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무료하고 따분한 일상. 쳇바퀴 돌 듯 똑같은 하루가 계속 반복된다. 마치 타임루프에 빠진 것처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시간에 회사에 가고, 똑같은 시간에 퇴근해 집에 와 똑같은 시간에 잠든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는데, 갑자기 그 따분함이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였다. 그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오랜만에 친구들과 간 클럽. 이제 클럽에서 밤새며 놀 나이는 아니다. 그냥, 연애하는 건 귀찮은데, 간만에 여자가 그리워 하룻밤 상대를 만나기 위해 간 거였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하는 나라, 친구들 사이에서 안주만 축내고 있었다. 어차피 내게 술을 먹여봤자 나중에 고생하는 건 날 수습해야 되는 본인들이라는 걸 잘 아는 친구들은, 그런 날 내버려두고 자기들끼리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하룻밤 상대라도 기준이라는 게 있는데, 부킹 들어오는 여자애들은 다 영 취향이 아니고, 다들 취해가는데 나만 혼자 멀쩡한 이 상황도 별로고, 해서 그냥 일어섰다. 차라리 어디 조용한 바에나 가서 버진 칵테일을 마시며 오늘 밤 상대를 물색해볼까, 생각하며 클럽 앞에서 내 차를 가져오길 기다리는데, 불쑥 하얀 손이 내 팔을 잡아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손의 주인은 정갈한 하얀 얼굴의 웬 남자였다.

"너, 나랑 잘래?"

정갈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 예쁜 입술에서 나온다. 단 한번도 남자와 그래본 적이 없다. 아니,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늘 똑같은 일상에 질렸던 터라, 뭔가 일상에서 벗어나 미친 짓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남자인 걸 빼면 꽤 내 취향인 얼굴.

"좋아."

내 대답에 놀라는 눈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자기면서.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옆으로 흘깃거리며 관찰을 했다. 피부가 하얗다. 선이 곱다. 얼굴은 약간 고양이상이다. 점퍼의 깃 사이로 보이는 목이 가늘고 길다. 체격은 작은 편이 아니지만, 보통 사람보다 덩치가 큰 나보다는 작다. 그리고, 먼저 유혹을 한 것 치고는 긴장한 게 눈에 보인다.

그래서였을까. 단 한 번도, 하룻밤 상대는 집으로 데려간 적이 없었는데, 원래 가려고 생각했던 호텔이 아니라 집으로 왔다. 이왕 미치는 거, 제대로 미쳐보자, 란 생각이었던 듯도 싶다.

문을 열고 들어가 뒤따라오는 그를 닫히고 있는 문에 밀치고 입술을 찾았다. 약간은 거칠게 입술을 가르고 입 안을 헤집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그는 이런 것에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고, 내 혀를 받아들이는 게 서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유혹한 거지?

사기꾼? 아니면 착하게 사는 것에 지쳐 일탈을 꿈꾸는 곱게 자란 도련님? 뭐지, 이 녀석은?

입술을 떼고 녀석을 잠시 응시한다. 숨을 몰아쉬고 있다. 살짝 벌린 입술이 섹시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를 놓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당황한 그는 곧 뒤따라 들어왔다. 자켓을 벗어 소파 위에 던져놓고, 넥타이를 끌러 그 옆에 떨긴다. 스튜디오 아파트 한쪽에 놓인 침대에 앉아 셔츠의 단추를 세 개쯤 풀렀다.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그는 얼어붙었는지 한쪽에 서 있기만 한다.

"이리 와."

방금 한 키스에 놀랐는지 아직도 멍한 것 같다.

"자자고 한 건 너잖아. 이리 와."

내 말에 정신을 차린 건지 녀석이 내 쪽으로 걸어온다. 손이 닿을 거리까지 왔을 때, 잡아끌어 침대 위에 앉혔다. 녀석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기고, 그 안에 입은 티셔츠도 단번에 벗긴다. 다시 당황한 게 눈에 보인다. 하얀 얼굴이 불게 물든다. 하얀 피부가 너무 매혹적이다. 제대로 맛 보고 싶다.

그의 찢어진 청바지 단추에 손을 대려는데, 그가 눈에 보이게 떨고 있다. 먼저 유혹한 건 자기면서 이렇게 떨면 어쩌자는 거지? 마치 강제로 하는 것 같아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다. 어깨를 으쓱하고 침대에서 일어난다. 녀석이 더 당황해서 내 손을 잡는다. 내가 내려보자 무릎으로 서서 서툴게 입을 맞춰온다. 아까의 당돌한 말에 비해 너무 서툰 키스라 슬쩍 웃음이 난다.

이제 떨지 않는다. 아니, 떨지 않으려 노력한다. 내가 옷을 다 벗기고, 내 옷도 다 벗을 동안에 얕은 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는 것 같다. 왜 이리 무리하나 싶지만, 여기서 그만둘 생각은 없다. 다 벗기고, 남자인 걸 확인하면 식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몸이 더 뜨거워진다.

그를 침대에 제대로 눕히고 잠시 내려다 본다. 남자와는 한 번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다. 이런 걸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하지만, 흥분하는 건 남자나 여자나 별반 다르지 않겠지, 싶어 다시 입술을 겹친다. 아까, 시험해 보려 한 거친 키스가 아니라, 천천히, 입술을, 혀를, 입 안을, 치열을 훑는다. 경직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게 느껴진다. 그의 정체가 뭔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의구심과는 별개로 손은 이미 그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다.

입술을 옮겨 아까부터 맛보고 싶었던 귀 밑의 부드러운 살을 살짝 깨물었다. 그가 놀랐는지 "아", 하는 신음소리를 내는데, 그것마저 흥분된다. 입술을 천천히, 음미하듯 목에서 어깨선까지 움직인다. 민감한 듯 내가 키스하는 곳마다 반응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빨간 흔적을 남긴다. 하얀 피부 위에 붉은 꽃이 연달아 핀다. 얼굴을 좀 더 밑으로 내려 쇄골을 핥자, 이번엔 아까와 같은 아파서 내는 신음이 아닌, 좀 다른 신음소리를 들려준다. 느끼고 있다. 그가 느끼는 부분을 이번엔 세게 빨아들였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살짝 떨린다. 좀 더 세게 빨고, 깨물었다. 그의 달뜬 숨소리가 들린다. 그가 얼굴을 들어 내 목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뭔가 따가웠다.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윽, 맛없어."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그가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 고개를 들어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얼굴 때문에 입술에 묻은 붉은 피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사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긴 송곳니 두 개가 보인다. 손을 들어 목과 어깨의 경계선, 아까 따가웠던 자리를 만졌다. 손을 떼자 새빨간 게 묻어난다. 피다. 손에 묻은 피와, 녀석의 피묻은 입술과 아직도 보이는 송곳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내 27년 생에 처음으로,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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