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 안에 핀조명이 눈부시다. 좁은 방 안에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전부다. 한쪽 의자엔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남자가 무료한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문이 열리고 다른 남자가 들어온다. 테이블 위에 랩탑과 파일을 놓고, 남자 앞에 앉는다. 앉아 있던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이다, 이홍빈."

홍빈은 잠시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응시한다.

"그래. 오랜만이다, 공찬식."
"이게 얼마만이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니까, 10년쯤 됐나?"

찬식의 말을 무시하며 홍빈은 랩탑을 연다.

"피곤하니 빨리 끝내자. 이름."
"고등학교 때는 꽤나 친했는데 말이지. 10년 동안이나 못 보고 지내서, 많이 보고 싶었어. 다시 보니까 좋다."

홍빈은 찬식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본다. 그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난 이렇게 만난 게 참 유감스러운데, 공찬식."
"왜?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 좋잖아?"
"고등학교 동창이 연쇄살인마가 되어 만나게 됐는데,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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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왜 내가 연쇄살인마야?"

홍빈의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던 찬식이 발끈한다.

"당연히 내가 주인공이니까 네가 연쇄살인마 해야지."
"아니, 그러니까 왜 내 이름을 쓰는 거냐고!"
"생각나는 이름이 네 이름밖에 없어서 그랬다. 왜, 이름 좀 빌려쓰면 안 되냐?"
"그래도 왜 연쇄살인마가 나냐고!"
"아오, 내가 주인공이라서 그렇다니까."

찬식은 잠시 홍빈을 노려본다.

"그럼 나 주인공 시켜줘. 네가 살인마 하고 나 형사 시켜주면 되잖아."
"안 돼."
"왜?"
"이름 바꾸기 귀찮아."
"우이씨. 안 읽어."

토라진 찬식이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려 한다. 옆에 서서 같이 랩탑 모니터를 보던 홍빈이 찬식을 다시 앉힌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내일 점심 맛있는 거 쏠게."
"이번엔 진짜지? 지난번처럼 학식이기만 해 봐."
"시간도 없는데 그럼 어디 가게?"
"그럼 점심 말고 저녁에 제대로 쏴. 곱창으로."
"그래, 알았다, 됐냐?"

찬식은 마음이 풀렸는지 다시 읽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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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마란 말에 찬식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미소짓는 얼굴이 왠지 더 싸늘해 보인다.

"그래도 그 덕분에 너 다시 보게 되니까, 난 좋은데?"

홍빈은 찬식의 말투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척을 한다. 홍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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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연쇄살인마에 미친놈이기까지 한 거야?"
"야, 미쳤으니까 연쇄살인을 하지."
"아, 그런가?"
"정신 멀쩡한 사람이 사람 죽이고 다니겠냐?"
"하긴..."
"자꾸 토달지 말고 좀 진득하게 읽어봐."
"이씨. 읽어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자꾸 짜증이야."
"알았어. 제대로 잘 읽어주면 곱창에 소주까지 쏜다."
"진짜지, 너?"
"속고만 살았냐?"

내일 저녁엔 아주 거덜낼 정도로 먹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찬식은 계속 이야기를 읽어내려간다.







'한국문학의 이해 1'은 모두가 아는 대로 최고의 교양수업이었다. 늙은 교수님은 학생이 수업을 오든 말든 출석체크도 안 하고, 수업도 대충 하고, 시험도 대충 내고, 제대로 채점도 하지 않고, 나중에 다 몰아서 A를 주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수강신청 때가 되면 2, 3초 안에 마감될 정도였다. 1학년 1학기부터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홍빈과 찬식은 나름 성격도, 취미도 맞아, 2학기에는 방을 같이 쓸 뿐만 아니라 교양수업도 같이 듣기로 했었다. 둘 다 손이 빨라 이 피터지는 수강신청에서 승리해, 수업에 들어갔다. 둘 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간고사 기간이 지나고, 늙은 교수님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류머티즘으로 수업에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됐다. 너무 어중간하게 남은 수업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른 교수들도, 심지어 시간강사들도 꺼려했기 때문에, 결국 조교 한 명이 남은 수업을 대충 때우는 역할에 낙점됐다. 늘 을의 위치에서 갑의 명령을 이행하던 조교는, 갑자기 갑의 위치에 서서 얻은 이 한 달간의 권력에 취해, 거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원래 밟히던 자가 밟는 위치에 올라섰을 때, 더 세게 밟는 법이다. 그래서, 수업을 듣는 모든 학생들에게, 기말고사 대신 주어진 주제로 5000자 이상의 짧은 소설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학생들은 모두 반발했다. 하지만 학교측에서는 어차피 그닥 중요하지도 않은 교양수업에 신경 쓰지 않았고, 다른 교수들이나 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학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각자 주제어를 뽑았다. 조교가 주제어가 적힌 종이를 작게 접어 학생들에게 돌렸다. 각각 세 개의 주제어를 뽑아 그걸 다 이야기에 녹아내야 하고, 마지막에는 커다란 반전까지 넣어야 된다는 게 이 과제의 요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격적이고 자극적이고 재미있게 쓰지 않으면 무조건 F를 줄 거란 말에, 학생들은 좌절했다.

본인들 차례가 되고, 홍빈이 뽑은 종이에는 '연쇄살인', '동창', '첫사랑'이라는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파격적인 스토리를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위안삼는데, 옆에서 찬식이 "으악" 소리지르며 머리를 뜯는다. 찬식이 뽑은 종이를 보니 '자스민' '악몽' '암호'가 써 있다. 홍빈은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고 찬식의 등을 토닥여 줬다.

과제 기한이 일주일이 남은 지금, 홍빈은 그래도 열심히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하다보니 생각보다 재밌다. 벌써 1000자 정도를 썼다. 그래서 우선 룸메이트인 찬식을 꼬드겨 읽어보고 평가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찬식이 읽어주고 있는 것이다.

뭐, 내용은 꽤 뻔하지만 흥미롭다. 홍빈이 주제는 잘 뽑아서 어떻게 대충 얘기는 되니까. 다시 생각하니 입맛이 쓰다. 찬식은 지금 도대체 뭘 써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번 학기가 간당간당한데 여기서 F를 받으면 진짜 학사경고가 날라올 거라, 걱정돼 죽겠다. 홍빈이 부럽다.

쓰여진 데까지 다 읽어본 찬식이 "나쁘진 않네"라며 랩탑을 홍빈에게 돌려준다. 홍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랩탑을 받는다.

"그런데 왜 내 이름을 썼냐고, 기분 나쁘게."
"수업 시간에 그 조교가 그랬잖아. 캐릭터 만드는 거 어려우면 아는 사람을 바탕으로 쓰라고."
"그런 얘기도 했어?"
"넌 수업 시간에 하나도 안 듣고 있냐?"
"응."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이 없다.

"그럼 뭐하냐?"
"예습, 복습."
"뭐, 다른 수업?"
"아니, 게임."

네가 그럼 그렇지, 생각하지만 홍빈은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같은 겜덕으로서의 예의다.

"게임을 무슨 예습 복습을 해."
"어젯밤에 한 게임 머릿속으로 돌려 보면서 거기선 그러지 말 걸, 차라리 다른 캐 쓸 걸, 이러면서 복습하고, 오늘은 이 캐로 한 번 해 봐야지, 이렇게 이렇게 플레이 해서 팟지 노려봐야지, 하고 예습하고."
"잘났다. 그 열정으로 공부했으면 서울대 갔겠다."
"사돈남말하네."
"그나저나, 넌 언제 쓸 거냐, 이거?"
"아오, 말도 마. 생각만 해도 짜증나."

찬식이 머리를 쥐어뜯는다. 홍빈은 또다시 웃음을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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