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른하다. 목에 느껴지는 숨결이 간지럽다. 몸을 감싸고 있는 팔이 따뜻하다. 등 뒤의 가슴의 심장이 뛰는 게 등으로 느껴진다. 목덜미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다.

진영은 일부러 눈을 뜨지 않고 이 순간을 즐긴다. 이 따뜻함을, 이 부드러움을, 온전히 느낀다. 이 사랑받는 느낌을.

"진영아, 일어나."

귓가에 속삭이는 동우의 목소리가 약간 허스키하다.

"5분만 더 잘래."
"너 강의 있잖아. 그만 일어나."

하지만 일어나라고 보채는 말과는 다르게 동우의 팔은 진영을 더 꽉 안아온다.

"오늘 강의 쨀래. 너 오늘 공강이잖아. 너랑 하루종일 같이 있을래."
"너 이번 학기 들어서 매번 그러는 거 알아? 그러다 F 뜨면 어떡하려고."
"상관없어. 너랑 같이 있는 게 더 중요해."

동우의 팔 안에 갇힌 채 진영은 동우 쪽으로 몸을 돌린다. 동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키스해 온다. 익숙한 입술의 감촉, 익숙한 혀의 달콤함, 익숙한 손길의 느낌. 어느 것 하나 새로울 게 없는데도 늘 떨린다. 입술을 떼는 게 아쉽다.

"동우야, 우리 오늘 꽃구경 가자. 벚꽃 지기 전에."
"그래서, 강의는 진짜 안 갈 거야?"
"꽃구경 가자, 응? 올해 꽃 피고 아직 제대로 구경도 못 했단 말야."
"그럼... 강의도 안 가겠다, 아침 댓바람부터 꽃구경 갈 건 아니니까. 시간이 남네."
"뭐야, 어젯밤에 늦게까지 안 재워놓고, 아침부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너 벌써 반응하고 있잖아."
"야, 그런 말 부끄러워."

몸을 섞은 지 몇 해인데 아직도 부끄러운지 붉어진 얼굴을 동우의 넓은 가슴에 숨긴다. 동우는 진영의 고개를 들어올려 다시 키스한다. 몸을 쓰다듬는 손이 점점 더 뜨거워진다. 숨결이 가빠온다. 익숙한, 하지만 그래서 더 행복한, 그런 아침이다.








거리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평일인데도 거리는 데이트하는 커플들로 북적인다. 간간히 보이는 간식차에서 맛있는 냄새가 흘러온다. 고개를 들어보면, 파란 하늘이 분홍색 꽃들 사이로 보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버스에서 내린 둘은 내리자마자 풍기는 꽃내음을 가슴 깊이 들이쉰다. 진영이 동우의 손을 잡아 깍지를 낀다.

"야, 사람들이 보잖아."
"보면 어때. 난 내 남자친구랑 여기 손잡고 걸으려고 온 거야. 왜, 넌 싫어?"
"나야 뭐, 여기서 더한 것도 할 수 있는데."
"으이구, 이 짐승."

말은 그렇게 해도 싫지 않은 눈치다. 아침 내내 놔주지 않아 결국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방을 나섰는데, 그런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저런 소리야, 생각하지만 진영의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눈에 한가득 벚꽃을 담고, 거리를 걷는다. 깍지 낀 손을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지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다시는 안 볼 낯선 사람들 때문에 애인과의 달콤한 데이트를 방해 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다른 연인들처럼 핸드폰으로 다정하게 사진도 찍고, 주전부리도 사서 서로 먹여주며, 햇살이 가득한 봄날의 오후를 보낸다. 너무 많이 걸어서, 나중에는 다리가 다 아프다. 결국, 한쪽 벤치에 앉아서 쉰다.

"다리 많이 아파?"

동우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어본다. 진영은 웃어보인다.

"왼쪽 다리가 좀 저리네. 오후 내내 걸어다녔잖아."
"이리 줘봐."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길 한복판에 자리한 벤치에서 다리를 주물러 준다. 그런 애인이 멋지고, 고맙고, 사랑스럽다.

"이제 좀 나아?"
"응. 그런데 동우야."
"어?"
"배고파."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아니, 맛있는 거 해줘."
"뭐 먹고 싶은데?"
"네가 해주는 거 아무거나."

동우가 보여주는 미소가 봄햇살보다 더 따뜻하다.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 온다. 동우가 잘하는 부추 차돌박이를 하기 위한 재료다. 아직도 다리가 좀 저린 진영은 식탁 의자에 앉아 요리하는 동우를 바라본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앞치마를 한 모습도 너무 멋지다. 칼질하는 손길이 투박한 손과 달리 섬세하다. 이렇게 평생 보고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다.

요리가 완성되고, 둘은 작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조금 늦은 저녁식사를 한다. 동우가 지금까지 한 어떤 요리보다 맛있다. 고기가 입에서 녹는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눈앞에서 웃어주는 얼굴 때문에, 입을 벌리면 웬 어리광이냐면서도 먹여주는 손 때문에, 요리에서 다정한 맛이 난다. 그게 뭐냐고 물으면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맛이다.

요리를 한 동우를 위해 설거지는 진영이 한다. 아까부터 왼쪽 다리가 계속 아프지만, 동우가 걱정할까 봐 내색을 안 한다. 설거지를 마치고 찬물에 약간 빨개진 손을 동우가 자기 손으로 따뜻하게 데워준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맞춰 준다.

"잠깐만, 샤워 먼저 하자."

몸에 밴 꽃향기를 씻어내기 아깝지만, 꽃내음 만큼이나 묻어온 거리의 먼지를 물로 떨쳐보낸다. 정작 몇 분 안 걸릴 샤워를 키스하느라, 애무하느라 화장실 안은 이미 김이 안개처럼 가득 메우고 있다. 서로의 머리를 감겨준다. 진영이 편하도록 동우가 무릎을 굽혀 높이를 맞춰 준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샴푸 거품과 함께 손가락에 감겨오는 느낌이 좋다. 머리를 감겨 주며 거품이 눈에 들어갈까 봐 눈을 감고 있는 동우의 얼굴에 수없이 버드키스를 해 준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땐, 따뜻한 물을 너무 오래 맞아 둘 다 벌겋게 익어 있다. 그런 서로의 모습에 웃음이 난다.

타월로 몸을 말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을 끌어당겨 안는다.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몸을 맞대고, 입술을 맞댄다. 동우의 모든 게 진영을 가득 채워간다. 그 따뜻함에 몸을 맡기며, 절정을 맞이한다.

숨을 몰아쉬며 둘은 나란히 눕는다. 동우가 진영의 손을 잡아끌어 살짝, 살짝 입맞춰 준다. 그 간질거리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진영은 동우에게 몸을 기대고, 아침에 깰 때처럼 등을 통해 동우의 심장박동을 느낀다.

"우리, 내일도 땡땡이 치고 놀러가자."
"안 돼. 내일 강의는 절대 빠질 수 없어."
"그래도... 내일도 오늘같이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싶어."
"한 번이라도 빠지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행복한데, 이렇게 가슴 속 깊숙이까지 행복함으로 가득 차 있는데, 뭔가가 불안하다. 그 불안함의 원인을 모르겠다.

"그냥 내일 가지 말자, 응?"
"우리 진영이, 봄바람만 불면 이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어해서 어떡해."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너와 하루종일 함께 있고 싶은 거야."
"그 수업 너도 같이 듣잖아."
"그런 말이 아니라, 오늘같이, 딱 오늘 같은 하루를 더 보내고 싶어."
"진영아..."
"동우야, 제발, 응? 우리 내일은 가지 말자..."
"으이구... 우리 진영이..."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진다. 동우의 심장박동이 점점 멀게 느껴진다. 물에 빠져 점점 가라앉고 있는 것 같이, 몸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귓가의 동우의 목소리가, 이제 들리지 않는다.








"'A Perfect Day' 프로그램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체험판의 유효 기간이 끝났습니다. 정식 버전의 구매를 원하시는 경우, '구매'버튼을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A Perfect Day'를 통해 당신의 완벽한 하루를 직접 디자인 하거나, 기억 속의 완벽한 하루를 재현해 보세요. 정식 버전을 구매하시면, 완벽한 하루를 언제, 어디서나 체험해 보실 수 있습니다. 구매는 카드와..."

진영은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에 썼던 VR 헤드셋을 벗는다. 기계음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긴다. 이 프로그램의 정식 버전을 사려면, 진영이 지금 받는 월급을 몇 년을 모아도 부족하다. 이 헤드셋을 사는 데만 지금까지 저축해 놓았던 돈을 다 써버렸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이걸 사야 한다.

진영은 침대, 의자, 책상 등에 의지해가며 천천히 거울 앞에까지 간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훑어본다. 볼품 없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얼굴, 왜소한 체격, 의족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동우를 잃은 사고로 자신도 왼쪽다리를 잃었다. 사고 후 몇 주만에 깨어나, 지금까지 죽지 못해 살아왔다. 지금 일하는 회사에도 장애인우대로 겨우 취직했다. 지금 월급으로는 동우와 같이 살았던 이 방의 월세도, 생활비도 빠듯하다. 바로 눈앞에, 손만 뻗으면 동우를 매일매일, 영원히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가진 게 없어서 만나지 못한다니... 비참하다.

거울 앞에서 의족을 끼우려던 진영은 다시 몸을 일으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관찰한다. 가진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다리 하나가 없을 뿐이지, 그 외엔 다 멀쩡하니까. 어차피 프로그램 안에 들어가면 온전한 몸으로, 27살인 지금이 아닌 20살의 자신과 동우로 영원히 살 수 있는데, 이깟 몸이 무슨 필요 있으랴. 진영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네. 네. 네, 장기를 팔고 싶습니다. 신장도 되고, 골수 이식, 간도 상관 없어요. 각막도 한 쪽 정도는 됩니다. 팔 수 있는 건 다 팔고 싶습니다. 네. 빨리 알아봐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진영의 얼굴에 오랜만에 행복함이 묻어난다. 마치 방금 건 전화가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의 문을 열어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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