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시나리오를 받은 지 3일만에 감독과의 미팅이 잡혔다. 절대, 기획사 사장이 무서워서 마음 바꾼 게 아니지만, 이왕 하기로 마음먹은 거 제대로 해보자, 다짐하며 찬식은 미팅 장소인 한 중식 레스토랑의 룸으로 안내를 받는다. 미팅 장소가 중식 레스토랑이라니, 특이하다.

분명히 일부러 조금 일찍 왔는데 룸에 이미 누군가가 있다. 혹시 감독님이 먼저 오신 건 아닐까, 걱정하며 기웃거리는데, 자리로 안내해 준 웨이터가 옆으로 비키고,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찬식의 얼굴이 굳는다. 찬식의 얼굴을 본 그 사람 역시 표정이 썩어가지만, 그래도 억지웃음을 지어보인다.

"오랜만이다, 은세현."

웃음 띤 얼굴로 말하지만 웃는 입과는 달리 눈은 싸늘하다. 찬식은 갑자기 짜증이 밀려온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데, 이건 차라리 외나무다리가 낫지, 싶다. 다리 위라면 뛰어내려 버리면 되니까. 저 상판대기를 여기서 보다니... 아니, 잠깐, 지금 설마 이 자리에 쟤가 나왔다는 건, 에이 설마, 하나님이 아무리 날 미워해도 이렇게까지 큰 엿을 보내진 않겠지, 생각하지만 이미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래도, 절대로, 저 녀석에게 자신이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보일 순 없다. 찬식은 최대한 멀찍이 앉으며 말한다.

"이제 공찬식이야."
"아, 그래, 그게 본명이라고 들은 것 같기도... 그런데, 연예인 이름이라기엔 좀, 촌스럽지 않나?"
"공찬식이나 이홍빈이나."

이런, 결국 발끈해버렸다. 낚인 찬식은 속으로 분을 삭이고, 낚는데 성공한 홍빈은 혼자 몰래 미소짓는다.

한때는 찬식이 훨씬 더 인기가 많았었다. 홍빈보다 먼저 데뷔한 선배이고, 홍빈보다 더 큰 팬덤을 가진 아이돌 그룹의 리더였다. 하지만, 결국, 찬식이 친 사고와 스캔들, 등 여러가지가 겹쳐, 찬식의 그룹은 해체한 반면, 홍빈의 그룹은 아직도 건재하다. 게다가, 이제 예전의 찬식의 그룹만큼 큰 팬덤을 갖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홍빈은 이미 오래 전에 연기를 시작해, 연기에서는 선배다. 여러가지로 최악의 상황이다.

무엇보다, 둘이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친해지고 싶어하는 홍빈을 대놓고 무시한 찬식 때문에, 둘은 친구라기 보다는 원수에 가깝다. 물론, 시크한 이미지를 고수하느라, 회사에서 다른 연예인들 어느 누구와도 친해지는 걸 허락하지 않아서 그렇게 했던 거였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홍빈은 무시당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찬식의 그룹이 낸 마지막 앨범이 처참히 망하고, 같은 시기에 같이 출연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한 홍빈은, 찬식과 마주쳤을 때 대놓고 비웃었었다. 그렇게, 둘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문제는, 지금 이곳에서 홍빈을 만났다는 거다. 제발 찬식이 생각하는 그게 아니기를 빌지만... 지금까지 찬식의 운을 봐서는 그러고도 남는다.

그리고, 역시, 그게 맞았다. 거의 20분을 늦은 이 감독은 살얼음판인 룸의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한 채 사과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20분 내내 서로에게 말 한마디 없이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던 두 사람은, 이 감독의 등장에 안도했지만, 곧바로 그의 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아이돌 출신이니까 서로 알지? 그래도 뭐 격식은 차려야 되니까, 이쪽은 형사 신동우 역을 맡게 된 이홍빈, 그리고 이쪽은 살인마 정진영 역을 맡게 된 은세현, 아니, 지금은 공찬식이라고 했나? 어쨌든, 둘이 이번 영화의 주인공이야. 우리 한 번 잘해보자고."

아, 정말 최악이다. 서로를 보는 눈에서 불꽃이 튄다. 하지만, 당연히 이 감독이 보지 않을 때만이다.







미팅 후 집으로 돌아온 찬식은 자켓을 벗어 소파에 내동댕이친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소파 쿠션에 먼지가 나도록 주먹질을 한다. 정말, 이럴 수는 없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에 충성을 하고 온갖 매국노 짓을 했어도 이 정도로 천벌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파토 낼 수가 없다. 사장이 무서운 건 둘째치고, 이제 와 안 하겠다고 하면 이홍빈은 자기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라 생각하고 의기양양해 할 거다. 그건 죽어도 싫다. 그 비웃는 얼굴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러나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 바로 홍빈이 이 영화를 포기하는 거다. 홍빈은 솔직히 아쉬울 게 없으니까. 인기많은 아이돌 그룹의 멤버이고, 연기자로서도 잘 나가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런 역할을 굳이 맡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이 영화는 누가 봐도 악역이 더 조명받을 게 뻔하다. 더 임팩트 있는 장면은 다 악역에게 돌아갔으니까. 그러니까, 홍빈은 이 영화를 포기할 이유가 충분히 많다. 제발, 이것저것 다 계산해서, 이 결론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제발, 이홍빈이 이 영화를 포기하길...

하지만, 다음 미팅 때도 이홍빈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다음에도, 또 그 다음 대본 리딩때도, 또 그 다음 액션스쿨에서의 미팅까지도... 그렇게, 결국, 영화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홍빈 역시 찬식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포기하면 찬식이 이기는 거라 생각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영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찬식이 알 리가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둘의 연기합이 꽤나 잘 맞는다. 카메라 테스트를 할 때부터 이 감독이 말했듯이, 둘의 비주얼적 케미도 꽤 좋다. 어쨌든, 둘이 아무리 뒤에서는 서로 으르렁거려도, 카메라가 돌 때는 프로페셔널하게 제대로 연기하고 있으니까. 물론, 아직 촬영은 영화 초반에 집중 돼, 둘이 만나는 씬은 이제 겨우 두 개 찍었을 뿐이고, 그것도 다 추격하는 신이다. 촬영을 시작한 첫 한 달 동안은 찬식의 살인 장면 등을 찍었고, 그 다음에서야 홍빈이 형사로서 찬식을 쫓는 장면을 찍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두운 밤에 찍은 두 장면으로도 이미 둘의 케미스트리가 살아나고 있다.

촬영이 계속 진전될수록, 이 감독의 만족도는 더 올라가고 있다. 솔직히,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찬식을 캐스팅 한 건 모험이었다. 그냥, 발연기를 해도 잘생긴 남자가 나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캐스팅 한 거였다. 아무래도 동성애 영화인데, 주 관객이 여자일 것을 감안했을 때, 비주얼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냔 말이다. 벌써부터 캐스팅 소식만으로도 비주얼 끝장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찬식은 생각보다 잘 해내고 있다. 그 짝짝이 눈을 최대한 활용해,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의 섬뜩한 표정을 지으면, 찍는 이 감독도 소름이 끼칠 정도다. 몸을 쓰는 것도 생각보다 잘해서, 액션신도 잘 소화한다. 아무래도 가수 출신이라, 안무를 외우는 것처럼 액션 동작을 곧잘 외워 한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홍빈과 둘이 나오는 장면의 촬영을 시작하자, 이 감독은 본인의 탁월한 안목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추격신에서는 진짜 살인마와 형사가 된 양, 잡히면 죽고 죽일 듯이 이를 악물고 뛰어서, 카메라가 못 쫓아갈 정도다. 대치신에서는 눈에서 레이저라도 쏠 듯이 서로를 노려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둘이 진짜 원수지간이라도 되는 듯 싶다. 취조 장면에서는, 둘이 서로 빈정대며 약을 올리는 게, 누가 봐도 진심인 것처럼 보인다. 둘 다 아이돌 출신인데 이렇게 연기를 잘 해도 되나, 싶다.

그렇게 촬영은 원만히 진행되어, 결국 찬식과 홍빈 둘 다 끔찍히도 두려워하던 과거 회상신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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