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빈은 팔이 저린 느낌에 잠에서 깬다. 왜 그러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졸린 눈을 억지로 떠 보는데, 팔에 머리통 하나가 얹혀 있다.

"아이씨, 이게 뭐야!"

깜짝 놀란 홍빈이 팔을 빼며 옆에 누워 있던 찬식을 밀어버린다. 곤히 자던 찬식은 침대에서 떨어진 탓에 깬다. 아픈 팔을 비비며 일어선 찬식이 침대에 일어나 앉아있는 홍빈을 노려본다. 홍빈 역시 저린 팔을 주무르며 찬식을 노려본다.

"으, 아파. 아이씨, 왜 밀고 난리야?"
"그러는 너야말로 왜 침대에 기어올라 왔냐?"
"내가 어제 말했잖아, 바닥에서 못 잔다고!"
"가위바위보에서 졌잖아! 아이씨, 이제 이 팔 못 쓰는 거 아냐?"
"엄살은. 나야말로 너 때문에 팔에 멍 들게 생겼거든?"

아침부터 으르렁거리던 둘은 결국 배가 고파 잠시 휴전을 하고 식사 준비를 한다.

전날의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본연습은 생각보다 잘 되어 둘 다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었다. 하지만, 역시나 허접한 저녁밥을 먹고, 대본연습을 좀 더 하고, 하다 보니 잠잘 시간이 되었고, 다시 문제가 생겼다. 침대가 둘이 자기엔 너무 좁다. 소파나, 다른 잘만한 데가 없다. 결국, 둘 중 하나는 바닥에서 자야 되는 상황이다. 한참을 이 문제로 다투던 둘은, 결국 가장 공평한 방법인 가위바위보로 정했다. 그리고, 찬식이 졌다.

홍빈은 이긴 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침대를 차지했고, 찬식은 딱딱한 바닥에 요가 없어 이불 하나를 깔고 자켓을 덮은 채 잠을 청해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홍빈이 잠든 걸 확인하고 침대에 올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홍빈을 침대에서 밀어내고 혼자 차지하고 싶지만, 신성한 가위바위보의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저 녀석과 이렇게 딱 붙어 자는 건 너무 싫지만, 아예 잠을 못 자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그리고, 너무 몸도 마음도 피곤했던 탓에, 금방 잠이 들었었다.

이제는 익숙해지고 있는 햇반과 3분 짜장을 데워 먹고, 둘은 각자 씻고 나와 다시 대본연습에 돌입했다. 이 방에는 정말 시간 때울 게 아무것도 없어서, 대본연습 외에는 할 게 없다. 그렇다고 둘이 다정하게 수다를 떨 사이도 아니니,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려면 연습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도, 어제 조금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한 보람이 있는지, 그럭저럭 진전이 있다. 대본 외우고, 맞춰보고, 하면서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다시 침대를 차지하기 위한 가위바위보를 했고, 다시 찬식이 졌다. 이제 놀랍지도 않다.

결국, 다음날 아침, 홍빈은 다시 저린 팔 때문에 깨야 했고, 찬식 역시 다시 침대에서 밀려 떨어져 같은 곳에 멍이 또 들었다. 그리고, 거의 재방송 수준으로 같은 대사를 뱉으며 싸우던 둘은, 다시 배고픔에 휴전을 하고, 아침부터 라면을 끓여먹었다. 하다못해 햄이라도 좀 넣어주지... 고기가 눈에 아른거리는 둘이다.







세 번째 날 아침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니, 홍빈도 결국 포기한다. 차라리 그냥 같이 침대에서 자자는 제안을 한다. 처음부터 둘 다 베개를 베고 자면, 팔이 저려 깨는 일은 없을 테니까. 세 번 연속 가위바위보를 진 찬식 역시 동의한다. 둘 다 오늘 이렇게 호의적인 이유는, 어찌 보면 곧 다가올 상황 때문인지도 모른다. 둘 다 어려워하던 장면들을 이제 얼추 다 맞춰봤다. 딱 한 신만 빼고. 첫날 있었던 일 때문에, 둘 다 그 신은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남은 건 그 신 하나 뿐이다.

밍기적거리며 아침 준비를 하고, 깨작거리며 밥을 먹고, 느릿느릿 씻고 나온 둘은 결국 뻘쭘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대사를 맞춰보는데, 진짜 딱 죽고 싶다. 둘 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기가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결국, 아침 내내 로봇 연기의 새로운 장을 연 둘은, 점심을 먹고 제대로 연습을 하자고 결정했다. 촬영장에서 또 이런 식으로 하다가 다시 이 방에 갇히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

벌써 질리고 있는 햇반과 3분 미트볼을 데워 먹고, 오래 오래 양치를 한 두 사람은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뻘쭘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았다. 잠시, 둘 다 말이 없다. 결국, 홍빈이 용기를 낸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잘 해 보자."
"그렇게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긴장한 탓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 그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홍빈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한 번 심호흡을 한다.

"그럼 시작한다."

대답 대신 찬식 역시 심호흡을 한다.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눈을 감았다 뜬 홍빈은 그윽한 눈으로 찬식을 쳐다본다.

"너, 나 좋아하지?"
"으악, 잠깐만, 나 아직 준비가..."

찬식이 팔을 벅벅 문지르며 소름이 끼쳤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한다. 홍빈은 짜증이 난다.

"아이씨, 겨우 감정 잡았는데!"
"잠깐만, 진짜 딱 1분만."

다시, 방은 둘이 심호흡하는 소리로 가득찬다. 한참동안 마음을 가다듬은 둘은 다시 시작한다.

"너, 나 좋아하지?"
"아, 아냐..."
"네가 날 쳐다보는 눈길, 내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으아, 진짜 죽어도 못 하겠다!"

찬식이 이번에도 발을 동동거리며 온몸을 비비꼰다. 홍빈은 이제 화가 난다. 결국, 첫날 그랬던 것처럼 찬식의 멱살을 잡았다.

"너, 제대로 안 할 거야, 진짜?"

찬식 역시, 첫날이 떠올라 다시 쫄았다.

"알았어, 제대로 할게."

약간은 기가 죽은 찬식에 화가 풀린 홍빈은 멱살을 놓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홍빈이 눈을 감았다 뜨고, 시선을 자신에게 옮기는데, 아까와는 뭔가 달라진 것 같아, 찬식도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자, 다짐한다.

"너, 나 좋아하지?"
"아, 아냐..."
"네가 날 쳐다보는 눈길, 내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그... 그런 거 아냐. 무슨 말 하는 거야?"

홍빈이 찬식을 침대에 밀어눕힌다. 찬식은 저항한다.

"뭐하는 거야, 이러지 마."

홍빈은 찬식의 위에 올라타, 첫날같이 팔다리를 결박한다. 찬식 역시 그 첫날이 떠올라, 약간은 경직된다. 아직도 그 키스...라고 딱히 부를 수 없는 그 혀의 침범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내가 그만두길 바래?"

잠시 그 자세로 내려보는 홍빈의 눈이 왠지 섹시하다. 제대로 몰입이 되고 있나 보다. 홍빈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찬식의 눈동자를 깊이 쳐다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다.

맞닿은 입술이 부드럽다. 그리고 조심스럽다. 대본에는 둘이 진한 키스를 나눈다고만 써 있다. 얼마나 오래, 어떤 강도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첫날같은 일을 반복하기는 싫다. 그래서, 둘 다,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다. 결국, 홍빈이 먼저 혀로 입술을 가르고 찬식의 혀를 찾는다. 서로의 혀를 감아올리고, 입 안을 훑고, 치열을 훑는다. 이상하게도, 같은 남자와 하는 키스가 어색하거나 기분 나쁘지가 않다. 역할에 제대로 몰입을 한 것 같다. 이 와중에 둘 다 승부욕이 발동 돼 왠지 먼저 입술을 떼면 지는 것 같다. 그래서, 둘 다 이건 너무 긴 것 같지만, 멈출 수가 없다.

결국, 홍빈이 먼저 입술을 뗐다. 찬식이 이겼다고 좋아하려는 찰나, 홍빈의 입술이 턱을 타고 목으로 내려간다. 대본에는 역시 간단하게 둘은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눈다, 라고만 되어 있다. 이 감독이 민망하다며 제대로 안 써놓은 탓이다. 그래놓고 정작 미팅 때에는, 그래도 좀 진한 베드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란 말을 했다. '진한'이란 말의 정의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조금은 파격적인 걸 기대하는 것 같다.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어디까지 해야 되는 건지, 베드신은 처음인 둘이라 전혀 모른다. 둘 다 다른 사람들 몰래 다른 동성애 영화들을 찾아봤었다. 그것도 다 꽤나 수위가 높은 영화들이었다. 그래서, 그 정도까지 해야 하나,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결국, 둘 다 하는데까지 해보자, 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홍빈의 행동에 찬식은 당황했지만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홍빈의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머리를 쓸어넘겼다. 대본에 써 있는 대로,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눈다는 건 결국 좋아한다는 걸 인정한다는 거니까. 이 정도는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이번엔 홍빈이 찬식의 손길에 당황한다. 하지만, 찬식 역시 대본에 충실하려 그러는 거다, 란 생각에 좀 더 대담해진다. 다시 고개를 들어 찬식의 입술을 찾는다. 아까보다 더 깊게 키스하며 찬식의 셔츠 단추를 푸르기 시작한다.

다시 찬식이 당황한다. 하지만, 베드신이니까, 어느 정도 노출을 해야 하겠지, 란 생각에 역시 저지하지 않는다. 잠시 얼었던 자신의 손을 움직여, 홍빈의 티셔츠를 벗겨 낸다. 이번엔 홍빈이 당황한다. 이제 와서야 미리 어디까지 어떻게 할지 얘기를 해 놓을 걸, 이란 생각을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 이 상황을 먼저 중단하는 건 지는 것 같다. 그건,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결국, 둘 다 웃옷을 벗은 상태가 되었다.

이번엔 키스하면서 서로의 몸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다. 바지도 벗겨야 하나? 그래도 베드신인데 바지를 입고 있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하지만 그 정도로 심한 노출을 해야 하는 건가? 설마, 이 감독이 올 누드를 바라진 않겠지? 아니겠지, 아닐 거야. 미팅 때 분명히 제대로 얘기한 것 같은데, 계약서에도 제대로 써 있을 텐데,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쨌든 지금은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연락해서 물어볼 수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여기서 관두기엔 지는 것 같아, 어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둘 다 머리가 터질 듯이 생각하던 와중에, 결국 이번엔 찬식이 홍빈의 바지 단추를 먼저 풀었다. 이제, 이판사판이다. 질 수 없다. 그렇게, 둘 다, 서로의 바지를 벗기고, 결국 속옷만 입고 있게 됐다. 찬식에게 선수를 뺏겨 왠지 진 느낌이 드는 홍빈이 갑자기 찬식의 다리를 벌리고 그 위에 누워 아까보다 훨씬 격정적인 키스를 한다. 찬식도 질세라 홍빈의 목에 팔을 두르고 꽉 껴안는다. 둘의 몸이 완전히 밀착됐다. 이건, 진짜, 너무 위험한 상황이다. 둘 다, 서로 흥분된 걸 느꼈다. 그리고, 잠시, 그 자세로 얼어붙었다. 이제 진짜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찬식이 슬그머니 팔을 푼다. 홍빈이 슬그머니 일어난다. 둘 다,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결국, 홍빈이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잠... 잠시 쉬었다... 다시 할래?"
"그... 그래."

서로 더듬으며 말을 주고 받는다. 홍빈은 화장실로 가고, 찬식은 방에 남았다. 진짜, 정말, 민망해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연기였으니까, 그만큼 몰입한 거니까, 그만큼 우리가 연기를 잘한 거다, 라고 각자 스스로에게 마음속으로 말한다. 그러나 전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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