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너무 어지러워 바로 다시 누웠다.

"영양제 다 맞을 때까지 그대로 누워 있어. 뭘 잘했다고 일어나."

말로는 구박하면서도 이불을 다시 잘 덮어준다.

"다시 온 거야?"

쉰 목소리로 겨우 물어본다. 동우는 잠시 말이 없다.

"너 멀쩡해지면 그때 얘기하자."

그래도 아니라는 답은 아니어서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동우의 손을 붙잡고 잠들었다.








이틀 뒤, 진영은 퇴원했다. 아직 몸이 약한 진영을 동우가 부축해 차까지 데려왔다. 데자뷰 같이 느껴진다. 그렇게, 별말 없이 집까지 갔다.

집에 도착해, 진영은 찝찝함을 씻어내려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동안 치우지 않아 집이 엉망이다. 동우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소파 한쪽에 앉아 있다. 진영은 동우의 옆으로 가 앉았다.

"넌 애가 집도 안 치워, 몸도 안 챙겨, 뭐하는 녀석이야?"
"구박하지 말고, 어떻게 된 건지 말해줘."
"하..."

한숨부터 쉰다.

"내가 여기 왔어."
"어?"
"지난번에 말했잖아. 이 동네에 후임 천사가 올 거라고. 내가 그걸로 왔어."
"왜?"

동우는 진영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왜일 거 같아?"
"나... 때문이야?"

진영은 조금 망설이며 묻는다.

"너 아니면 내가 왜 적성에 맞지도 않는 보답자로 이직을 하겠냐고."
"이직했어?"
"이 동네에서 한동안 있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날 위해서 좋아하는 일도 포기하고 온 거야?"
"뭐, 어쩔 수 없으니까."

진영은 너무 기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하지만, 뭔가 조금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이제는 내 수호천사는 아닌 거네. 그 의뢰는 끝났으니까."

동우는 수호천사란 말에 소름이 돋는지 팔을 문지른다.

"아냐, 그것도 다시 의뢰 받았어."
"어? 누구한테?"
"누구겠냐. 우리 노친네지."
"아..."

조금 서운하다.

"그럼 너 300년에서 또 얼마나 깎기로 하고 온 거야?"
"그런 거래가 아니라 딴 거였어."
"뭔데?"

동우는 말하기 싫은지 머뭇거린다. 진영이 계속 쳐다보자 결국 얘기한다.

"천사는 한 번 직업이 정해지면 이직을 못 해. 그리고 이 동네 후임은 벌써 다른 천사로 정해져 있었어. 노친네가, 내가 평생 너 수호천사 해주면 이직하는 거랑 이 동네 오는 거 도와주겠다고 해서, 그렇게 했어."
"그럼, 결국 그 거래도 날 위해 한 거잖아."

감동 받았다. 이렇게까지 생각해 줄 줄은 몰랐다.

"그럼, 너 평생 내 수호천사 해 주는 거야?"
"뭐, 그게 거래의 조건이니까."
"내가 여기서 이사가면 어떻게 돼?"
"그럼, 너 이사가는 동네에 자리 알아봐야지. 네가 나한테는 제일 중요하니까."

진영은 너무 기쁜데 눈물이 날 것 같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제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항상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그 말을 평생 듣고 싶어했다는 걸 알았다. 마음이 벅차 말이 나오질 않아, 그냥 동우의 품에 안겼다. 동우가 잠시 망설이더니 마주 안아준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난 계속 네 수호천사 할 거야."
"그럴 일은 없어."
"진영아."
"너 외에 다른 누구를 좋아할 생각이 전혀 없어. 평생 너 하나면 돼."
"평생은 참 긴 시간이야, 진영아."
"이 전에 300년 동안 천사로 일했는데, 사람 수명은 그에 비하면 짧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다. 진영은 동우의 품에서 떨어져, 동우를 올려다본다.

"그런데..."
"응?"
"너 이 몸 인형같은 거라고 했잖아. 그러면 나 나이먹는 동안 너는 그냥 그대로 있어?"
"뭐, 아마도?"
"아, 그건 싫어. 같이 늙어가고 싶어."
"별걸 다..."
"그렇게 안 돼? 평생 내 곁에 있을 거라며..."

동우는 천장을 쳐다본다.

"우리 노친네한테 부탁해 보던가."
"너네 엘더?"
"응. 이 몸도 노친네가 만들었으니까. 널 예뻐하니까 네 부탁이라면 들어주겠지."

말하는 동우를 보는 진영의 눈이 점점 커진다. 진영의 눈앞에서 동우가 순식간에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머리도 샜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냐?"

동우가 진영을 쳐다보다가 본인의 손을 본다. 손 역시 주름져 있다.

"아, 노친네. 뭘 이런 장난을 쳐요."

짜증낸다. 다시 동우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노친네가 너한테 할 수 있다고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

엄청 뻘쭘하지만 동우처럼 천장에 대고 말해본다.

"고마워요."

천장에서 시선을 내리는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우의 눈과 마주친다. 미소지으며 동우의 볼에 쪽, 하고 뽀뽀했다.

"뭐야."
"의뢰비."
"뭐?"
"평생 내 수호천사 해달라는 의뢰비."
"이미 받았다니까."
"이건 내가 주는 거잖아."
"그럼... 너무 싼 거 아냐?"
"일시불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할부로 줄 거라서 말야."
"아, 정말 오글거려서 못 듣겠네."

동우가 갑자기 진영의 고개를 들어올린다. 진영은 기대하며 눈을 감는다.

"노친네."

갑작스럽게 동우에 입에서 나온 말에 놀라 다시 눈을 뜬다. 동우의 눈은 천장을 향하고 있다.

"보고 있는 거 알아요. 좋은 말 할 때 눈 돌려요."

으름장을 놓은 후에야 진영에게 입맞춰 준다. 험한 말을 잘 뱉는 입술이 너무 부드럽다. 아직 말라서 까칠하고 튼 진영의 입술을 촉촉히 적셔준다. 입술을 떼고, 서로를 마주보며 웃어준다. 진영이 다시 동우의 품에 안긴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뭐, 난 보답자 일 하고, 너랑 24시간 붙어 있을 거고."
"정말?"
"응. 넌 혼자 어디 못 내놔. 이번에도 내가 여기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너 까딱했으면 나 저 세상에서 만났을 거야."
"네가 나 병원 데려간 거야?"
"나 말고 누가 있어?"
"그러네. 나한텐 너밖에 없어."

동우가 진영을 좀 더 꼭 안아준다.

"난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절대 외롭게, 슬프게,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 이 곳의 삶이 지옥같다고 느끼지 않게, 내가 항상 옆에 있어 줄게.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게."

늘 혼자였던 진영이, 평생 듣고 싶어했던 말을 동우가 다 해주고 있다. 너무 행복해 눈물이 난다.

"정말, 다 해줄 거야?"
"응."
"그럼... 그날 본 그거 해줄 수 있어?"
"뭐?"
"그거, 날개 펼치고 머리 하얗게 변하고, 하는 거."
"싫어."

너무 단칼에 거절한다.

"뭐야, 다 해준다며."
"왜 그걸 보고 싶어하는데?"
"너 그때 완전 멋있었단 말야. 천사 같고."
"나 천사거든?"
"그냥 한 번 해주지. 그것도 못 해줘?"
"아이씨, 그건 그때 이 몸뚱아리가 죽을 거 같아서 능력을 완전히 개방해서 그렇게 된 거야. 그거 한 번 하면 충전을 얼마나 오래 해야 하는지 알아?"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은데..."

다시 장화신은 고양이 눈을 하고 올려다본다.

"눈 치워라."

역시, 다정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더 좋다. 이게 원래 동우의 모습이니까. 그래도 한 번 삐친 척을 해본다.

"치, 됐어."
"그렇게 보고 싶어?"
"응."

동우는 잠시 고민한다.

"그럼, 하고 바로 충전할 수 있게, 일기예보 봐서, 서울 하늘 맑게 개고 미세먼지 없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이 며칠 계속될 거라고 그러면, 그때 한 번 보여줄게."
"도대체 그게 언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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