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늦게까지 야근해서,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마음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오늘이 한 달이 되는 날이다. 아니나다를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의 표정도 마냥 밝지만은 않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다. 비밀번호를 알려주겠다는 말에 한사코 거절하고는, 이렇게 마지막 날까지 날 기다리고 있다. 아직, 둘 사이에 넘지 못할 선이 있다. 그리고, 이제 그걸 넘을 일이 없다.

그 첫 데이트 같지 않은 데이트를 하고 나서, 둘 사이의 벽이 많이 허물어졌다. 2, 3일에 한 번 오던 녀석이 거의 매일 왔다. 그리고, 톡으로 연락도 꽤 했다. 시간이 맞으면, 같이 만나 저녁을 먹거나, 내 집에서 해 먹거나 하는 일이 잦아졌다. 생긴 건 엄청 고급스러운 귀족같이 생긴 녀석이, 밥에 김치찌개도 잘 먹는다. 이것저것 꽤 잘 먹는 편이다. 싫어하는 건 피뿐인 것 같다.

하지만 절대로 자고 가진 않는다. 절대로 한 달 후의 일을 얘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그 이상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게 서운하지만, 나도 솔직히 이 한 달이 지난 후에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여기에서 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마지막 선을 그나, 나나, 넘지 못하고 있다.

오늘따라 얼굴에, 몸에 구석구석 천천히 키스해 준다. 내 손이 안 닿는 곳이 없게 어루만져 준다. 지난 한 달 동안 알게 된 그의 민감한 곳을 다 애무해 준다. 그의 하얀 피부를, 달뜬 숨소리를, 억누르는 신음소리를, 눈과 귀에 가득 담는다. 오늘이 마지막인 만큼, 정성들여 사랑해 준다.

평소보다 그가 내 피를 더 빤다. 드디어 이 맛없는 피 맛에 적응한 건가? 그가 피를 빨면 뭔가 묘한 느낌이 생긴다. 원래는 그가 몇 방울 이상 마시지 않기 때문에, 그 느낌이 뭔지 생각하기도 전에 끝나버린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내가 그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그가 내 피를 마시고 있어서인가? 뭔가 더 나른하고, 기분이 좋다. 둘 다 절정을 맞이할 때까지, 그는 내 목에서 입술을 떼지 않았고, 난 그를 꼭 안은 채 죽은 듯이 잠들었다.

깨어나보니 그는 없었다.








머릿속이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그래도 나름 일도 잘하고, 해서 진급도 빨리 했는데, 이런 식이면 잘려도 할 말이 없다. 벌써 두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러는 게 웃기지도 않는다.

그동안 연애했던 여자들, 그리고 밤을 같이 보낸 수십 명의 여자들, 누구 하나에게도 이런 걸 느낀 적이 없었는데, 남자에게, 그것도 뱀파이어에게 이리 미쳐 버렸다니. 영화에서 보면 인간들은 뱀파이어에게 홀려 피를 빨려도 기쁘게 죽어가던데, 나 역시 그에게 홀린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게 뭐지, 싶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거라면, 내가 지금까지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은 다 거짓말인 거다. 그동안 느꼈던 어떠한 감정도 이러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홀린 게 맞는 거다. 하루 빨리 이런 감정을 잊어버리고,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야 한다.

매일매일 클럽에 가서 여자를 꼬셔도, 정작 둘이 같이 있으면 할 마음이 안 나 버려두고 나온다. 뺨도 여러 대 맞았다. 맞아도 싸다. 하지만, 그 방법 외에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또 클럽에 간다. 그리고, 이 악순환을 계속 반복한다.

그 날도 그렇게 클럽에서 여자를 하나 끼고 나와, 택시를 잡으러 걸어가고 있었다. 벌써 이 여자의 화장품 냄새에 질려 내 차에 태워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얼굴이 약간 그 녀석과 닮은 것도 같아 어쨌든 호텔까지는 같이 갈 생각이었다. 술이 받지 않아 술로 녀석을 잊지 못하는 현실을 원망하며, 또렷한 정신으로 조금은 취한 여자를 데리고 어두운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가 눈에 띄었다.

여자를 한쪽에 버려둔 채, 벽에 다가가 포스터를 보았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한참 후에야 그 녀석의 밴드 이름인 걸 깨달았다. 어디 조그만 클럽 같은 곳에서 공연을 하나 보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밴드라, 본 공연을 하기 전 잠깐 나오는 건지, 이름도 참 조그맣게 적혀 있다. 그걸 알아본 내가 용할 정도다. 정말, 그 녀석의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나 보다. 갈지 말지 고민하는 머리와는 달리, 손은 이미 그 클럽 이름을 핸드폰에 저장하고 있다.

갑자기 여자에게 흥미를 잃어, 큰 길에 나와 택시를 태워 보냈다. 그리고 난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오랜만에 푹 잠들었다.








좁은 클럽 안에 사람이 별로 없다. 사람들 틈에 껴서 숨어 보려고 했던 계획은 이미 틀어졌다. 그래도 최대한 어두운 곳에 자리잡고, 무대에 앉아 기타를 튜닝하는 녀석을 본다.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약간 야윈 것도 같다. 혹시 날 그리워해 살이라도 좀 빠진 건가? 나도 몰래 그런 기대를 한다.

녀석의 전화번호가 있는데도 일부러 연락해 보지 않았다. 혹시 없는 번호라고 나올까 봐. 그러면 마음이 너무 쓰라릴 것 같아서. 아니면 녀석이 전화를 받았는데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을까 봐. 생각이 너무 많다는 지적을 종종 받곤 했는데,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수십 번 그 녀석과 헤어지고 차이고 했다. 그래서 그런 녀석을 실제로 보니, 뭔가 반가우면서도 벌써부터 두렵다.

준비가 됐는지 녀석의 밴드가 공연을 시작한다. 녀석이 뱀파이어라 뭔가 고스 록이나 메탈 쪽일 거라 생각한 내가 무색하게 감미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딱 어울리는 달콤한 노래를 부른다. 가사도 참 예쁘다. 어수선하고 관심조차 주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 둘 조용해진다. 날 홀렸던 것처럼, 그 예쁜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홀린다. 저 녀석은 뱀파이어가 아니라, 구미호인가 보다.

첫 곡이 끝나고, 나도 모르게 좀 더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번째 노래를 부르려 마이크를 조정하던 녀석과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순간, 둘 다 얼어붙었다. 녀석은 곧 정신을 차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계속 내 쪽을 본다. 두 번째 노래 역시 달콤하다. 노래를 자기가 쓴다고 했는데, 이 녀석은 사람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하는 가사를 참 잘 쓰는 것 같다. 세 번째 노래를 끝으로 밴드가 퇴장한다. 사람들이 진심을 담은 박수를 보낸다.

녀석을 기다릴까, 하다가 그냥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녀석이 날 봤으니까, 내가 자기를 보러 온 걸 알 테니까, 이제 그 녀석에게 달렸다. 날 보고 싶으면 어디로 와야하는지 아니까.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거지. 아니, 스스로에게라도 솔직해야지. 제발 오기를 빌고 있다.

그래서, 밤 늦은 시간, 초인종이 울렸을 때,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모순적인 감정을 추스르며 문을 열었다. 녀석이 앞에 서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셨어."

거짓말이다. 아니, 거짓말이길 빈다. 그래도, 저런 핑곗거리를 대서라도 날 보러 왔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녀석을 끌어당겨 가득 안고 입술을 찾았다. 오랜만에 안은 몸에 흔적들을 다시, 더 깊게 새겼다.

그날 밤, 녀석은 처음으로 내 품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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