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남자가 걱정 돼 119를 불렀는데, 그냥 자고 있는 사람 때문에 불렀다고 한소리 들었다. 아까 피가 묻어나왔다고, 분명 어딘가 다쳤다고 주장했지만, 남자의 몸 어디에도 상처가 없다. 그냥, 자고 있을 뿐이다. 옷에 묻은 피는 뭐냐고 따졌더니, 어디서 묻어왔겠지, 라며 119 대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갔다. 진영은 거실 한복판에서 자고 있는 남자가 걱정 돼, 물을 뿌리고 큰 소리로 불러보고 따귀를 때리기까지 했지만,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무거운 남자를 낑낑대며 끌어다 소파에 눕혔다. 이제 가도 되겠지, 했는데 집이 좀 썰렁한 것도 같다. 남의 집에 보일러까지 켜기는 좀 그래서, 이불이라도 찾아다 덮어 줘야지, 생각했다.

주인이 자는 틈에 그러는 게 미안했지만, 이불을 찾으려 침실인 것 같은 방 문을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침실이 아니라, 사무실같이 꾸며져 있었다. 파일 캐비닛 여러 개와 책 등으로 꽉 찬 책장 사이로, 역시 뭔가 잔뜩 쌓여 있는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그리고,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폴더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진영은 자기도 모르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폴더에는 자신의 사진과 간단한 프로필이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저 남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진영과 관련된 폴더를 갖고 있다. 아까 거실에서 본 이상한 현상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는 진짜 무서워졌다.

혹시 남자가 자신이 이 방을 본 걸 알면 해코지라도 할까 봐, 진영은 다 원위치 해 놓고 방문을 닫고 나왔다. 이불을 덮어주려고 생각한 건 까마득하게 잊고,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저 남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것도 무서웠다.








어떻게 해야 되지? 도망가야 되나? 그런데 난 잘못한 게 없는데? 혹시 누가 사주했나? 그런데 날 왜? 난 그냥 평범한 대학생인데...

머릿속에서 수만가지 생각들이 휘몰아쳐 진영은 머리가 다 아파왔다. 지난주부터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의 연속이라, 그러지 않아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는데, 이런 일까지 있으니 진짜 죽을 것 같다. 차라리 아무리 무서워도 옆집 남자에게 따지기라도 하고 싶은데, 매일 칼같이 진영을 따라다니던 남자가 3일째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도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는다. 궁금해하지도 않고, 이상해하지도 않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친한 척하던 사람들이, 동우라는 이름 자체를 꺼내지 않는다. 진영은 이제 진짜로 미쳐버릴 것 같다.

이런 상태로 계속 지내느니, 어떻게든 옆집 남자와 얘기라도 해보자, 싶어서 학교에서 돌아온 진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신의 집이 아닌 남자의 집 문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누르려 하는데, 막상 용기가 안 난다. 그 앞에 서서 몇 분을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진영은 놀라 뒷걸음질쳤다.

"뭐야?"

남자의 퉁명스런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너, 너야말로 뭐야?"
"뭐?"
"그, 하얀 빛하며, 날개하며, 막, 상처가 있다가, 막 없어지고, 막, 그..."
"아..."

지금까지 뚱했던 표정이 아니다. 남자가 당황하고 있다.

"다 봤어?"
"그뿐만이 아니라, 너, 갑자기 없다가 나타났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너 알고 있고, 난 너 처음 봤는데, 동기라고 그러고..."
"아..."

남자는 더 당황한 눈치다.

"그것도 다 눈치챘어?"
"뭐? 어떻게 그걸 몰라?"

남자의 말에 진영이 더 황당하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문을 더 연다.

"들어와."

진영이 머뭇거리자 남자는 뭐, 싫으면 말고, 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게 왠지 얄미워서,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간다. 진영이 신발을 벗는 동안, 남자는 이미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진영은 망설이다 남자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도망칠 수 있게, 문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진영은 용기를 낸다.

"왜 지난 며칠 학교 안 왔어?"
"어디 갔다 왔어."
"어디?"
"충전하러."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잠시 넘어간다.

"그럼 내일부터 올 거야?"
"아니."
"왜?"
"너무 대놓고 따라다녔다고 혼났거든."
"누구한테?"
"내 엘더한테."
"누구?"

남자는 다시 어깨를 으쓱한다. 자꾸 대답을 피하는 것 같아 이제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그럼 네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다 어떻게 널 알아? 너 정체가 뭐야?"
"너도 봤잖아? 뻔한 거 아냐? 바보냐?"

오히려 진영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결국, 발끈했다.

"그래서, 네 정체가 뭔데?"
"봤는데도 모르면 뭐, 어쩔 수 없지."

자꾸 딴소리를 한다.

"그럼 너 왜 나에 대한 폴더도 갖고 있는데?"
"뭐야, 너 내 방 뒤졌냐?"

이 상황에서 네가 화낼 건 아닌 듯 싶다만,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왜 내 사진하고 프로필을 갖고 있는데, 너?"

남자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쉰다. 그러더니 갑자기 딴 얘기를 한다.

"너, 내가 처음 언제 나타났는지 기억하냐?"
"뭐? 지금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해?"
"대답해 봐. 나 언제 처음 봤는지 기억하냐고."
"그때, 횡단보도."

남자는 다시 한숨을 내쉰다.

"그럼, 학교에서 나 봤을 때도 넌 이상하다고 생각했겠네."
"당연한 거 아냐? 처음 보는 애가 동기라니."
"남들은 다 날 알고 있었잖아."
"그게 더 이상했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줄 알았어."
"그러니까, 넌 네가 미쳤다고 생각했다는 거네?"

왜 이런 얘기를 갑자기 하는지 모르겠다. 진영은 짜증이 솟았다.

"아이씨, 몇 번을 물어봐?"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으면, 넌 미칠 거라는 거잖아."

남자는 갑자기 또박또박 말한다. 도대체 왜 저러나, 싶다.

"뭐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라고. 내가 다 설명해주지 않으면 네가 미칠 것 같다고, 네 입으로."

순간 전에 본 영화가 생각났다. 마치 녹음을 하면서 용의자를 추궁하는 것 같다. 누군가 듣고 있단 말인가?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진영은 말한다.

"그래, 네가 다 얘기 안 해주면 내가 미칠 것 같아."
"그럼 네 몸과 마음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거고."

남자가 계속 말하라는 듯 부추긴다.

"그래, 내가 미쳐서 건강도 해치고, 이러다 죽어버릴 것 같다. 됐냐?"

남자는 갑자기 허공에 대고 말한다.

"들었죠, 엘더? 얘가 미치는 거 보기 싫으면, 허락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남자의 앞에 갑자기 뭔가가 빛나기 시작한다. 지난번에 남자의 몸에서 빛이 났던 것처럼 순식간에 거실을 밝게 비춘 그것은, 곧 빛을 잃는다. 남자는 짜증난다는 듯이 나타난 종이 한 장을 허공에서 낚아챈다.

"아이씨, 노친네, 정말. 그렇게 요즘은 디지털 시대라고, 이메일로 보내라고 해도 굳이 종이로... 이러니까 은퇴하라는 소리 듣는 거예요, 엘더."

남자가 종이를 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데,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진다.

"아이씨, 내가 때리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남자는 짜증을 내며 종이를 진영 앞으로 디민다.

"자, 이거 읽어보고 사인해."
"뭐?"

진영은 방금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이해가 안 돼 남자와 종이를 번갈아 본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4D 영화보다 더 리얼한 꿈이다.

"이거 지금부터 네가 듣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 발설하면 당장 끔찍하게 죽는다, 뭐 그런 내용의 비밀유지 계약서니까, 여기 사인하라고."

누가 그런 설명을 듣고 사인을 하겠냐? 따지고 싶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뭔지 알지 않으면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서 진영은 종이를 끌어당긴다. 종이에는 뭔가 영어로 써 있다.

"이거 영어잖아."
"영어가 만국공통어잖아."
"그래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야. 무슨 내용인지 알려줘."
"아이씨, 귀찮게."

남자가 갑자기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타블렛 PC를 꺼내 온다. 타블렛 PC에서 뭔가를 찾아 진영 앞에 내민다.

"이게 그 계약서 한글 버전이야. 노친네가 자꾸 종이로 이렇게 보내니까, 이거 한글로 바꾸려면 능력 써야 되는데 나 충전 제대로 못하고 와서 능력 낭비 못 해. 그러니까 그냥 이걸로 봐."

이 남자가 하는 얘기가 하나도 이해가 안 간다. 진영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타블렛 PC를 받아 열려 있는 파일을 읽는다. 정말 비밀유지 계약서라고 써 있다. 뭔가 잔뜩 작은 글씨로 써 있고, 밑에 사인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진영은 그 작은 글씨를 다 읽는 걸 포기하고 사인을 하려 타블렛 PC에서 펜을 찾았다.

"아니, 그건 사본이라 효력이 없어. 이 종이에 사인해."

진영은 다시 종이로 눈을 돌린다.

"그럼, 뭐 펜이라도 줘."
"아니, 그냥 네 손가락으로 해."
"뭐?"

장난치나 싶어서 얼굴을 보니 진지하다.

"그럼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이렇게 당연한 말까지 시키는 게 짜증난다.

"네 지문이 남잖아. 손가락으로 해."

결국, 진영은 시키는 대로 손가락으로 서명란에 이름을 쓴다. 신기하게도 진영이 쓴 이름이 밝게 빛난다. 이름을 다 쓰자 남자는 바로 종이를 뺏어 둘둘 말아 허공에 던진다. "어?" 하려는 새도 없이 종이가 사라졌다. 진영은 벙쪄 있다.

"걱정 마, 위에 잘 보관 돼 있어."
"위?"

남자는 아예 편하게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럼, 이제 계약서에 사인도 받았겠다. 궁금한 거 다 물어 봐."
"너, 정체가 뭐야?"

남자는 아까와는 다르게 바로 대답해 준다.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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