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뜬 눈 앞에 뭔가 하얀 게 흐릿하게 보인다.

"정신이 들어?"

눈을 몇 번 깜박여 초점을 맞춘다. 나를 내려보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으악!"

나도 모르게 그를 밀쳐내며 일어나 앉았다. 그 역시 놀랐는지 무릎걸음으로 뒷걸음질친다. 급하게 주워 입었는지, 내가 아까 벗어놓은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몇 개만 잠그고 있어서 열린 깃 사이로 아까 내가 남긴 흔적이 얼핏 보여 매혹적이다. 아니, 정신을 차리자.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아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뭔가 벌어지긴 했는지, 알아야 한다.

"너, 너 뭐야? 정체가 뭐야?"
"아..."

그가 난처한 웃음을 짓는다. 혹시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싶어 목에 손을 대 보지만, 두 개의 작은 홈 같은 상처가 손끝에 느껴진다. 꿈이 아니었다.

"너, 무슨, 뱀... 뱀파이어 같은 거야?"

내가 말을 하면서도 내가 이런 말을 내뱉고 있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21세기에, 이 현대사회에, 뱀파이어가 웬 말이냔 말이다. 하지만, 아까 그 장면이 너무 생생해서, 그 피 묻은 입술과 긴 송곳니가 뇌리에 박혀서, 떠나질 않는다.

"그건 아니지만... 그 비슷한 거?"

여전히 짓고 있는 난처한 웃음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난 무교라 집에 십자가 비슷한 것도 없을 텐데. 마늘이 집에 있던가? 그동안 봤던 모든 뱀파이어에 관련된 영화를 떠올리며 내 앞의 이 존재를 퇴치할 방법을 고민한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내가 미쳤거나, 꿈을 꾸고 있거나, 환각 상태에 빠진 것일 거라며 내 자신을 설득한다. 한편으로는 내가 미쳤길 바라고, 한편으로는 내가 미쳤을까 봐 걱정된다. 모순적이다.

내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모습에 그는 살짝 가까이 다가온다.

"가, 가까이 오지마!"

내가 흠칫 놀라며 소리치자 그 자리에 멈춘다.

"미안해, 놀라게 해서. 내가 아까 말 할까, 고민하긴 했는데, 얘기해도 안 믿을 것 같고, 괜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도대체 뭘 얘기한다는 거야? 방금 일어난 일과는 상관없이 너무나 침착한 저 녀석 때문에 내가 지금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잖아.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도대체 뭐야? 인간이야, 아님 흡혈귀야?"
"그냥 보통 사람이야. 정말로. 그냥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보통 사람."
"아까 그... 이빨... 그..."
"응. 그거야, 바로. 기형 유전자. 아님, 특이체질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내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며 녀석은 한숨을 내쉰다.

"그냥, 내 설명을 좀 들어줘. 응?"

이 상황에서 내가 다른 뭔가를 할 수 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아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돌연변이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데, 이게 피를 소화해서 그 생체에너지를 흡수해 수명을 연장할 수 있게 해줘."

설명이 더 어렵다. 내가 이해를 못 하는 듯 싶자 녀석이 덧붙인다.

"피를 마시면 그 피에서 생명력,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흡수할 수 있어. 그렇게 생명력을 흡수해서 병치레 없이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는 거고. 내 조상들 중에는 몇 백년씩 산 사람들도 있었대. 하지만 대를 이어오며 그 유전자가 많이 약해졌고, 나 역시 그 유전자가 약해서, 내 마음대로 송곳니를 나오게 할 수가 없어. 몸 안이 뜨거워져야만 나와. 그래서, 그... 흥분...해야 되서, 너를... 그... 유혹한거야. 아까 이걸 다 설명할까, 생각은 했는데, 누가 이런 얘기를 믿어주겠어?"

그래, 누가 이런 얘기를 믿어줄까? 어디 삼류 판타지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하고 싶지만, 아까 본 게 있어서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녀석은 너무 침착하게, 오늘 날씨 얘기를 하듯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더 믿기고, 그래서 더 안 믿긴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게다가 난 채식주의자라, 피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잠깐만, 너 채식주의자야?"

피를 빠는 뱀파이어가 채식주의자라니,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응. 빨간 피가 보이는 건 다 안 먹어."

이제 머리가 지끈거린다. 누가 제발 날 이 허접한 꿈에서 깨워줬으면 좋겠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피를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갑자기 힘이 빠져, 조금은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녀석은 내가 진정된 거라 생각하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바로 앞에 앉는다.

"며칠 전 외할아버지가 한국에 돌아오셨어."

이건 또 뜬금없이 무슨 얘기야.

"얼마 전,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이제 우리 가족 중에 남은 사람은 외할아버지와 나, 단 둘 뿐인데, 할아버지가 내가 피를 안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 엄청 화내셨어."
"도대체 왜?"

이제 무슨 얘길 들어도 놀랍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놀랐다.

"이 유전자를 어머니 집안 쪽에서 이어받았는데, 그래서 외할아버지는 아직도 엄청 젊고 건강하신데, 내가 피를 안 마셔서 보통 사람처럼 나이가 들고 있으니까 그거 때문에 화가 나신 거지. 피를 마셔야 오래 살 수 있으니까. 외할머니도 보통 사람이어서 오래 전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내가 보통 사람만큼만 살게 되면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을 테니까. 이제, 나까지 죽으면 할아버지는 혼자 남게 되니까."

잠깐, 뭔가 이해가 안 간다.

"너네 그 돌연변인가 뭔가 하는 유전자가 있으면 병에 안 걸린다며? 어머니가 왜 병에 걸려 돌아가셨어?"

녀석이 잠시 멈칫한다.

"그 유전자 때문에 병에 안 걸리는게 아니라, 그거 덕분에 피를 소화하고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어서 아프지 않게 되는 거야. 어머니는 나처럼 피를 안 마셨으니까, 병에 걸리신 거고."

이 녀석이 하는 이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말이 된다는 사실이 더 무섭다. 녀석이 서둘러 말을 이어간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한테 피냄새 풍기며 들어오지 않을 거면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쫓아내셔서, 어쩔 수 없이 나왔는데, 송곳니를 나오게 하지 못하니까... 송곳니가 나와야 거기서 나오는 소화액으로 피를 소화시킬 수 있는데, 그게 없으면 피를 마셔봐야 소용 없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면서 길을 걷고 있는데, 널 봤어. 그래서 무작정 말을 걸었고."
"왜 나였는데?"

이 와중에도 나라는 사람은 내가 마음에 들어서, 혹은 잘생겨서, 혹은 취향이라서, 라는 답을 듣길 원했나보다.

"네가 피가 제일 많아보여서..."

저런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그럼 네 계획은 날 유혹해서, 내 피를 다 마시고, 날 죽이는 거였어?"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이 상황에, 이 순간에, 저 녀석이 황당해 하니까 이제 짜증이 난다.

"그럼 뭐야?"
"사람 몸에 피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어떻게 다 마셔? 그냥 몇 모금만 마셔서 할아버지께 피를 마셨다는 걸 보여드리려고 한 건데. 넌 피도 많아 보이니까, 내가 몇 모금 정도 마셔도 별로 영향받지 않을 것 같아서."

사람 피의 양을 몇 모금으로 재고 있다. 이 상황에서 웃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아니면 멍이 들도록 팔다리를 꼬집어서라도 이 꿈에서 깨어나려 발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 중요한 건,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거다.

"꺼내 봐."
"뭘?"
"네 이빨 말야. 꺼내 봐. 내 눈으로 직접, 제대로 확인해야 겠어."

내 말에 녀석이 당황한다.

"방금 한 얘기 못 들었어? 내 맘대로 나오게 할 수 없다니까."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휘몰아친다. 저 녀석은 뱀파이어다, 아니, 내가 미친거다, 아니, 저 녀석 말대로 돌연변이인 건가? 아니, 이건 꿈이다, 아니, 내가 아까 클럽에서 뭘 잘못 먹고 환각을 보고 있는 거다. 녀석에게 들은 얘기가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전혀 안 된다. 오히려, 내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런 혼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지금, 뭔가 확실하게 설 수 있는 발판이 필요하다. 그게 저 녀석의 송곳니이다. 그걸 제대로 내 눈으로 보면, 뭐라도 확신이 생기면, 이 혼란이 조금은 잠재워질 것이다. 그래서, 속으로는 이 이상한 존재가 무서웠는데도, 이건 영 아니다 싶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녀석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럼, 내가 협조해 줄게."

셔츠를 양손으로 잡아 뜯었다. 단추가 튿어져 날아갔다. 셔츠를 벗기고, 녀석을 밀어눕혔다. 아까와 같은 자세인데, 아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녀석이 아까보다 더 당황한다.

"뭐, 뭐하는 거야?"
"도와준다니까."

한 손으로는 일어나려는 녀석의 가슴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훑으며, 아까처럼 그의 목에 입술을 댔다. 손 아래 느껴지는 떨고 있는 몸이 따뜻하고, 깨물면 자국이 남고, 세게 빨아당기면 빨간 꽃이 핀다. 시체가 이럴 순 없다. 흡혈귀는 결국 죽은 시체가 살아 돌아다니는 거니까, 그러니까 이 녀석은 흡혈귀는 아니다. 조금은 거친 손길로 녀석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을 어루만졌다. 내가 본 영화에서 흡혈귀는 몸이 총알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했고, 차가웠다. 그러니까 그런 이유에서도 이 녀석은 흡혈귀가 아니다.

머릿속으로 나 혼자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고 나니 좀 더 대담해졌다. 녀석도 별다른 저항이 없다. 아까 내가 흔적을 남겼던 쇄골을 다시 깨물었다. 신음소리를 낸다. 역시 민감한 곳이다. 혀로 핥고, 살짝 빨았다. 아까처럼 달뜬 숨소리를 낸다. 얼굴을 들어 녀석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쳐다보았다. 열린 입술 사이로 아까와 같이 긴 송곳니가 보인다. 꿈이 아니었다. 상상도 아니었다. 혹시 가짜인가 싶어, 손가락으로 송곳니의 끝을 만져보았다. 따끔하게 찔린 느낌에 이어 피가 흐른다. 내 피가 흘러 녀석의 입 속에 떨어졌다.

"윽, 진짜 맛없어."

내 피 맛을 본 녀석의 감상평이다. 내 피가 맛이 없다는 뱀파이어라니, 이걸 좋아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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