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방으로 돌아와, 어둠 속에서 홍빈의 얼굴을 계속,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동안 홍빈이가 보여준 모습들을 다시 다 떠올렸다. 항상 날 먼저 배려해주고, 작은 것까지 하나하나 다 챙겨주고, 했던 걸. 자전거를 잘 못 타면서 왜 이런 여행을 왔는지도 알 것 같다. 자전거도 내 거와 같고, 새 거인 걸 보니 내 걸 보고 샀나 보다. 내가 자전거 여행을 간다는 말을 듣고, 명우에게 일정을 알아내 책에서 시킨 대로 버스에 먼저 타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좋은 대학교에 다니는 걸 보면, 홍빈이는 공부를 엄청 잘할 거다. 그러니까, 저 범생이 녀석은, 연애까지도 책으로 배우려 했던 거다. 지금까지 모든 걸 다 책으로 공부했을 테니까. 그걸 깨닫고 보니, 저 녀석이 너무 귀여워 죽을 것 같다.

지금 저 녀석은 저 책의 마지막 장을 보고 낙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 내가 자기를 전혀 좋아하지 않고, 앞으로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저 책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바로, 책 어디에도 고백하라는 말이 없다는 거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좋아하는지 아냐고. 홍빈이나 나 둘 중에, 누군가 용기내서 고백했었다면, 이렇게 계속 엇갈리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내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내가, 홍빈이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아침, 잠이 모자라 무거운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어떻게 고백하지? 하는 생각에 밤새 잠들지 못하다 새벽에나 되서 선잠을 잔 것 같다. 깨어보니 홍빈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마침 들어오던 홍빈과 제대로 부딪쳤다. 나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홍빈에게로 쓰러졌다. 홍빈이 내 팔을 잡아 일으켜줬다. 녀석의 얼굴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무표정으로 변해서 내 팔을 놓는데,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다. 아, 이렇게 보니 저 무표정이 시크한 척하려는 녀석의 노력이었나 보다. 너무 귀엽다.

내 눈을 피하는 녀석에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 갔다 와?"
"아... 아까 너 못 일어나길래. 보니까 열도 있는 것 같고, 해서..."

홍빈의 손을 내려다보니 약봉지가 쥐어져 있다. 이 주변에서 약국을 못 본 거 같은데...

"약 어디에서 사왔어?"
"아, 자전거 타고 좀 나갔다 왔어."

아... 심장이 떨린다. 날 위해 아침 일찍부터 약을 사러 갔다 왔다니. 너무 감동이다. 고마워서 웃어주려는데, 홍빈이가 다시 내 눈을 피하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왜 아까부터 자꾸 내 눈을 피하는 거지?

딱히 열이 나는 건 아니지만, 홍빈이가 사다 준 거라서 약을 먹고, 짐을 챙겨 나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서울이고, 우리 집이다. 그래서 좀 더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아무래도 홍빈이가 나보다 자전거를 못 타니까, 항상 홍빈이가 앞에 갔었다. 오늘도 그러는데, 애가 좀 힘이 없는 것 같다. 어디 아픈가, 걱정하는데, 그 책이 떠올랐다. 아, 정말로 그 맺음말을 믿고 있나 보다. 그러니까 자꾸 내 눈도 피하고, 풀죽은 것 같아 보이는 거다. 으이구, 그런 책을 보지 말고 내 얼굴을 보고 내 표정을 읽지. 그러면 내가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오래전에 알았을 텐데.

우리 둘 다 별다른 말 없이 계속 페달을 밟아, 점심 때가 조금 지난 후 내 서울 집에 도착했다. 홍빈은 역시 내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 다시 올랐다. 아직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전혀 아무런 생각도 없지만, 저렇게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결국 불러세웠다.

"홍빈아."

홍빈이 놀란 듯 돌아보았다.

"우리, 무사히 여행 마친 기념으로,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홍빈이가 오늘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봐주었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때까지도 홍빈이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분명한 대답이 되었다.








막상 홍빈이를 초대하고 보니 눈앞이 깜깜하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고백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결국 저런 쓰레기같은 책을 읽은 홍빈이를 욕할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고백하는 방법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오글거리거나 엄청 돈이 많이 들거나,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밖에 없다. 오글거리는 건 싫고, 방금 마친 여행으로 돈은 다 거덜났고, 사람들 앞에서는 죽어도 못 할 것 같다. 도대체 고백이란 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진짜, 어디 책이라도 사서 공부해야 되는 건가? 홍빈이가 오기로 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으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머리를 싸매고 책상 앞에 앉아 고통스러워 하는데, 명우가 노크를 하고 방문을 열었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는 날에 맞춰 버스를 타고 먼저 올라온 녀석은 그래도 고생했다며 라면을 끓여줬었다. 역시, 착한 녀석이다.

"형, 뭐 해?"
"그냥 있어. 너 어디가?"
"나 오늘 친구 집에 자러 간다고 그랬잖아."
"그랬었나?"
"아까 라면 먹으면서 말했잖아. 걔 새 게임 사서 오늘 그거 밤새서 할 거라고."
"걔네 부모님이 그래도 된대?"
"여행가셨어."
"살판났구나."

아마도 내일도 못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녀석은 방을 나갔다. 다시 랩탑 스크린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으아, 도저히 모르겠다, 이놈의 고백이란 걸 어떻게 해야 되는지. 머리를 또다시 쥐어뜯고 있는데 다시 명우가 노크하며 들어왔다.

"형, 나 버카충 하게 만원만."
"용돈 다 썼어?"

옆에 놓인 지갑을 찾아 돈을 꺼내려는데, 녀석이 어느새 내 등 뒤에까지 와서 내 검색 결과가 보이는 창을 읽고 있다.

"으악, 뭘 보는 거야?"
"형 누구한테 고백할 거야? 그래서 그런 거 검색하는 거야?"
"아, 아니거든?"

녀석은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빨리 방에서 쫓아내려고 서둘러 돈을 건네는데, 녀석이 한마디 한다.

"고백을 꼭 그렇게 거창하게 해야 돼?"
"뭐?"
"고백이란 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잖아. 그냥 얼굴 보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왜 그렇게 복잡해야 돼?"
"그거야..."

어? 명우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그냥 진심을 담아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결국,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건데. 아무래도, 명우의 말이 정답인 것 같다. 갑자기 고마워져 지갑에 있던 돈을 다 꺼내주었다.








멍청이다, 난. 명우가 간 후에야 돈이 진짜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홍빈이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먹을 게 하나도 없다. 2주간 집을 비워서, 냉장고도 텅텅 비었다. 명우 저 녀석이 귀찮다고 엄마가 싸주는 것도 안 들고 왔나보다. 으아... 망했다. 그렇다고 홍빈이가 올 때도 다 됐는데 이제 와서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잖아. 결국 찬장을 뒤져 아까 점심에 먹고 남은 라면 몇 봉지를 꺼냈다. 최악이다.

약속된 시간에 홍빈이가 왔다. 내가 라면을 끓일 준비를 하는 걸 보더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별 말 없이 식탁에 앉아, 내가 라면을 다 끓이길 기다렸다.

우리 둘 다 말없이 식탁에 마주 앉아 라면을 먹었다. 홍빈이는 늘 그렇듯이 무표정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고백은 무슨... 하지만, 그래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지금 안 하면 다시는 못 할 것 같다. 좋아해... 이 쉬운 말이 왜 그렇게 하기 어렵냔 말이다. 난 점점 긴장되어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좋아해란 단어만 계속 떠다녔다. 머리로는 딴 생각 하면서 젓가락질을 계속 하다가, 결국 매운 라면이 잘못 들어갔는지 갑자기 사레가 들렸다. 놀란 홍빈이 켁켁거리는 내 옆자리에 앉아 등을 쳐줬다.

"괜찮아?"
"켁, 큭, 윽. 좋아해."

뭐라고? 지금 내가 뭐라고 한 거지? 아... 죽고 싶다. 머릿속에서 저 단어만 떠올리고 있다가 괜찮아, 대신 좋아해, 라고 잘못 말했다. 라면에 사레들려서 등 쳐주고 있는데 고백이라니. 정말 최악이다.

"뭐?"

홍빈은 벙찐 표정으로 나를 본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사레들려서 눈물이 약간 맺힌 눈으로 홍빈이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너 방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그 와중에 홍빈이는 제대로 들었나 보다. 사레들려 켁켁거리는 와중에도 내가 그렇게 또박또박 말했나 보다. 여기서 아니라고, 잘못 들은 거라고 말하면 홍빈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이런 고백이라니, 로맨틱한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그게..."
"너 나 좋아해?"

숨이 턱 막혔다. 저렇게 돌직구를 날리면, 답을 피할 수가 없잖아. 하지만 입을 열었다간 또 뭔 헛소리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홍빈이 환하게 웃어준다.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거 처음 봤다.

"나도 너 좋아해.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난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처음이 어렵지 한 번 말하니까 술술 나온다. 홍빈이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나도 마찬가지야."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이 다가간다. 그리고, 앞니가 부딪쳤다.

"아야."
"억."

둘 다 입을 부여잡았다. 아... 여러가지로 최악이다. 그래서... 너무 웃기다. 입을 손으로 문지르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우리 둘 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이 너무 웃긴 것도 있지만, 뭔가 그동안 너무 바보 같았던 우리 모습이 웃기기도 하다.

거의 배를 잡고 웃던 우리는 겨우 진정이 되고 난 후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홍빈이 내 얼굴을 잡고 다가와 쪽, 하고 살짝 입맞췄다.

"고마워. 먼저 말해줘서."
"타이밍이 좀 더 나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야. 딱 좋았어."

미소지어 주는 홍빈이 너무 좋다. 그동안 시크한 척하느라 매일 무표정 하는 게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사실... 오늘 네가 저녁 초대해 줬을 때, 마지막 기회 같아서 눈 딱 감고 고백해야지, 생각했거든."

갑작스런 홍빈의 말에 놀랐다. 포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와보니 메뉴가 라면인 거야. 절대로 그런 상황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좀 실망했었어."

아, 아까 그래서 그런 이상한 표정을 지은 거구나... 그래... 라면 먹다 고백하는 건 좀 너무하지...

"그래서 더 고마워. 나 오늘 실망한 채로 돌아가지 않게 해 줘서."

이렇게 말을 잘하는 애가 그동안 무심한 듯 다정한 척하느라고 말도 별로 안 하고 지냈었나 보다. 그놈의 책 쓴 작가, 내 손에 걸리면 진짜 가만 안 둘 거다.

이런 살벌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홍빈의 얼굴이 다가왔다. 이번엔 제대로 된 키스다. 우리의 첫 키스는, 라면 맛이 났다. 그래서,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절대로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을 고백과 첫 키스 같아서, 우리만의 특별한 뭔가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았다. 이제 앞으로도, 책이나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지 않고, 우리만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얼마 후 우연히 홍빈의 가방에서 "그를 만족시키는 방법: 섹스의 관한 모든 것"이란 책을 보고, 역시 범생이 녀석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슬실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