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 소리에 감았던 눈이 떠진다. 눈앞에 검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그가 깰세라 알람을 서둘러 끄고 등돌리고 자고 있는 그의 머리에, 드러난 하얀 목에, 어깨에 키스한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다.

이불을 잘 덮어주고 아침잠이 많은 그를 깨우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샤워를 한다. 서둘러 나와 머리도 대충 말리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선다. 이렇게 지낸 지 몇 달, 어느덧 익숙해진 아침 풍경이다.

그 외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전처럼 같이 저녁 먹고, 같이 밤을 보낸다. 아,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입으로는 할아버지 때문에 왔다고 하는 녀석이 내 피를 먹을 생각을 안 한다. 헐랭한 녀석이다. 그러니 누가 봐도 거짓말인 게 티나잖아. 가끔 흥분한 녀석의 송곳니에 내 입술이나, 피부 어딘가가 긁히거나 찢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입술을 서둘러 뗀다. 내 피를 실수로라도 마시지 않으려 하는 거다. 아무리 내 피가 맛이 없다지만, 그렇게 대놓고 싫어할 것까진 없는데, 녀석도 참, 한결같다.

오늘은 녀석이 공연이 없는 날이라, 최대한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 일에 속도를 낸다. 그날, 내가 녀석을 오랜만에 다시 본 날, 공연이 꽤 호평을 받아서, 그 클럽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공연을 하고 있다. 공연이 없는 날에도 녀석은 연습이다, 작곡이다, 꽤 바쁘다. 그래도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밤에는 내 집으로 온다. 내가 자고 있어도 내가 알려준 비밀번호로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에서 잠든다. 그 마지막 선까지 넘었다.

이제는 우리 단골집이 되어버린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언제나같이 난 스테이크, 녀석은 샐러드 바를 주문한다. 내가 먹고 싶냐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 조각을 눈앞에 들이밀면, 기겁을 한다. 놀리기 쉬운 녀석이다. 그런 녀석을 놀리려고, 좀 더 익힌 걸 좋아하는 데도 레어를 시킨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유치한 구석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고, 이제 일어날까, 하는데, 갑자기 녀석의 옆에 누군가 와서 섰다. 웨이터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잘생기고 옷도 꽤 스타일리쉬하게 입은 30대 후반의 남자다. 내 눈길을 따라 고개를 든 녀석이 놀라 일어선다.

"할아... 아니, 삼촌."

뭔가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녀석과 꽤 닮았다. 선이 고운 녀석과 달리 더 남자답고, 키도 더 크고 체격도 꽤 좋지만, 어딘가 많이 닮았다. 녀석의 할아버지가 맞다.

할아버지...라고 하기엔 너무 젊어보이는 저 남자가 날 차가운 눈으로 노려본다.

"이 녀석이냐, 네가 내 말을 어기면서까지 만나고 싶은 놈이?"

흠... 이건 어디 드라마에서 많이 본 장면 같은데... 녀석이 그 특유의 난처한 웃음을 짓는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GPS."

핸드폰을 꺼내 흔들어 보이며 말한다. 할아버지치고는, 뭔가 너무 모던하잖아.

그나저나, 왠지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이 상황에, 사람들의 이목이 점점 집중되는 게 느껴져서, 나도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신동우입니다. 우선 나가서 얘기하시죠."

날 여전히 노려보던 할아버지...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까... 어쨌든, 할아버지가 앞서 나가고, 녀석이 쭈뼛거리며 뒤따라간다. 그 뒤를 따라가며 최대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쓴다. 어쨌든, 가족의 반대는 이미 예상한 일이니까. 가족의 반대라니, 녀석과 결혼이라도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나? 웃음이 나지만 꾹 참는다.

남자 둘이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는 것만큼 이상한 그림이 곧 연출된다. 체인점 카페 2층에 한쪽 테이블에 남자 셋이 둘러앉아 있다. 한 명은 다른 한 명을 노려보고, 한 명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 나머지 한 명은 별다른 표정이 없다. 가게가 한산하기에 다행이지, 아니면 진짜 웃겼을 거다.

"진영이 할아버지 되시죠? 인사가 늦었습니다. 다시 제대로..."
"그딴 건 관두고."

할아버지의 말투에 욱하고 싶지만 아무리 외모가 30대 후반이여도 녀석의 할아버지니까 참는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놈이냐?"

난 신경도 안 쓰고 녀석에게 묻는다. 녀석이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에미처럼 젊은 나이에 죽어도 좋을 만큼 이 놈이 중요하다는 거냐?"

녀석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저렇게 물어보고 저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 한 번도 자기 감정을 제대로 얘기해 준 적이 없어 나도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럼 넌?"

이번엔 할아버지가 내게 묻는다.

"진영이 사랑합니다."

할아버지보다 녀석이 더 놀란다. 이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녀석이, 너와 같이 늙어가고 싶어서, 지 에미처럼 그렇게 살고 싶어서, 다시는 피를 마시지 않겠단다. 너도 이 아이와 평생 같이 할 생각이냐?"

녀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나 역시 얼굴이 화끈거린다. 서로에게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말을 제 3자의 입에서 듣고 있으려니까, 녀석이나 나나 부끄러워 죽겠다. 그래도 듬직해 보이려 단호히 말한다.

"네. 평생 아껴주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다. 남자끼리 이러는 게 당황스러우시겠지. 아무리 젊어보여도 할아버진데...

"이 아이는 너 때문에 평생 피에 대한 갈증을 참으며 살아야 된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 거냐?"
"아,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말과 당황하는 녀석의 얼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녀석은 분명 피를 싫어한다고, 절대로 마시고 싶지 않다고 했었는데, 이게 뭔 말인지 모르겠다.

"얘 에미도, 얘 애비와 같이 늙어죽으려고 평생 그걸 참다가 결국 병나서 갔다. 난 이 아이까지는 그렇게 잃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이 아이를 설득하려 했는데, 너와 같이 늙어죽는 게 소원이라고, 그런 말로 할애비 가슴에 못을 박았다. 네가 그럴 가치가 있는 놈이냐, 묻는 거다."

아까부터 할아버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녀석이 내게 했던 말들과 너무 다르다. 녀석은 죄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

결국 할아버지는 내가 남자라서 싫은 게 아니다. 나 때문에 손자가 일찍 죽는 게, 아픈 게 싫은 거다. 아직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우선 할아버지를 안심시키는 게 먼저다.

"솔직히 고생 안 시키겠다,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니까. 그 대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라고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 일어섰다.

"그럼 됐다. 그 이상 뭘 바라겠느냐."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의 머리를 할아버지가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 된다."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내게 마지막으로 눈길을 주고, 먼저 자리를 떴다. 녀석은 한참을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고, 나는 그런 녀석을 한참을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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