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고속버스 터미널에는 일찍 도착했는데, 딸기 스무디 사먹고 편의점에서 젤리를 잔뜩 사느라 버스 시간을 겨우 맞춰 올라탔다. 내 좌석을 찾아 버스 안을 둘러보는데, 낯익은 얼굴이 저 뒤에서 보인다.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왜, 지금 이 시간에, 이홍빈이 순천 가는 버스를 타고 있는 거지? 도저히 모르겠다.

내 자리로 향하며 계속 홍빈을 주시했지만, 홍빈은 나를 보지 못 했는지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는 체 할까, 하다가 왠지 민망해진 난 그냥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홍빈이 옆좌석이 계속 비어 있으면 같이 앉아 가자고 할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갈까? 한참을 고민했다. 같이 가면 너무 좋겠지만... 몇 시간 동안 홍빈의 옆에 앉아서 내 심장이 남아날까? 싶어 걱정도 됐다. 몇 달 전, 홍빈이를 처음 본 날부터, 난 홍빈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버스는 좌석이 대부분 빈 채 출발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한 한참 후까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고속도로로 들어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홍빈이 쪽으로 움직였다.

"홍빈아."
"어?"

홍빈이 내 목소리에 놀란 듯 날 올려다봤다. 너무 뻘쭘했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말을 꺼냈다.

"와, 이런 데서 보니 반갑다. 너도 순천 가는 거야?"
"아, 뭐. 응."
"같이 앉아도 돼?"

홍빈은 말없이 옆에 놓았던 가방을 발 밑에 두웠다. 나는 홍빈 옆에 앉아 가방을 밑에 두고 앉았다. 잠시의 정적 후, 다시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넌 어쩐 일로 순천 가는 거야?"
"그냥... 여행."
"아..."
"넌? 아, 고향이랬지."
"어, 명우한테 들었어?"
"응."

다시 말이 없어졌다. 버스는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난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홍빈이 내 쪽으로 몸을 틀어 손을 뻗었다. 뭐지? 나도 모르게 얼었다. 하지만 홍빈이는 아무 말 없이 내 좌석의 안전벨트를 찾아 매줬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홍빈이는, 가끔 이런 식으로 사람 심장을 떨리게 하는 뭔가가 있다.

계속되는 침묵이 어색해서 뭐라도 할 말을 찾아 머릿속을 헤집는데 불쑥 눈앞에 이어폰 하나가 보였다.

"들을래?"

난 잠시 이어폰을 내밀고 있는 홍빈의 손을 쳐다보다 이어폰을 받아들고 귀에 꼈다. 아까부터 붉어진 얼굴이 이제 터질 듯이 뜨겁다. 심장이 너무 떨려 헛소리를 지껄일까 봐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옆에서 홍빈도 의자에 몸을 더 깊숙이 앉는 게 느껴졌다. 잠시 뒤, 한쪽 눈을 슬쩍 떠 홍빈을 쳐다보았다. 잠이 든 듯 했다. 그래도 혹시 눈치챌까 봐, 홍빈의 얼굴을 몰래몰래 훔쳐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은 처음이라, 최대한 오랫동안 눈에 담아두려고,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그게 게임 때문인 줄 알았다. 여자애들보단 게임하는 게 더 재밌어서, 거의 매일을 PC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내가 남들과 다른 걸 알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반에 오신 남자 교생 선생님을 보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웃어줬을 땐 숨이 가빠왔다. 그 사람이 내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난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거나,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순천에, 그리고 내가 사는 동네에 소문이 날까 봐 무서웠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고백을 할 용기도 솔직히 없었다. 그래서, 늘 짝사랑만 했다. 교생 선생님에 이어, 그 다음에는 옆집 형, 그 다음엔 같은 반 친구... 아무리 좋아해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이 작은 동네에서 탈출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공부머리가 전혀 없는 나지만 죽어라 공부했다. 그 덕분에,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서울의 한 대학교에 붙었다. 엄마랑 할머니가 내 합격 소식에 울었을 정도로 거의 기적이었다.

그렇게 서울로 오게 됐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성격이 변하는 건 아니라, 여전히 난 혼자였다. 누구를 좋아해도, 그걸 소리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22살인 지금까지도 모태솔로이다. 그리고, 늘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다. 지금 현재, 그 누군가는 이 홍빈이다.

홍빈은 내 남동생의 과외선생이다. 엄마 아빠가 큰 맘 먹고 동생을 고등학교부터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나와는 달리 얘는 공부를 곧잘 하니까, 좋은 고등학교 보내고 과외까지 시켜서 어떻게든 좋은 대학을 보내려는 생각에서였다. 졸지에 동생과 같이 살게 되고, 동생의 공부까지 책임지게 된 난, 동네에 붙은 전단지에서 유명한 대학교의 이름만 보고 연락을 했는데, 그날 온 게 홍빈이었다. 그리고... 첫눈에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 버스가 갑자기 덜컹거려서 선잠에서 깼는데, 나도 모르게 홍빈의 어깨에 기대 자고 있었다. 다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유명한 대사처럼,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머리 위에서 홍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거의 다 왔어."

너무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숨이 멈추는 듯 했지만, 겉으로는 잠에서 깨는 척 연기를 하며 눈을 떴다. 아까 나누어 낀 이어폰에서는 아직도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속으로 아쉬워하며 이어폰을 빼 돌려줬다. 홍빈은 별다른 말 없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발 밑에서 가방을 꺼냈다.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하고, 홍빈에게 잘 가란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려 짐칸 옆에서 운전기사 아저씨를 기다리는데, 홍빈이 내 옆에 같이 서 있었다. 뭐지? 같이 기다려주는 건가? 생각하는데 아저씨가 와서 짐칸을 열고 내 자전거를 꺼냈다. 받으려는 내 손 옆에서 불쑥 홍빈의 손이 보인다. 아저씨는 잠깐 혼란스러워 하더니 짐칸 안을 확인했다.

"아, 같은 자전거가 두 개 있네."

응? 무슨 얘기지? 싶어 안을 살펴보는데 아저씨가 다른 자전거를 꺼냈다. 진짜 두 개가 똑같다. 하나는 새거고, 하나는 오래된 거다. 긁힌 상처로 보아 오래된 쪽이 내 자전거였다.

"뭐야, 너도 자전거 여행 온 거야?"
"응."

난 이 겹치는 우연이 놀라운데 홍빈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홍빈은 원래 좀 시크한 성격인 것 같았다.

"그럼 너 지금 어디 갈 거야?"
"어디 숙소 찾아서..."
"그럼 우리 집에 갈래?"

나도 어디서 저런 말을 할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냥, 나와 같은 생각을 해 같은 곳에 온,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평소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을 꺼낸 거였다. 내 말에 놀란 홍빈의 표정을 보고, 이미 마음 속에서는 반쯤 거절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돼?"

그래서, 홍빈의 저 대답에, 정작 초대한 내가 더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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