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진영과 함께 학교에 나타난 동우를 보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아무도 어디 갔었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냥, 늘 보던 사람처럼 대한다. 새삼 이 기억 조작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안 드는 특이체질이라 다행이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이 바뀔 수 있다니. 진영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동우는 귀찮다고, 바쁘다고 투덜대면서도 매일 아침 일찍부터 집에 와 아침도 챙겨주고, 같이 학교도 가고, 점심도 같이 먹고, 수업도 같이 듣고, 해준다. 그렇게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고, 저녁밥까지 챙겨준 뒤에야 본인 일을 하러 가는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만,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게 몇 주를 지내니 이제 동우가 없었던 날들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학교에서도 왠지 아웃사이더였고, 그래서 친한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부모님도 못 본 지 몇 년이고. 그런 진영에게 이렇게 옆에 누군가 매일 있어주고, 같이 시간 보내주고, 같이 밥 먹어주고, 하는 건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다. 벌써부터 동우가 떠날 날이 두려워지고 있다. 계속 옆에 있어줬으면, 하고 바란다.

드디어 깁스를 풀고 약간 절뚝거리며 걷게 된 어느날, 집에 돌아왔는데 동우의 집 앞에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동우를 보자마자 미소지어 보였다.

"선배, 잘 지냈어요?"
"너 왜 왔냐?"
"선배가 지원요청 했잖아요."
"그런데 왜 네가 왔냐고, 너 영국에 있었잖아."
"그래서 이렇게 왔죠. 에이, 반가우면서 틱틱대기는."

둘이 하는 대화를 들어보니 뭔가 느낌이 온다. 이 사람도 천사인 것 같다.

"혹시 천사예요?"
"응? 나 보여요?"

왜 놀라지? 생각하는데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의 몸의 윤곽이 좀 흐릿해 보인다. 손을 뻗어보니 그 사람 몸을 그냥 지나친다. 약간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날 볼 수 있지? 보통 못 보는데."
"얘가 특이체질이라서 그래."

동우가 서둘러 대답한다. 그 사람, 아니 천사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어, 뭐야, 혹시 그거 때문에..."
"입 닫아라."

동우가 경고하듯 말한다. 동우의 무서운 눈초리에 그 천사는 어깨를 으쓱하고 둘을 번갈아 보던 진영에게 미소지어 보인다.

"난 공찬식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어, 동우한테요?"

동우를 올려다보는데 동우가 찬식을 째려보고 있다. 혹시 둘이 사이가 안 좋나? 궁금해진다.

"우선,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

동우가 본인 집 문을 연다. 진영은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들어갔다.

"야, 넌 너네 집 가."
"왜, 나도 궁금한데."
"아, 우리 일 얘기 할 거야."
"그냥 좀 얘기해 주면 안 돼? 궁금해 죽겠단 말야."
"죽으면 안 되죠."

둘 사이에 갑자기 찬식이 끼어든다. 말 그대로, 둘 사이에 갑자기 찬식의 얼굴이 끼어들었다. 진영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선배가 수호천산데, 죽으면 안 되잖아요."
"아, 쫌! 그 말 좀 하지 말라고!"

동우가 괴로워한다. 찬식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음짓는다.

"어차피 비밀유지 계약서도 사인했잖아요. 내용 좀 알려줘도 괜찮을 거 같은데."
"의뢰인하고..."
"의뢰인하고 하는 계약은 의뢰인이 누군지 발설하지 않겠다는 거지, 내용은 상관없지 않나? 그것도 비밀유지 계약서 사인한 사람한테는? 수호천산데, 그 정도도 못 해주나? 수호천사가..."
"아이씨, 말해주면 될 거 아냐!"

찬식이 동우 몰래 진영을 돌아보며 윙크를 날린다. 동우는 짜증내며 소파에 가 앉았다. 진영은 속으로 웃으며 동우 옆에 앉았다. 찬식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둘과 마주본 채 책상다리를 하고 공중에 떠 있다. 약간 무서운데, 신기한 마음이 더 크다.

어차피 지원하러 온 찬식도 들어야 되는 얘기라, 동우는 사건의 처음부터 들려준다.

"의뢰인이 진짜 억울하게 죽은 여자거든. 고아원 출신에, 평생 착하게만 산 여자야. 게다가, 가진 거 없는데도 남들한테 베풀고 살아서, 천국에서는 거의 빌 게이츠 수준으로 부자야."
"가진 게 없는데 베풀면 더 부자가 돼?"

궁금해진 진영이 끼어들었다. 동우가 짜증내려는데 옆에서 찬식이 친절하게 대답해준다.

"원래 착한 행동은 주관적인 거라, 그 행동에 얼마나 많은 자기 희생이 따르는지 보거든요. 예를 들어, 만 원을 가진 사람이 백 원을 기부하는 거랑, 백 원을 가진 사람이 전 재산을 다 기부하는 거랑, 그 자기 희생의 크기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찬식을 다시 째려보고 동우는 말을 잇는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만난 남자를 10년 동안 뒷바라지해서 검사 만들어 놨더니, 이 새끼가 다른 여자가 생긴 거지. 검사장 딸. 그렇게 둘 사이에 양다리 걸치다가 검사장 딸이 결혼하자고 하니까 의뢰인한테 헤어지자고 한 거야. 이 여잔 또 드럽게 착해서 그러라고 했고.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임신한 거야."
"아, 벌써부터 슬프다."

다시 진영을 무시한다.

"그래서 남자한테 연락한 거지. 의뢰인은 그냥, 그래도 아빠니까, 알고는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연락했는데 이 새끼는 이 여자가 지 발목 잡을까 봐, 여자 집에서 만나자고 하고, 여자를 독살하고 죽은 여자 손목 그어놓고 자살한 것처럼 꾸몄어. 그 독이 몇 시간이면 몸에서 분해 돼 없어지는 거라, 피검사에서 발견되지도 않았고. 경찰은 자살이라고 결론내리고 그 이상 수사하지 않았고."
"불쌍하다."
"이런 얘기, 생각보다 흔해요."

이제 동우는 찬식까지 무시하며 말을 잇는다.

"그래서 의뢰한 거지. 자기 죽인 건 괜찮은데, 아기 죽인 게 용서가 안 된다고. 남자가 책임지기 싫다고 했으면 어디 숨어 살면서 애 낳고 조용히 살았을 건데, 아기가 아빠 손에 죽은 게 너무 불쌍하다고. 하... 아이씨, 재수 없는 새끼."

처음에 얘기해 주기 싫어한 것치곤 흥분해서 말을 이어간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새끼가 범인인 증거를 찾으려고 그 여자 살던 집부터 시작해서 다 뒤졌는데, 아무것도 없어. 게다가, 그 새끼가 누가 그 여자에 대해서 묻고 다닌다고 듣고는 사람 시켜서 나 없애려고 했고."
"그래서 그때 피흘리면서 돌아온 거야?"
"뭐야, 선배 다쳤어요? 뭐예요, 아마추어같이."

이번엔 둘을 째려보며 못 들은 척을 한다.

"그래서 이번엔 남자 쪽을 파 보는데, 뭐 뇌물 받고 진술서 조작하고, 재벌 집 아들 봐주고, 그런 건 있어도 이 살인에 엮을 게 없어. 진짜 생각나는 건 다 해 봤는데, 뭐가 없어. 그 와중에 환자 수발까지 들어서 진전도 느렸고."

그 말에 진영이 조금은 미안해진다.

"어쨌든, 그래서 법의 심판은 물 건너 갔고, 그냥 그 새끼 인생 조져볼려고."
"그런데, 너 의뢰인 일에 엄청 흥분한다."

진영의 말에 찬식이 대신 대답해준다.

"선배가 원래 처음부터 그랬어요. 수습기간 때부터 복수자 하고 싶다고 그랬나봐요. 선배는 다른 사람이 억울한 꼴은 못 보거든요."
"아, 저런 새끼들 잘 사는 건 진짜 절대로 못 참아. 잘근잘근 밟아줄거야."

동우가 이를 으드득 간다.

"뭘 어떻게 하려고?"
"우선은 뭐, 그런 놈은 여자에 약하니까, 미인계를 써서 지금 여자랑 결혼 못 하게 해버리고, 검사장 빽이 없으면 뇌물, 이런 거로 엮였을 때 옷 벗어야 될 거야."
"무슨 막장 드라마 얘기같아."
"원래 사람들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그래서, 미인이 누군데?"
"나요."

진영은 찬식을 쳐다본다.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아무리 봐도 남자다. 찬식은 진영의 생각을 읽었는지 웃는다.

"아, 여자 역을 할 천사가 필요한데, 동우 선배는 죽어도 그걸 못 할 거고, 솔직히 다들 선배랑 일하는 거 싫어해서 내가 의리로 왔어요. 그래서 영국에 내 몸 잠깐 버리고 온 거예요. 여기에서 여자 체를 입고 활동할 거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잠깐만요."

찬식이 책상다리를 풀고 거실에 선다.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더니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너무 눈부셔서 눈을 감았다 떴는데, 웬 여자가 거실에 서 있다.

"어? 뭐...?"
"어때요, 이 정도면 미인이죠?"

목소리까지 여자다. 하지만 얼핏 보니, 아까의 찬식의 얼굴이 남아 있는 것도 같다.

"어, 어떻게 한 거예요?"
"능력 써서 만들었어요."
"너 그렇게 함부로 막 써도 되냐?"
"나 오기 전에 충전했어요. 그리고 며칠이면 끝날 거 같아서... 이거 오래는 유지 못해요."
"도대체 그 충전이란 게 뭔지 좀 말해줘."

저 단어를 몇 번을 들었는데 아직도 뭔지 모르겠다. 동우가 아무 말이 없자 진영은 찬식을 쳐다본다. 그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가 된 찬식은 다시 친절히 설명해준다.

"원래 처음부터 천사였던 천사들은 능력을 갖고 있어요. 뭐, 초능력 같은 거. 하지만 우리같이 사람이 천사가 된 경우에는 그게 없어요. 그런데, 지상에서 일을 하려면 아무래도 능력이 필요하니까. 우리 몸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주변 사람들 기억 조작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체를 만들어내거나, 상처를 치료하거나, 하는 것도 능력으로 하고요. 그래서 필요한 능력을 빌려써요. 굳이 따지자면, 능력을 담은 그릇 같은 걸 빌려서 들고 다니는 거죠. 하지만 엘더들처럼 우리는 직접 몸에서 능력을 만들어 낼 수 없으니까, 그릇에 담긴 능력을 다 쓰면 충전하러 가야 돼요."
"어디에요?"

갑자기 동우가 끼어든다.

"천국에 큰 보스가 사는 산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생명수가 나오는 샘이 있어. 거기까지 가서 그 물을 마시고 오면 돼."
"와, 진짜?"
"아니, 농담이야."
"아이씨!"

또 낚였다. 짜증내는 진영에 찬식이 크게 웃는다.

"둘이 많이 친해졌나 보다. 선배가 친한 사람 아니면 농담 같은 거 안 하는데."
"너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라."

동우가 무게를 잡아보지만, 이번엔 찬식이 무시하며 진영에게 설명해 준다.

"그냥, 햇빛을 받으면 충전이 돼요."
"햇빛요?"
"네. 태양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잖아요. 그걸로 충전해요."

설마 찬식이 거짓말할 리는 없겠지만, 진영은 약간 미심쩍다.

"그런데 동우는 충전하러 어디 가던데요?"
"요즘 서울 공기 나빠서, 미세먼지 때문에 햇빛을 제대로 못 봐서 그래."
"너, 그것도 농담이지?"
"아니, 이건 진짠데?"
"널 믿을 수가 없어."

티격거리는 둘을 보며 찬식은 다시 미소짓는다.

"아무데서나 햇빛 받아도 충전을 할 수 있긴 한데, 제대로 빨리 하려면 좀 더 태양에 가까이 가는 게 좋긴 해요. 공기도 맑은 게 더 좋구요. 제일 좋은 곳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이나, 뭐 그런 데요."
"그런 데 가려면 한참 걸리지 않아요?"
"이 답답아. 이 몸을 끌고 거기까지 가겠냐? 몸은 여기에 두고 영인체만 가는 거지."
"아..."

자꾸 동우가 천사라는 걸 까먹는다. 저렇게 욕하고, 욱하는 천사는 처음이라 그러는 걸 거다. 왠지 찬식은 진짜 천사 같은데, 동우는 어디 동네 건달 같다.

"빨리 다니려면 그게 편해요. 저도 그래서 제 몸 영국에 두고 왔어요. 어차피 한국에서는 이 몸을 쓸 거라."

갑자기 이해가 안 됐던 상황이 이해된다.

"그럼 너 그때 날개 나오고 했던 날, 충전하러 몸 버리고 갔던 거였어? 상처 치료할 때 능력 다 써버려서?"
"응."
"아, 그래서 내가 때리고 해도 안 깼었구나."
"나 때렸냐, 너?"
"아니."

다시 티격거리는 둘을 쳐다보던 찬식은 갑자기 동우 앞으로 와 손을 내민다.

"선배, 나 법카 줘요. 쇼핑 좀 가게."
"갑자기 뭔 뜬금없는 쇼핑이야."
"미인계를 쓰려면 예쁜 옷도 사고 해야죠."
"그냥 네 능력으로 만들어 입어."
"나 오랜만에 여자 하는데 이 김에 명품 옷 좀 입어보고 싶단 말예요."
"그럼 명품 옷 능력으로 만들어 입으면 되겠네."
"아잉, 선배."

찬식이 동우의 팔에 매달려 아양을 떤다. 예쁜 여자의 몸으로 그러니까 더 귀여워 보인다. 하지만 동우는 소름끼쳐 한다.

"이거 치워라."
"쳇, 두고 봐요, 선배. 영국 가서 내가 완전 구박할..."

동우는 찬식의 입을 막으며 서둘러 주머니를 뒤져 법인카드를 꺼내 찬식에게 건넨다. 그러면서 진영의 눈치를 슬쩍 본다. 하지만 진영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찬식이 쇼핑을 하러 나가고, 진영도 피곤하다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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