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마지막 밤, 그동안 아껴쓴 보람이 있는지 돈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오늘은 좀 사치 부리기로 했다. 좀 허름한 모텔이었지만, 그래도 침대가 있는 방이었다. 물론, 남자 둘이서, 그것도 더블베드가 있는 방을 빌리는 게 무지 창피하긴 했지만, 방이 그것밖에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늘 그렇듯이 홍빈이가 양보해 줘서 내가 먼저 씻고 나왔다. 홍빈이가 바로 씻으러 들어가고, 난 아무 생각 없이 과자를 한 봉지 꺼내 먹기 시작했다. 이런, 한 입 먹고 나서야 이를 닦고 나온 걸 기억해냈다. 이왕 버린 몸, 마저 다 먹었다. 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려는데, 빈 쓰레기통에 웬 책이 하나 들어 있다. 우리 들어오기 전에 청소했을 테니까 이건 홍빈이가 버린 걸 텐데, 왜 책을 버렸지? 궁금해서 결국 꺼내보았다. 앞에 "남자를 위한 연애지침서: 연애바보 탈출!"이란 완전 오그라드는 제목이 써 있다. 홍빈이가 이런 책도 읽나, 궁금해져서 책을 펼쳐보았다. 첫 페이지의 머리말은 간단명료했다.


머리말
당신,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는 모태솔로인가? 아니면, 짝사랑만 주야장천하는 짝사랑 전문가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바보 멍청이다.


우씨, 짜증이 났다. 그래, 나 모쏠에 짝사랑만 한다. 그래서 뭐, 보태준 거 있냐? 듣지도 못하는 작가에게 욕을 하며 그래도 궁금해서 계속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이 책을 펼쳐든 이 순간, 당신은 당신 인생에서 처음으로 옳은 일을 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 순간부터, 당신은 연애바보 탈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다다르면, 당신은 연애고수가 되어, 당신이 꿈에 그리는 여자와 이미 연애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멀지 않은 그 미래를 상상하며, 1장으로 넘어가자.


기분은 나쁘지만 그래도 재밌는 책일 것 같아서 다음 페이지로 넘겨 목차를 읽어보았다. 이런 책은 처음 봐서 신기했다.


제 1장: 첫인상이 반이다
제 2장: 정보 수집을 시작하라
...
제 6장: 우연적인 만남 = 운명적인 만남
제 7장: 취미를 공유하라
...
제 10장: 친구가 되어라
제 11장: 같이 여행을 떠나라
제 12장: 드디어...


아... 이런 내가 싫지만, 진짜 내용이 너무 궁금하다. 결국 다음 장으로 넘기려는 순간, 샤워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깨달았다. 홍빈이 버린 책을 몰래 읽고 있었던 걸 들킬까 봐, 서둘러 내 가방에 넣어놓고 침대에 누워 잠든 척을 했다. 곧 홍빈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테이블 위 스탠드를 켜고 방 불을 끈 홍빈이 옆에 눕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등을 돌려 눕고, 홍빈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몇 번이나 홍빈이 자는지 확인한 후, 조용히 일어나 가방에서 책을 꺼내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커버를 닫고 그 위에 앉아 읽기 시작하는데, 첫 장부터 흥미롭다.


제 1장: 첫인상이 반이다
...
남자는 무조건 시크함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뚱하게 있으란 말이 아니다. 가끔, 그녀가 생각 못 했을 때, 툭툭 내뱉는 다정한 말로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하라. 그녀가 "이 남자 나한테 관심 있나?"하고 궁금하게 만들어야 한다. 무심한 듯 챙겨주는 작은 배려가, 그녀의 마음 속에서 큰 파장을 일으킨다.



왠지 첫 장부터 사기꾼 냄새가 나지만... 그래도 궁금해 몇 장 더 넘겼다.


제 2장: 정보 수집을 시작하라
...
그녀의 주변인물을 공략하라. 그녀의 부모, 형제, 친구, 동료, 누구든 상관없다. 아군을 만들어, 그녀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나중에 반드시 쓸 일이 있을 테니까. 그녀의 기본 프로필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까지 다 알고 있어야 한다.


주변인물을 공략하라... 내가 홍빈이 주변인물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렵겠네. 나도 모르게 이딴 책을 읽으며 홍빈을 대입해 보고 있다. 중증이다, 정말.


제 6장: 우연적인 만남 = 운명적인 만남
...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렇다고 우연을 가장해 시도 때도 없이 그녀와 마주치라는 건 아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곳, 특히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낯익은 얼굴은 그만큼 더 반가운 법이다. 여행을 떠나는데 같은 기차칸에 타고 있다거나, 우연히 목적지가 같다면, 그녀는 당신을 운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잠깐... 이거, 뭔가 이상한데?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


제 7장: 취미를 공유하라
...
취미란 건 원래 하면서 즐거운 법이다. 그 즐거운 일을 당신과 같이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녀는 그 일에 대한 호감을 당신에 대한 호감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녀의 취미를 정보 수집을 통해 알아내, 우연을 가장해 같이 해 보자.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다 마주치거나, 책가게에서 우연히 같은 책을 집어든 당신을 본 그녀의 마음 속에, 당신의 호감도는 이미 수직 상승세일 것이다.



왜 이렇게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지? 그리고... 자전거?


제 10장: 친구가 되어라
...
그녀와 친해져서 손해볼 건 없다. 오히려, 그녀가 친구라고 생각하면 경계심을 풀고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편해져서도 안 된다. 정닥히 거리감을 유지하되,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친구가 되야 한다.


뭘 어떻게 하라는 얘기야, 이건?


제 11장: 같이 여행을 떠나라
...
여행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남녀에 관한 영화를 한 번쯤은 봤을 거다. 그런 영화가 괜히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낯선 공간,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때, 당신과 그녀가 둘만의 세상에 빠지는 건 시간 문제다. 여럿이 가는 여행이라도, 그녀 옆에 앉아 최대한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라. 그녀가 혼자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는가? 그녀가 탄 버스에 당신이 미리 앉아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도 그녀가 당신을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에이 설마... 뭔가 오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지만... 설마...


제 12장: 드디어...
...
지금까지 이 책에서 말한 대로 다 따라했다면, 당신은 이미 그녀와 연애를 하고 있을 것이다. 축하한다. 앞으로는...



더 이상 읽지 않고 책을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책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 이건 마치 지난 2주간의 홍빈과 나의 여행 후기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홍빈이를 생각해 보면, 이 책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따라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는 건... 홍빈이가 나를? 에이, 말도 안 돼.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곤히 잠든 홍빈이 깨지 않게 몰래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들고 다시 화장실로 갔다. 전화벨이 한참 울린 후에야 명우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받았다.

"아이씨, 지금 몇 시야, 형."
"야, 아무리 그래도 형한테 욕을."
"끊는다."
"미안. 잠깐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지금 이 시간에?"

아직도 잠결에 짜증내는 명우에게 미안하지만, 형은 지금 너무 많은 일이 걸렸단다. 미안, 동생아.

"나 자전거 여행가는 거, 홍빈이한테 네가 얘기했어?"
"으으응?"
"아, 좀 정신차리고 대답해 봐. 네가 얘기했냐고."
"하... 그랬나?"
"야, 좀 기억해내 봐."
"그게... 아, 선생님이 자전거 보고 내 거냐고 물어보길래 형 거라고, 여름엔 자전거 타고 여행도 할 거라고 그랬던 거 같은데?"
"그게 다야?"
"또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데?"

이것까지 물어볼지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이왕 확인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하고 싶다.

"뭐, 내 일정이나 그런 건 안 물어봤어?"
"으으... 아, 물어봤어. 선생님도 여름방학 때 자전거 여행 하고 싶어서 궁금하다고 그래서 다 가르쳐줬는데? 뭐야, 지금 선생님이랑 같이 다니는 거 아니었어?"
"아냐, 같이 다니고 있는 거 맞아."
"그럼 왜 그런 걸 물어보는데?"

또 짜증낸다. 미안해서 끊으려는데, 아까 읽은 글귀가 갑자기 떠올랐다.

"혹시..."
"아, 또 뭐?"
"홍빈이가 내가 뭐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런 것도 물어봤어?"
"어떤 거?"
"아무거나."
"얘기했었나?"

그래도 애가 착해서 피곤하고 졸린 데도 생각해내려 애쓴다.

"아, 왜, 선생님이 선물 받았다고 과잔가 뭐 가져왔을 때, 형은 뭐 좋아하냐고 물었던 것 같기도... 그래서 형은 젤리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얘기했어."

으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정작 현실이 되어가니까 현실성이 없다.

"알았어. 고마워, 명우야. 그럼 자."
"아이씨, 그딴 거 물어보려고 한밤중에 전화한 거야?"

짜증난 명우의 목소리가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이고 앉아 있었다. 혹시 내가 너무 홍빈이를 좋아해서 이런 해괴한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책을 덮고 화장실에서 나오려는데 책의 마지막 장이 너무 꾸겨져서 제대로 닫히지를 않는다. 뭔지 궁금해서 뒷커버를 열고 마지막 장을 최대한 편 뒤 읽어보았다.


맺음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녀가 당신에게 넘어오지 않았다면, 그녀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다. 그리고, 절대로 좋아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포기하고 다른 사람 찾아봐라.


이게 무슨 헛소리야? 뭐 이딴 쓰레기 같은 책이 다 있어? 홍빈이가 왜 마지막 장을 구겼는지, 왜 책을 버렸는지, 단번에 알게 해주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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