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동우가 말했다.

"나도 좋아해."

진영이 말했다.

"그럼 우리 사귀자."
"그래."

동우와 진영이 손을 잡았다.

**********************************

"너 지금 이걸 뭐라고 쓴 거냐?"
"왜, 별로야?"
"초딩도 이거보단 잘 쓰겠다."
"히잉, 그 정도야?"

홍빈은 찬식의 랩탑을 탁, 하고 닫았다. 홍빈이 자신의 책상 의자에 앉아 있어서 옆 침대에 앉아 같이 읽던 찬식은 기겁한다.

"으악, 뭐야, 너! 그거 저장도 안 했는데."
"할 필요도 없어. 이거 내면 당장 F야."
"그렇게 아니야?"
"완전, 진짜, 정말, 최악. 이걸 읽은 내 눈을 뽑아버리고 싶어."
"으아... 나 어떡하냐."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포즈로 찬식이 머리를 쥐어뜯는다. 홍빈은 그 와중에 궁금하다.

"그런데 이 이름들은 어디서 나왔냐?"
"나 알바하는 삼겹살 집 사장님하고 사장님 친구."
"다 갖다 쓰는구나."
"네가 아는 사람들 이름 쓰랬잖아."
"그렇다고 이렇게 막 갖다 써도 돼?"
"어차피 둘 다 모를 텐데, 뭐."
"그럼 차라리 이름 갖다 쓰는 거, 캐릭터 이런 거도 갖다 써. 이 얘기는 설정이 아무것도 없잖아. 뜬금없이 둘이 서로 좋아한다고 하고 있고, 둘 다 뭐하는 사람인지, 무슨 상황인지도 안 나오고."
"그런 것도 다 써야 돼?"
"하... 원래 그런 게 더 중요한 거야."

찬식이 이제는 거의 존경의 눈길로 홍빈을 본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거의 무슨 전문가 수준이야."
"뭐, 그 정도까지는..."

괜히 겸손한 척한다. 그런 홍빈이 부럽다.

"하... 나 어떡하면 좋아..."
"우선 스토리를 정하고 쓰기 시작하라고."
"내가 그럴 재주가 있으면 이러고 있겠냐?"
"그러니까, 현실에서 이런 설정, 저런 설정 갖다 쓰라고, 넌 상상력이 쥐똥만큼도 없으니까."
"이씨, 계속 잘난 척이야."

찬식은 짜증이 나지만 그래도 물에 빠진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아본다.

"어떤 설정을 갖다 쓰면 돼?"
"너네 사장님하고 이 사람 무슨 사인데?"
"왜, 너도 이름 알 걸? 정진영."
"응? 어디서 들어봤는데."
"왜, 작년에 히트친 사극에서, 그 짝사랑하다 죽은 사람."

얼핏 기억이 난다.

"아, 알아. 와, 너네 가게에 연예인도 와?"
"사장님하고 둘이 어릴 때부터 친군가 봐. 얘기 들어보니까 정진영이 가게에 투자도 한 것 같고. 그래서 다른 연예인들 데리고 오기도 하고, 아니면 혼자 와서 사장님이랑 같이 밥 먹고 가고."
"야, 스토리가 딱 나오네. 둘이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가, 서로 좋아하게 됐는데, 한 명이 연예인이 되니까 이걸 숨겨야 되서 몰래 연애하는 그런 스토리."

찬식이 의심의 눈초리로 홍빈을 본다.

"뭐냐, 그 눈은?"
"아무리 생각해도 넌 이런 걸 너무 잘 알아. 너 뭐야, 진짜?"

말을 너무 많이 해버렸다. 홍빈은 입을 연 게 후회가 된다. 그래서 괜히 짜증을 낸다.

"이게 사람이 도와주려고 그러는데 자꾸 딴 소리야."
"이상하잖아. 너 진짜 무슨 전문가야?"

계속되는 찬식의 의심과 추궁에 결국, 홍빈은 슬픈 과거사를 털어놓는다.

"아이씨, 내가 말 안하려고 했는데... 나 누나 만화책 읽은 거 누나들이 알아버려서, 그 후에 나 잡아다 놓고 적나라한 만화 보여주고 소설책 읽어주면서, '남자들은 진짜 그래?' '남자들은 정말 저렇게 느껴?' 막 이딴 거 매일 묻고, 하... 평생 몰라도 될 걸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이 알아버렸어. 그래서 잘 아는 거다. 이제 됐냐?"
"너도 참... 힘들게 살았구나."

가짜 눈물을 훔치는 홍빈을 토닥여 주던 찬식이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홍빈의 등을 세게 때린다.

"아, 아파, 뭐야?"
"야, 너 이런 거 잘 하니까 제발 내 것도 써주라."
"뭐? 내가 왜?"
"어우 야, 나 이거 망하면 진짜 학고 날라온다니까. 제발 좀 써주라. 이렇게 부탁할게."
"아, 싫어. 내 거도 지금 손발 오그라드는 거 참으면서 쓰고 있거든?"
"빈아~ 제발. 응? 나 좀 한 번 살려주라."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린다. 오글거리는 건 죽어도 싫어하는 홍빈은 소름이 돋는다.

"아오, 이거 놔."
"치. 사람이 이렇게 부탁하는데, 친구가 돼서 그것도 못 해줘?"
"그럼 넌 나한테 뭐 해줄 건데?"

말만 잘하면 골치아픈 과제를 떠넘길 수 있다는 생각에 찬식의 얼굴이 밝아진다.

"뭐 원하는데?"
"우선..."
"뭐야, 하나가 아냐?"
"너 혼자 알아서 잘 써라, 그럼."
"아냐, 아냐. 뭔데, 다 말해봐."

홍빈은 알아서 기는 찬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우선, 나 너네 가게 알바자리 좀 알아봐 줘. 나도 연예인 구경 좀 해 보자."
"지금은 자리 없을 텐데..."
"싫음 말고."
"아냐, 아냐. 내가 사장님께 잘 말해볼게. 그리고 또 뭐?"
"그리고...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게 좀 막혀서 그러는데, 너가 나 좀 도와줘."
"응? 내가 뭘 도와줘. 네 말대로 글도 초딩같이 쓰고 상상력은 쥐똥만큼도 없는데."

뒤끝있다. 괜히 A형이 아니다.

"내가 뭐 좀 실험을 해야 되거든. 네가 내 모르모트 좀 해라."
"모... 뭐? 그게 뭔데."
"실험쥐."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데?"

홍빈의 눈빛엔 장난기가 가득하다. 왠지 오케이 하면 후회할 것 같은데, 그래도 학사경고가 더 무섭다.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냐."
"그래, 그럼 시작하자."

홍빈은 갑자기 찬식을 뒤로 밀친다. 찬식은 침대에 누운 꼴이 됐다.

"뭐, 뭐하는 거야?"
"실험."

홍빈은 찬식의 양팔을 하나씩 잡아 머리 양옆으로 올려 잡아 누른다. 찬식은 기겁한다.

"으아, 무슨 실험을 이렇게 해?"
"내가 지금 과거 얘기를 쓰고 있거든. 둘이 어떻게 처음 사귀게 됐는지. 스토리 안에서 이홍빈이 공찬식을 이렇게 눕혀서 첫 키스를 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막혀 있었거든. 네 도움 좀 받자."
"으아, 너 그런 거까지 쓸 거야?"

당연히 아니다. 아무리 A 학점이 탐나도 평생 손발이 오그라든 채 살 마음은 없으니까. 그런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쓰기 싫다. 그냥 이 강아지 같은 녀석에게 장난 좀 치려는 거다. 찬식은 진짜 놀리기 딱 좋은 스타일이다.

"야, 여자들은 그런 얘기가 들어가야 좋아해. 나도 이번 학기 좀 위험해서 여기서 무조건 A 받아야 한단 말야. 그래서 조교가 좋아할 만한 건 다 때려 넣으려고."
"진짜? 너 제대로 맘먹었구나."

이 봐, 이렇게 쉽게 넘어오니까 장난칠 마음이 생기는 거다. 홍빈은 그냥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지만, 이왕 시작한 거, 제대로 놀려보기로 한다.

"그러니까, 이런 상태에서, 내가 너한테 다가가면 넌 꼼짝도 못 하잖아."
"그런데 다리는 자유로우니까, 발로 차버리면 될 거 같은데."

이 와중에 또 같이 고민해주고 있다.

"그런가? 그럼 다리도 못 움직이게 하면 되지."

홍빈은 아예 찬식 위에 올라타 양다리를 본인 다리로 결박한다.

"자, 이제 전혀 못 움직이지?"
"응. 꼼짝도 못 하겠어. 이제 됐지? 무거우니까 비켜."

그런데... 이런 포즈로 위에서 찬식을 내려다 보는데 뭔가 기분이 묘하다. 분명히 장난이었는데, 이건 뭐지? 어릴 때 억지로 보고 읽었던 만화책들과 소설들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마구 떠오른다. 폭력적인 게임을 많이 하면 사람이 폭력적으로 변한다던데, 그 비슷한 건가? 홍빈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올려보고 있는 찬식의 입술을 덮쳤다.

"윽, 어우, 으..."

처음엔 그냥 눕혀서 잠깐 놀리려고 했고, 그 다음엔 몸을 결박한 다음 풀어주려 했고, 막상 이런 자세로 있으니 잠깐 뽀뽀나 한 번 해주고 풀어줘야지, 했는데, 입술이 닿으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결국, 꾹 다문 입술을 혀로 가르고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어 입 안을 훑었다. 아, 이거 진짜 위험한데?

결국, 너무 놀라 가만히 당하다가 숨이 막혀 갑자기 저항하는 찬식에 놀라 홍빈은 입술을 떼고 일어났다. 약간 눈물이 맺힌 찬식이 노려보는데, 아,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부터 짝짝이 눈까지, 갑자기 섹시해 보인다. 이홍빈, 과제 때문에 미친놈들 얘기를 쓰다가 본인까지 미쳐버렸나 보다.

"이씨, 너 당장 안 비켜?"

순순히 일어나 준다. 찬식이 저려오는 팔목을 주무른다.

"무슨 실험을 그 따위로 하는데!"

생각할수록 열받은 찬식이 결국 소리지른다. 홍빈은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찬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미안, 미안. 덕분에 좋은 데이터를 얻었다."
"데... 뭐?"

아... 평소엔 무식하다고 생각했던 찬식의 백치미까지 이제 귀여워 보인다. 정말 미쳤나 보다.

"데이터. 자료. 하... 어쨌든, 덕분에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너, 내 거도 써 주기로 한 거 잊지 마."
"걱정 마, 완전 제대로 A+짜리로 써 줄게."
"정말이지?"

단순한 녀석. 방금 자기가 뭘 당했는지 까먹었나 보다, 이렇게 바로 풀리는 걸 보니. 이거, 이거, 실험을 좀 더 해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생각하며 미소 짓는 홍빈의 얼굴이 왠지 사악해 보인다. 물론, 등 뒤의 찬식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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