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씨, 네가 눈을 그 따위로 뜨니까 자꾸 NG가 나지!"
"너야말로 그게 웃는 표정이냐? 무슨 조커도 아니고..."

이제는 서로를 노려보는 것도 지친다. 찬식은 피곤한 눈을 비빈다. 홍빈 역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마사지한다. 정말 알코올이 간절하다. 왜 소주 한 병이라도 몰래 넣어주지 않았는지, 애꿎은 매니저를 원망한다.

허접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대본을 꺼내 대본연습을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3일 내내 거의 50명의 눈치를 보면서도 되지 않던 연기가, 하루만에 될 리가 없다.

"넌 날 죽도록 사랑해서 나중에 버림받고 미쳐버리잖아. 그럴 정도로 사랑하는데, 왜 자꾸 노려보냐고!"
"자꾸 너라고 하지 말래? 기분 더러우니까. 내가 아니라 내 역할이 그런 거잖아!"
"아이씨, 그게 그거지. 연기하는 데 몰입을 못 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그러는 너야말로 그딴 얼굴로 사람 잘도 꼬시겠다. 이 장면은 네가 날 꼬셔야 되는 장면 아냐?"
"대본 안 봤냐? 네가 날 먼저 사랑하게 되는 장면이잖아."
"너야말로 대본 끝까지 안 읽었냐? 너도 날 사랑하는데 안 하는 척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여기서는 사랑스럽게 쳐다봐야 되는 거 아냐?"

갑자기 싸우던 둘이 입을 다문다. 대화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왠지 갑자기 민망하다. 오글거리는 건 죽어도 못 참는 홍빈은 닭살 돋은 팔을 비비고, 찬식은 대본을 테이블에 던진다.

"아이씨, 나도 몰라, 잘 거야."

찬식이 침대에 눕고 이불을 뒤집어쓰자 홍빈은 기가 찬다. 침대로 가 이불을 뺏는다.

"빨리 안 일어나?"
"이불 내놔."
"누군 좋아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빨리 제대로 연습해서 제대로 해야 될 거 아냐?"
"이불 내놓으라고, 새꺄!"

홍빈의 표정이 굳는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이불을 한쪽에 던지고 찬식의 위에 올라타 팔다리를 잡아누른다. 갑자기 당한 찬식은 잠시 얼어있다가 몸부림친다. 별로 소용이 없다.

"뭐하는 거야, 이거 안 놔?"
"왜, 제대로 연습하자니까?"

내려보는 홍빈의 눈이 싸늘한 게 무섭다. 본의 아니게 찬식은 조금 쫄았다. 그래도 큰소리쳐 본다.

"이거 놓으라고, 새꺄!"
"왜, 네가 침대에 누운 김에 베드신 연습하자는 건데? 이렇게 둘이 있다가 내가 널 덮치는 신이잖아. 넌 처음엔 싫은 척하다가 결국 나한테 넘어오고. 어디 한 번 그거나 제대로 연습해 보자고."

나지막히 말하는데 소리지르는 것보다 더 소름끼친다. 짓는 웃음이 사악해 보인다. 이제 정말 쫄았다.

두려워하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찬식을 보는데 더 열받는다. 뭘 잘했다고 저런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쳐다보는 거야? 홍빈은 두 번 생각할 새도 없이 찬식의 입술을 덥쳤다.

"윽, 으극!"

소리지르려고 입을 여는 게 아니었다. 홍빈은 열린 입술 사이로 바로 거칠게 입 안을 파고들었다. 키스라고는 할 수 없는, 폭력에 가까운 행동이다. 그러다 갑자기 홍빈이 입술을 뗐다.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그만두라고, 새꺄!"

입술이 깨물려 놀란 홍빈이 팔의 힘을 푼 덕에 찬식은 가까스로 홍빈을 밀친다. 홍빈은 밀쳐진 채로 침대 발치에 앉아, 침대 머리맡에 일어나 앉은 찬식을 바라본다. 진짜로 놀랐는지 눈에는 눈물이 좀 고인 것도 같고, 입술에는 자신의 피가 묻어 있다. 갑자기 정신이 확, 든다. 잠시 뭐가 씌웠었나 보다. 공찬식은 사람을 제대로 열받게 하는 뭔가가 있다.

"이 새끼가 미친 역을 하더니 진짜 미친 거야?"

센 척 말을 하지만 목소리가 떨린다. 많이 놀랐나 보다. 조금은 미안하지만, 그래도 홍빈은 자신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제대로 하라고, 나 진짜 미치는 꼴 보기 싫으면."
"뭘 이딴 거에 목숨거는데! 어차피 며칠 후면 와서 내보내줄 거, 왜 그렇게 뭔가를 하려고 난린데! 넌 대충대충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텐데, 네 팬들이 충분히 쉴드 쳐 줄 텐데, 왜 이렇게 열심히인 척이냐고!"

잠시 가라앉았던 피가 다시 끓어오른다. 홍빈은 찬식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긴다. 아까 결박 당했을 때보다 더 놀란 찬식은, 힘없이 끌려온다.

"너, 뚫린 입이라고 잘도 함부로 지껄인다? 연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돌 출신이라고, 발연기라고 얼마나 많이 여기저기서 욕먹은 줄 알아? 내가 그걸 극복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연기 공부하고, 연습하고, 없는 시간 쪼개가면서 잠잘 시간도 포기하면서 여기에 매달렸는데! 아이돌 출신이라 못한다, 대충한다 소리 안 들을려고 내가 무슨 노력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면서, 뭐, 열심히인 척이라고?"

바로 코앞에 다가온 얼굴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보다, 나지막해서 더 무서운 목소리보다, 그 말에 담긴 진심이 느껴져서 찬식은 진짜로 당황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이렇게 상처 받았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홍빈은 찬식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 없이 말을 잇는다.

"그러는 너야말로 뭐야? 지금 이 상황에서 더 잘해보자, 더 연습하자, 해야 되는 건 너 아니냐고. 이제 가수도 그만두고, 너한텐 이거밖에 없잖아! 이것도 못 하면,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아, 아무리 화가 났어도 저 말은 하는 게 아니었다. 말을 뱉으면서도 홍빈은 아차 싶었다. 찬식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풀린다. 하지만, 불같이 화를 내며 주먹이라도 날릴 거라고 생각했던 찬식은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 공허한 말투에 홍빈은 할 말이 없다.

"나도 나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는데 말야, 그게 다 소용 없는 일이더라고. 내가 백 번 잘해도, 한 번 실수하면 그걸로 끝이야. 네 말대로 난 이제 가수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연기 하나뿐인데, 이것도 잘 못하면 난 뭐냐? 아무리 노력해도,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아니까, 자꾸 해도, 해도 안 되니까 하기가 싫어, 이젠. 그동안 보지 않으려 한 진실이, 결국 난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라는 사실이 너무 제대로 보여지니까. 차라리 포기하면 나중에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안 한 거야, 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잖아."

둘 다 서로의 가시 돋친 겉모습만 보느라, 정작 속이 얼마나 여리고 상처가 가득한지 잘 몰랐었나 보다. 홍빈도, 찬식도,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 홍빈이 다시 찬식에게 손을 뻗는다. 찬식이 움찔하지만, 홍빈은 말없이 찬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다정한 손길에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주책맞게도.

"우리, 조금만 더 힘내 보자. 왠지 이번엔 잘 될 것 같거든? 그러니까 다시 연습 해보자, 찬식아."

처음 들어보는 홍빈의 다정한 말에 홍빈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둘 사이의 벽이, 조금은 허물어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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