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녀석을 지그시 바라본다. 녀석의 셔츠가 내가 앞, 뒤로 남겨놓은 붉은 흔적들을 가린다. 한 번도 여자와 잘 땐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녀석의 하얀 몸을 보면 나도 모르게 깨물고, 핥고, 빨고, 하는 거다. 녀석이 내는, 억누르는 듯한 신음소리가 여자들의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섹시해서 그 소리를 더 내게 하려 더 괴롭힌다. 가끔 녀석이 "너야말로 뱀파이어 아냐?"라고 면박줄 만큼 녀석의 몸 구석 구석에 내 잇자국이 남아있다. 그 하얀 피부에 내가 남긴 흔적들이라는 사실이 날 더 흥분시킨다.

사실,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늘 지루하고 똑같았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저 녀석과의 만남,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진 시간들이. 첫날, 내 피가 맛이 없다고 하는 그를 보고 왠지 오기가 생겨, 얘가 뱀파이어든 뭐든 어디 한 번 해보자, 란 마음에 좀... 생각했던 것 이상을 해버렸다. 물론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첫날에는. 남자끼리 어떻게 하는 건지 솔직히 잘 몰랐으니까. 그래도, 둘 다 꽤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남자의 몸은 솔직해서 흥분한 사실을 숨길 수 없듯이, 그는 그 송곳니 때문에 더 숨길 수 없다. 그리고, 왠지 송곳니가 길게 나온 그는, 사람을 홀리는 색기를 흘려 이성을 반쯤 날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그 첫날, 내게 등 돌리고 옷을 입고 있는 녀석에게 내가 먼저 말했다. 다시 만나지 않겠냐고. 하룻밤 상대에게 먼저 그런 말을 꺼낸 것도 처음이었고, 그게 더더구나 남자라니, 내가 이 녀석에게 제대로 홀린 것 같다. 녀석은 잠시 망설이더니, 할아버지가 한국에 계신 한 달 동안 가끔 와도 되냐며 물었다. 그리고, 피를 '몇 모금' 제공해 줄 수 있냐고. 단어 선택이 왠지 웃겼지만,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또 만나고 싶었다.

그 날 이후로 녀석은 2, 3일에 한 번, 아니면 어떨 땐 이틀 연속으로 올 때도 있다. 두 번째 만남은 사흘 뒤였다. 서로 폰 번호도 교환하지 않았고,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녀석이 다시 올까, 아니면 그걸로 끝일까, 겉으로는 내색 안 했지만 속으로는 3일 동안 꽤나 애태웠다.

그래서, 3일째 되는 날 저녁, 야근하고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길, 문에 기대 서서 나를 기다리던 녀석을 보고 꽤나 반가웠다. 물론, 티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녀석의 입술을 찾았다. 그 하얀 몸에 다시 붉은 흔적을 남기고, 그가 흘리는 색기에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그 날은 끝까지, 제대로 안았다. 말하긴 부끄럽지만 미리 다 공부하고, 준비까지 해 놓고 있었고, 그도 꽤 솔직히 반응한 걸로 보아, 둘 다 꽤 기분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흥분한 때에 피를 빨아야 하기 때문에, 하다 중간에 따끔한 느낌과 함께 그의 입술이 느껴진다. 웃긴 건, 그의 얼굴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며 마치 쓰디쓴 한약을 먹듯이 내 피를 마신다. 누가 보면 억지로 먹이는 줄 알겠다. 그 '몇 모금'을 마시면 녀석은 왠지 기분이 가라앉는다. 무슨 뱀파이어 주제에 피를 이렇게 싫어하냐고.

한 번은 진짜 그렇게 맛없나, 싶어 그 피 묻은 입술을 핥아본 적이 있다. 그냥 피 맛이다. 그닥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싫어할 필요가 있나? 영화에서 보면 뱀파이어가 좋아하는 사람의 피는 맛있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러나? 하지만 녀석의 말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자기는 어떤 피든 다 싫단다. 괜히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이게 녀석의 또다른 모순적인 모습이다. 자신의 '돌연변이 유전자'나 '특이체질'에 대해서는 꽤나 솔직한 녀석이,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아직도 그 녀석의 이름도 모른다. 물론 내 이름도 묻지 않았다. 어디에 사는지, 학생인지, 아님 어디서 어떤 일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꺼려한다. 절정 후 둘 다 숨을 고르며 침대에 누워있을 때, 녀석에게 '특이체질'에 대해 물어보면 이것저것 잘 대답해 준다. 정작 자기 이름은 말 안해주면서.

어쨌든, 그렇게 여러 번 그와 만나며 알게 된 여러가지 사실들 중 하나는 생각보다 이런 '특이체질'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 솔직히 그가 첫날 집에서 나가자마자 뱀파이어에 관한 얘기를 검색하느라 밤을 새웠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런 얘기가 없었다. 다 약속이나 한 듯 뱀파이어는 살아 돌아온 시체이며,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마셔야 하고, 저주받은 존재이며, 마늘, 십자가 등을 무서워하고, 가슴에 나무못을 박고 머리를 잘라내고 태워버려야 죽일 수 있다는 얘기뿐이다. 사실, 그래서 더 그의 말을 믿게 되었다. 만약 지어낸 얘기라면 통상적인 내용을 조금이라도 보탤 것 같은데, 다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서.

그의 말에 의하면 세계 곳곳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가 전 세계를 여행하고 다니면서 꽤 만났다나. 하지만 인터넷 어디에도 이런 얘기를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이게 알려지면 오래, 병치레 없이 살고 싶어하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 같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실험하거나 연구를 할 테고, 혹시라도 이 연구에 성공해서 이 유전자를 복제해 낼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특이체질'이 되어 피가 필요하게 될 테니까, 보통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란다. 그런 것치고는 나한테는 너무 쉽게 얘기한 거 아니냐고 물으니까 뭐, 그때는 어쩔 수 없었지, 하고 얼버무린다. 가만 보니 이 녀석, 헐랭해서 자기도 모르게 다 불어버린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는지, 너무 쉽게도 이런 극비 내용을 내게 다 말해준다.

이 '돌연변이 유전자'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자기처럼 이런 체질인 걸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어떻게 하면 보통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에 관한 연구를 늘 해 왔다는 것. 그래서 유전자라는 게 처음 발견됐을 때, 그 쪽 사람들이 연구 끝에 이런 체질인 사람들의 유전자가 일반인 유전자와 다르다는 걸 밝혀냈고, 이 일종의 기형 유전자를 고치는 연구가 지금도 진행중이라는 것.

솔직히 이건 이해가 안 됐다. 자기 입으로 얘기했듯이, 일반인들이 이 유전자에 대해 알게 되면 다들 가지고 싶어서 난리가 날 텐데, 정작 이걸 가진 사람들은 없애고 싶어서 연구 중이라니, 모순적이다. 그리고 굳이 안 하고 싶다면 피를 마시지 않고 살면 되지 않나? 라고 물었더니 이 유전자가 강한 사람들은 진짜 영화에서 나오는 뱀파이어들처럼 피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고, 그래서 싫어도 마셔야 한다고 했다. 자기 할아버지가 그렇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 얘기는 다 해주면서, 왜 자기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으려는 건지 모르겠다. 한 달이면 끝날 관계라서 그런가? 아니, 그건 그렇고, 우리 관계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거지? 섹스를 하지만 연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친구라고 하기엔 내가 저 녀석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녀석의 외할아버지를 빼면, 저 녀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 한 명 뿐이다. 그리고, 난 매번 저 녀석에게 내 피를 '몇 모금'씩 제공하고 있다. 그럼 저 녀석은 날 그냥 먹이로 생각해서 자기 얘기를 안 해주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나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마치, 한 달 후에는 칼로 잘라내듯 끊어낼 준비를 미리부터 하고 있는 듯이.

그게 화가 난다. 물론 특이체질이며 기형 유전자며, 재밌는 얘기다. 영화를 특히 좋아하는 내게는, 마치 내가 판타지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흥미롭고 재밌다. 하지만, 난 저 녀석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은데,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니 서운하고, 이제 화가 나는 거다. 이것 역시 모순적이다. 전에 만났던 여자들이 아무리 나에 대해 알고 싶어해도 잘 얘기해 준 적이 없다. 나 역시 그녀들에 대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하룻밤 같이 보내고, 마치 연인이라도 된 양 행동하는 여자들이 싫어서 이름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호텔방을 나서곤 했다. 그런 내가 이렇게 저 녀석에 대해 알고 싶어서 안달이라니, 이런 내가 우습다.

조금 전 침대에서의 흐트러진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녀석은 옷매무새를 고친 후에 머리를 단정히 매만진다. 내 시선이 분명히 느껴질 텐데, 일부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내 쪽을 보지 않는다. 침대에서는 꽤나 솔직하고, 귀엽고, 섹시하고, 수다스러운 녀석이 침대를 벗어나면 입을 꾹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 괴리감의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

샤워라도 하고 간다면 샤워부스에 쳐들어가 침대 밖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한 번 실험해 보고 싶지만, 샤워를 하지 않고 바로 간다. 피 냄새를 최대한 남기기 위해 그래야 한단다. 어차피 피도 조금밖에 안 마셨는데, 그 몇 모금으로 어떻게 피 냄새가 나냐고 물었더니, 자기 할아버지는 그 '돌연변이 유전자'가 강해서, 피에 관해서는 굉장히 민감하단다. 피 냄새를 풍겨야 집에 들어오게 해주는 할아버지라니, 진짜 특이한 집안이다.

나갈 준비를 마친 녀석이 나를 돌아본다.

"그럼 가볼게."

다른 때 같았으면 "그래"라고 대답하고, 녀석은 집에 가고, 난 샤워를 하러 갔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여러가지 감정들이 뒤섞이고 있다. 이렇게 만난 지 2주가 넘었다. 녀석과 몸을 섞은 게 거의 열 번이다. 그런데도 아직 이름을 모르다니, 이 상황이 저 녀석이 뱀파이어인 것보다 더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나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이 다 벗고 있는 날 보며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얼굴이 붉어진다. 방금 침대에서 할 거 다하고 볼 거 다 봤으면서, 이럴 땐 왜 부끄러워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게 귀엽다.

녀석의 얼굴을 손으로 잡아 내 쪽으로 향하게 한다. 날 올려보는 눈동자를 내려본다. 내가 뭘 하려고 한 거지? 왜 그냥 보내지 않은 거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뱉었다.

"내일, 저녁 같이 먹을래?"

녀석의 눈이 놀란 듯 커진다. 잠시 둘 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서로의 눈빛 속에서 뭐라도 읽어내려는 듯이. 그리고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말을 꺼낸 내가 놀랐다. 거절할 줄 알았다. 하지만 녀석은 내 책상 쪽으로 가더니 포스트잇에 뭔가를 적었다.

"전화 줘."

그 말을 남기고 그가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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