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둘 다 말이 없었다. 각자의 생각에 잠겨, 각자의 세상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거다. 피를 마셔야 하는 유전자를 가진 녀석이 피를 싫어한다니. 채식주의자라니. 너무나 모순적이다. 지금까지 참 특이한 녀석이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일부러 그렇게 살고 있는 거다. 왜 그런 거짓된 삶을 사는지, 왜 피를 싫어한다, 마시고 싶지 않다,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이 녀석의 생각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집에 다다라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도 말이 없었다. 자켓을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풀러 옆에 떨기고, 셔츠 단추를 세 개 정도 푸르며 침대에 가 앉았다. 녀석은 한쪽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 녀석을 만난 첫날과 오버랩된다.

"이리 와."

그 때 대사까지 던져본다.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날 본다.

"화났지?"
"아니, 화난 건 아냐. 그러니까 이리 와."

사실이다. 화가 난 건 아니다. 그냥,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녀석은 쭈뼛거리며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얼굴이 머리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녀석의 머리를 쓸어올린다.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본다.

"얘기해 줘.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건지."

녀석이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을 가져다 꼭 잡는다. 목소리가 떨린다.

"이 유전자는 저주야. 오래, 아프지 않게 살 수 있다고? 그래서 뭐?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보통으로 살다가 보통으로 죽는데, 혼자 외롭게 살아야 되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데. 그 오랜 시간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녀석의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아준다.

"그래서 싫었어. 처음부터,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게 싫었어.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세뇌를 했어. 난 피를 싫어한다, 피는 맛이 없다, 피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아버지에 대해 얘기한 건 사실이야. 할아버지는 그 유전자가 나보다 훨씬 강해서, 할아버지의 부모님 둘 다 그 유전자를 가진 분이였어서, 할아버지는 그 갈증을 절대로 참지 못해. 하지만 어머니는 참아냈고, 나도 참을 수 있었어. 피 맛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채소만 먹고, 어떻게든 버텼어."

아... 난 참 바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녀석 앞에서 스테이크 갖고 놀릴 생각을 하다니. 이 세상 최고의 멍청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 어머니도 돌아가셨어. 마치, 그때까지 겨우겨우 버텼다는 듯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엔 더 이상 버티지 않아도 되니까. 그때 피라도 마셨다면 병이 나았을 텐데,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살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돌아가셨어. 우리 집안의 또 다른 내력이야. 한 번 마음주면 완전히 다 주고,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거."

희미하게 웃는다. 그런데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진영이 손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한국에 돌아오셨을 때, 내가 나이든 걸 보고 화를 내셨어. 보통 사람처럼 나이 먹어가는 걸 보고, 너도 네 엄마처럼 그렇게 죽을 생각이냐고. 할아버지가 처음엔 화를 내시다가, 나중엔 너무 슬퍼하시니까, 결국 피를 마시겠다, 약속하고 나왔는데, 어떡해야 될지를 모르겠는 거야. 그러다 널 봤어. 너한테서, 너무 달콤한 냄새가 났어."

듣고 싶었던 이야긴데 하나도 기쁘지 않다. 녀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걱정만 될 뿐이다.

"그날 이후, 너를 계속 만나게 되면서, 절대로 마음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그렇게 됐어. 난 우리 엄마처럼 강한 사람이 아니어서, 엄마처럼 참을 자신이 없어서, 절대로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그래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 연 적 없었는데, 너한테는 마음이 자꾸 가더라.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이. 하지만, 네 피는 너무 달콤하고, 내가 아무리 맛없다, 맛없다, 스스로 세뇌하려고 해도 자꾸 더 마시고 싶고, 참을 수가 없고, 그래서 그 마지막 날,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괜찮겠지, 하고 원없이 마셨어. 다시 못 볼 테니까, 그 맛을 잊고 싶지 않아서."

이제 그 날 일이 이해가 된다. 잠깐, 그렇다면...

"그럼 너 그것도 거짓말이야? 흥분해야지만 송곳니가 나온다는 거."

녀석의 얼굴이 붉어진다. 결국, 이 녀석이 날 유혹한 게 맞았던 거다. 그게 너무 사랑스럽다.

"아... 흥분 했을 때는 내가 조절하지 못해서 나오는 게 맞아. 하지만 평소 때도 나오게 할 수 있어."

부끄러운 듯 거의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아까 눈물을 닦아준 손으로 이번엔 따뜻해진 볼을 어루만진다.

"그 후에, 널 잊으려고 엄청 많이 노력을 했는데, 매일매일 핸드폰 보며 연락하고 싶은 걸 참았는데, 피가 마시고 싶은 것보다 더 힘들게 참았는데, 결국 네가 날 보러 와서, 그 결심이 무너져 버렸어. 널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이제부터는 널 위해서 더 열심히 참아볼게. 너와 같이 늙어가고 싶어."

붉어진 볼에, 입술에, 코에, 이마에, 키스를 한다. 녀석의 양볼을 잡고 눈동자를 바라본다.

"난 네가 아픈 게 싫어. 네 어머니도 그러다 병나서 돌아가셨다며. 마시고 싶을 때 조금씩 마셔도 돼. 내가 몇 모금씩 제공해 줄게."
"내가 피를 마실 때마다 난 나이를 덜 먹을 거야. 싫어."
"그래도 아픈 것보다는 낫잖아. 우리 오래 오래 할아버지 될 때까지 같이 아프지 말고 오래 살자."

녀석이 내 양손을 볼에서 떼고 자기 손에 꼭 잡는다. 날 올려보는 눈이 슬프다.

"우리 할아버지, 올해 여든 셋이셔."
"우와, 완전 30대 후반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할머니가 자살하셨어."

내 가벼운 말투가 무색하게 무거운 말로 받는다.

"힘드셨던 거야. 할아버지는 도저히 갈증을 참을 수 없는 분이니까, 피를 마시면서 더디게 늙어가는데, 할머니는 보통 사람이니까. 갈수록 두 사람이 더 차이가 나 보이고, 나중에는 모자지간 아니냐는 얘기를 들으니까, 할머니가 너무 많이 상처 받으시고 힘들어하셨어. 하지만, 우리 집안 사람들은 한 번 사랑하면 끝까지 사랑하니까,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놔 줄 수 없었고, 그러다 결국 할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

가슴이 먹먹해온다.

"할아버지가 그때 얼마나 슬퍼하셨는지, 아직도 기억해. 할머니 따라 가겠다고, 죽을 거라고 그렇게 소리지르며 우시던 거. 결국 그렇게 하지 않은신 건 어머니와 나 때문이야. 아버지 때문에 참고 있는 어머니와,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참고 버티는 내가 가여워서. 그래서 할아버지가 이 기형 유전자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으려고 연구를 시작하셨어. 남들보다 오랜 시간이 있으니까, 열심히 하다보면 찾을 수 있지 않겠냐고,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그래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우리 같은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연구도 하고, 그러고 계셔. 그게 할아버지가 살아가는 목표야. 난, 할아버지처럼 강하지가 못해. 만약, 같은 상황이 닥치면, 난 너 따라 죽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마실 수 없어."

처음 들었을 땐 신기한 이야기였고, 조금 부럽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건 이 녀석 말대로 저주다. 평생 이 저주를 안고 살아갈 이 녀석이 너무 안쓰럽다. 이 녀석이 어떤 마음으로 날 사랑하는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든 녀석의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밝게 말했다.

"난, 네가 나보다 어려보여도 하나도 자존심 상하거나 슬프지 않을 것 같아. 오히려, 해가 갈수록 네가 나보다 어려보이면, 젊은 녀석 끼고 사는 것 같아서 좋을 것 같은데? 선생님과 제자, 뭐 그런 롤플레잉도 할 수 있고."

내 말에 어이가 없는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웃는다. 마주 웃어준다.

"그리고 우리 집은 대대로 오래 사는 집안이라, 난 100살까지는 살 자신이 있는데, 네가 병나서 나보다 먼저 가버리면 나 혼자 남아서 어떡하라고. 차라리 네가 젊게 오래오래 살아서, 나중에 나 늙었을 때 네가 나 보살펴주면 되잖아. 네가 나 보살펴주면, 내가 노력해서 120살까지는 살아볼게."
"피를 마신다 해도 그렇게 오래 살 자신이 없는데."

농담하는 걸 보니 녀석이 좀 괜찮아진 것 같아 눈물이 고인 눈에, 코에, 볼에, 그리고 입술에 키스한다. 이 안쓰러운 녀석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정말 내가 어떻게든 오래오래 살아야겠다, 다짐한다. 늘 지루하고 따분한,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이 싫었는데, 이 녀석과 같이라면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밥먹고, 일하러 가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같이 저녁먹고 잠드는, 그런 일상을 백 년 동안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해도 하나도 안 지루할 것 같다. 그런 따분한 일상이 싫고 일탈이 하고 싶어 이 녀석을 만난 건데, 이 녀석과 그런 삶을 같이 살고 싶다니, 결국 모순적인 건 이 녀석이 아니라,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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