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뭔가 데이트라고 하기는 애매한데,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그러고 보니, 데이트든 아니는, 누굴 이렇게 만나는 게 참 오랜만이다. 언제부턴가 연애란 게 귀찮아져서, 좀 쌓이면 하룻밤 상대를 찾아 처음 보는 여자와 자고, 다시 연락 안 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게 연애란 건 아니고.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는데.

사실 연락하는 것 자체도 꽤나 긴장됐다. 2주 넘게 몸을 섞었는데, 전화 하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스스로를 비웃으며 결국 톡을 보냈다. 생각보다 빨리 답이 왔다. 어디가 좋냐고 묻자, 아무데나 괜찮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도 되냐고 한다. 그래서, 그래, 너 편한 데서 만나자, 했더니 가게 이름 하나를 적어보냈다. 검색해 보니 웬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첫 데이트가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니. 아, 아니지, 이건 데이트가 아니니까. 그래도, 좀 황당했다.

너무 일찍 오는 게 좀 그래서, 왠지 내가 기대하고 있다는 게 너무 티날까 봐, 일부러 시간을 딱 맞춰 왔는데 이 녀석은 아직이다. 혹시 오지 않는 건 아닐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할 무렵, 녀석이 헐레벌떡 들어오는 게 보인다. 무려 30분 넘게 늦었다. 가게를 둘러보더니 내 쪽으로 빨리 걸어온다.

"아, 미안. 길을 잃었어."
"여기 네가 오자고 한 데잖아."

어디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이라 생각하는데 녀석이 그 특유의 난처한 웃음을 짓는다.

"내가 길치라... 여기 자주 오는데도 올 때마다 길 잃어."

설마 농담이겠지, 싶지만 녀석의 얼굴이 진지하다. 헐랭한데다 길치라니, 그게 너무 귀여워서 30분 넘게 기다린 것 때문에 난 짜증이 눈 녹듯 사라진다. 나도 딱히 정상은 아니다.

꽤 배고팠던 난 스테이크 하나를 주문했는데, 녀석은 샐러드 바만 주문한다. 내가 "더 안 시켜?" 물으니까 날 샐쭉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자기 채식주의자인 걸 잊었냐고 묻는다. 당연히 잊지 않았지. 채식주의자인 뱀파이어, 웃겨서라도 못 잊는다. 하지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나 보다. 내가 고기를 썰어 먹는 동안 샐러드만 몇 접시째 먹고 있다. 내 스테이크에서 흐르는 피를 최대한 보지 않으려 절대로 시선을 그 쪽으로 보내지 않는다. 피를 싫어하는 뱀파이어... 역사상 저 녀석이 처음일 거다.

저녁 내내 별다른 말 없이 먹기만 하던 둘은, 결국 레스토랑이 너무 시끄러워 식사를 마치자마자 나왔다. 이대로 곧장 집으로 가기 싫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31가지 맛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남자 둘이 가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한 번 물어볼까 싶어 녀석을 돌아보니 벌써 초롱초롱한 눈으로 가게 안을 보고 있다. 단 걸 좋아하나 보다.

결국, 약간의 쪽팔림을 무릅쓰고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으로, 녀석은 도전정신이 강한지 뭔가 특이하게 생긴 걸로. 그렇게 늦은 시간이라 꽤 한산한 가게 한쪽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그림 참... 웃기다.

그래도, 단 걸 먹으니 녀석이 기분이 꽤 좋아보인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너, 이름이 뭐야?"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에 넣으려던 녀석이 멈칫한다.

"왜, 말해줄 수 없어?"
"아..."
"뭐 지명수배자야? 아니면 유명 정치인의 숨겨진 아들이라던가?"

녀석이 황당한지 웃는다.

"아냐, 그런 거."
"그럼 비싸게 굴지 말고 그냥 얘기해 주지?"

녀석은 시간을 끌려는 듯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고 한참을 녹여먹는다.

"넌 어떨지 몰라도 난 네 이름 정도는 알고 싶거든? 같이 섹스하는 사이니까."

녀석이 갑자기 켁켁거린다. 이런 말에 면역이 전혀 없다. 몸을 섞으며 느낀 건, 이 녀석은 경험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것. 그래서 저런 말로 놀리기 딱 좋다.

내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계속 쳐다보자 녀석은 포기한 듯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정진영. 정진영이야."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신동우다. 알게 되서 반가워."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흔든다. 그런 표정도 귀엽다.

"나이는?"
"그게 중요해?"

녀석이 다시 반항한다. 순간 의심이 간다.

"너, 뭐 겉은 어린데 속은 40대 아저씨고 그런 거 아냐?"
"아, 아냐. 절대."
"너 뱀파이어잖아. 뱀파이어들은 늙지도 않는다는데."
"몇 번을 말해,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특이한 보통 사람이야."

그 말 자체가 모순적이다, 이 녀석아. 그래도, 결국 녀석은 나이를 말해 준다.

"27살."
"어? 나랑 동갑이네?"
"응?"

서로 놀란다.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난 나보다 한참 나이많은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서로 같이 말하고, 서로 황당해 한다.

"너 옷 입는 거 봐라, 누가 27살로 볼지."
"그러는 너야말로 입고 다니는 게 완전 아저씨야."
"난 회사원이잖아. 수트 입고 다니는 게 당연하지."
"나도 어울려서 이렇게 입고 다니는 거야."

뭐, 틀린 말은 아니라 딱히 반박할 수 없다. 늘 수트를 입는 나와는 달리, 녀석은 캐주얼한 점퍼에 티셔츠, 찢어진 청바지 차림일 때가 많다. 그래서 더 어리게 봤었다.

이름에 나이까지 밝힌 녀석은 이제 숨겨 뭐하겠냐는 식으로 다른 정보도 순순히 말해준다. 본인은 현재 인디밴드에서 리더를 맡고 있고, 기타도 치고 노래도 한다는 것,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얼마 전 일본여행을 갔을 때 맛붙인 낫토라는 것,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얘기한다.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나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캐묻는다. 녀석에 비하면 내 인생은 너무 재미가 없어서 별로 할 말이 없는데도, 녀석도 꽤나 궁금했나 보다. 내가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것, 직책은 대리이고 일은 그냥저냥 돈 벌려고 한다는 것, 부모님은 청주에 사시고 서울엔 혼자 올라와 있다는 것, 등등. 한 번 입을 여니 침대에서만큼 수다스럽다, 녀석이나 나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입술을 겹쳤을 때, 뭔가 조금은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좀 더 열린 마음에 감정이 더 흘러들어가서인지, 아니면 둘 사이에 그어놨던 선을 조금은 넘어서였는지, 전보다 좀 더 몸이 뜨거워지고, 좀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이건, 왠지, 좀, 위험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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