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를 들고 있는 찬식의 손이 떨린다. 화가 나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당황해서 그러는 건지 찬식 본인도 잘 모른다.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아무 표정 없이 매니저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이걸 지금 나보고 하라고 가져온 거야?"

아직 신입티를 벗지 못한 매니저는 찬식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그냥 눈치만 볼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에게 화내봤자 무슨 소용 있겠어? 속으로 생각하며 찬식은 시나리오를 책상에 던진다. 매니저는 아무 생각 없이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시나리오를 책상 위에 제대로 올려 놓는다. 그 모습을 보며 찬식은 갑자기 허탈해진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의 리더였다. 돈터치의 은세현. 어딜 가도 대스타로 대접 받는 아이돌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연이은 스캔들과 팀의 해체, 재계약 불발, 등등으로 은세현, 아니, 본명 공찬식은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망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노래를 기깔나게 잘해 솔로로 나서던가, 예능을 잘 하던가, 연기로 전향을 하는 게 제일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찬식은 한국의 내로라하는 가수들만큼 노래를 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능프로그램에 나가 망한 아이돌 그룹의 리더에게 향하는 숨겨진 공격들을 넉살 좋게 받아칠 만큼 성격이 동글동글하지도 않다. 결국, 연기로 전향하는 게 찬식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뭐, 아이돌 그룹으로 살면서 몇 년 동안 하루 24시간을 시크한 척, 멋있는 척, 힘들어도 괜찮은 척 연기하는 데 도가 튼 찬식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문제아로 찍힌 찬식의 이미지다. 은세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본명 공찬식을 쓰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어딜 가나 은세현이라는 이름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들어오는 배역이 다 바람둥이에 결국 여자주인공에게 버림받는 쓰레기 같은 놈들이다.

그렇다고, 연예계에서 잔뼈가 굵은 지 몇년인데, 다른 초짜 연기자들처럼 오디션 보러 다니기엔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문제아라는 이미지 때문에 겨우 어렵게 계약이 성사된 현 기획사는 기획력도, 힘도 없는 조그만 회사라 배역을 따와 줄 여력이 없다. 이런 몇 달도 안 된 매니저를 찬식에게 붙인 걸 보면, 딱히 찬식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이미지가 어떻든, 네임밸류 있는 연예인이 하나쯤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찬식에게 어떤 영화의 주인공 역할이 들어왔다는 얘기는 반가우면서도 약간은 우려스러운 소식이었다. 찬식은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회사로 나와, 작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시나리오를 받아들고 읽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찬식의 얼굴이 점점 표정을 잃어갔다.

꽤 유명한 감독이,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동성애 영화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한단다. 영화 내용은 나름 스릴러다. 고등학교 동창인 두 남자가 나중에 한 명은 형사로, 한 명은 연쇄살인마로 만난다는 내용. 그런데 연쇄살인을 한 이유가 그 형사가 된 남자를 사랑했는데, 그 남자에게 버림 받고 미쳐서 사이코패스 기질을 드러내 그 남자를 닮은 사람들을 죽이다가, 결국 그 형사에게 잡히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형사 역시 미쳐버려서 사람을 죽이며 끝난다니, 꽤나 흥미로운 내용이다. 게다가 찬식에게는 연쇄살인마 역이 들어왔다. 요즘은 매력적인 악역이 주인공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사랑받는 시대다. 더욱이, 남주 투톱 영화이기 때문에, 어쨌든 주인공이다. 어떻게 보면 찬식에게는 꽤 큰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람둥이에 문제아 이미지로 이미 발목을 잡혔는데, 여기에다 게이 역을 했다는 이미지까지 얹고 싶지 않다. 그냥 둘이 사랑했다, 로 대사처리가 되면 모를까, 시나리오에는 베드신까지 나온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거까지 찍어야 하나, 란 생각이 드는 찰나, 찬식의 얼굴에 쓴웃음이 배어난다. 그래, 나 지금 아쉽지, 많이, 라고 솔직한 마음이 얘기한다. 그래도... 이건...  

고민에 잠긴 찬식이 문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기획사 사장이다.

"어때, 시나리오 읽어봤어?"
"아, 예, 뭐."

찬식의 떨떠름한 표정을 읽지 못하는지, 아니면 읽어도 상관이 없는 건지, 사장은 웃으며 말을 잇는다.

"너무 좋은 기회잖아. 솔직히 이 감독님이 연락해서 찬식이 쓰고 싶다고 했을 때 제대로 놀랐다니까. 그 분 영화 찍고 싶어하는 배우들이 쌔고 쌨는데, 감독님께서 직접 우리한테 연락을 주셨으니까. 이번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건 비주얼이라서, 두 남자 주인공은 무조건 얼굴로만 뽑으시겠다는 거야. 뭐, 얼굴 하면 우리 찬식이가 어디 가서도 안 빠지지."

언제부터 친했다고 우리 찬식이야. 가수하다 망해서 기획사 사장하는 주제에, 생각하던 찬식은 또 쓴웃음을 짓는다. 아, 나도 망한 가수지, 생각하면서. 처음엔 이러지 않았는데, 매사에 긍정적이고 어딜 가도 성격 나쁘단 소리는 안 들었는데, 힘든 일이 자꾸 겹치니까 성격이 자꾸 꼬여간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어딜 가나 무슨 일을 하나 얼굴 얘기. 그래, 연예인으로서 잘생긴 얼굴은 플러스지 마이너스는 아니다. 하지만, 가수였을 때도 노래 얘기나 안무 얘기보다는 제일 먼저 얼굴 얘기, CF를 찍어도 얼굴 얘기, 난 얼굴이 다가 아니란 말이다!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 얼굴 덕에 지금까지 먹고 산 것 같아 그러기도 좀 그렇다.

"그래서, 어떻게, 내일 당장이라도 미팅 잡을까?"

이 기회를 뻥 차버리는 건 누가 봐도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거다. 게다가, 어디 무슨 작품상까지 받은 감독이 제대로 만드는 영화다. 하지만...

"그래도 이 역이... 게이 역인데... 좀... 제 이미지가..."

방실방실대던 사장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진다.

"네 이미지가 어떤데?"

가라앉은 사장의 목소리가 무섭다. 찬식은 순간 소름이 끼친다. 시나리오에서 본 사이코패스란 단어가 갑자기 생각난다.

"아니에요. 내일 미팅 해요, 그럼."

절대로 갑자기 이중인격자 같은 모습을 드러낸 사장 때문에 쫄아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다. 사장 말대로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다, 라고 찬식은 혼자 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언제 정색했냐는 듯 사장이 다시 방긋거린다.

"그래, 그럼 내가 감독님께 연락할게. 다른 남자 주인공도 곧 확정될 것 같다고 하셨으니까 둘이 같이 보면 되겠네."

사장이 다시 싱글거리며 나가고, 찬식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매니저에게 괜한 화풀이를 한다.

"아이씨, 내가 목마르다고 말하기 전에 미리미리 물 안 챙겨 놔?"

황급히 물을 구하러 매니저가 나가고, 찬식은 자신이 던져놨던 시나리오를 주워 다시 제대로 읽기 시작한다. 이런 처지가 된 자신의 몰골이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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