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의 일기: 2010년 3월 2일

아, 신입생 환영회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술은 입에도 못 대는 동우 녀석이 걱정돼서... 그래도 우리 대학교는 똥군기는 없는 곳이어서, 못 먹는 애 억지로 먹이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음악이라는 불확실한 길을 가는 걸 부모님들이 다 반대하셨지만, 결국 우리가 이겼다. 같은 대학교에 동우는 뮤지컬학과에, 나는 작곡학과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웃기는 일이다. 작곡이란 거 전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주영이의 말에 발끈해서 작곡프로그램을 다운 받고 첫 음절을 딱, 찍은 순간부터, 너무 재밌었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데, 뭔가 딱딱딱, 클릭하니까 내 손으로 곡이 하나 만들어졌다. 신기하고, 재밌다. 이것도 다 동우 덕분이다. 동우가 아니었으면 이런 거 절대로 해보지 않았을 거다. 어쨌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는 순간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은 한 건, 동우였다.

그런 동우가 지금 옆에서 해롱해롱 거리고 있다. 진짜 누가 억지로 먹인 거면 내가 뒤집어 엎을려고 했는데, 지가 자진해서 맥주 한 잔을 받아 두 모금을 마시고 저러고 있다. 동기들과 선배들이 다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다. 저 덩치에 맥주 두 모금에 얼굴이 불타올라 내 어깨에 머리를 묻고 어지럽다고 칭얼대고 있으니, 누가 봐도 웃기는 상황이다. 다들 "진영이가 고생이 많네", 한다.

"누가 얘 좀 집까지 데려다 줘라."

선배 한 명의 말에 내가 바로 대답했다.

"아, 저 동우랑 같은 방이라서요. 제가 이따가 잘 챙겨갈게요. 걱정 마세요."
"너네 기숙사냐?"
"네."
"아, 같은 방이라서 친해졌구나."
"아뇨, 고향친구에요. 11년지기."
"와, 징그럽다. 11년이나 친구였단 말야?"

여러 선배들과 동기들이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 대학까지 같은 데 오고, 방도 같이 쓰는 거야? 너네 서로 지겹지도 않냐?"

한 선배의 말에 발끈하려는데, 옆에서 동우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혀로 웅얼거린다.

"진영이랑 저는 소울메이트에요. 우린 평생 함께 있을 거에요."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주변 선배들이 웃는다.

"둘이 아주 11년차 부부구만? 그래, 너네 소울메이트끼리 백년해로해라."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선배며 동기며 교수님들한테까지도 부부라 불리게 되었다.



동우의 일기: 2010년 3월 3일

아침에 눈을 뜨는데,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 팔에 감각이 없다. 어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 기억이 없다.

저린 팔을 들어올리려는데, 뭔가가 팔에 얹혀 있다. 아직 몽롱한 상태로 내려보니, 진영이가 내 팔을 베고 자고 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어제 신입생 환영회 때 진짜 맥주 한 모금만 마셨는데, 아니, 두 모금인가? 왜 그 다음 기억이 전혀 없는 거지? 맥주 두 모금에 필름 끊긴 거야, 나?

뭐, 안 봐도 비디오다. 내가 뻗어서 진영이가 방까지 어떻게 데려왔겠지. 눕히는데 내가 진영일 붙잡고 안 놔줬을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얘가 왜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이 좁은 침대에서 나랑 자고 있겠어?

진영이 머리를 살짝 들어 팔을 빼내고, 베개를 대신 머리 밑에 놔주고 조심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진영이가 추울까 봐 2층 침대 위에서 이불을 갖다가 잘 덮어주고, 어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아, 위험할 뻔했다. 뒤에서 진영이가 뭐라뭐라 중얼거린다. 저 녀석, 또 잠꼬대 하나보네.








진영의 일기: 2011년 5월 9일

내가 저 곰새끼 눈치 없는 건 진작에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같은 방을 쓰면 뭐하냐고. 옷 벗고 있으면 입혀주고, 샤워 끝내고 젖은 채로 나오면 수건 갖다가 말려주고, 아주 눈물겹다, 이 자식아.

1년 동안 삽질을 하고, 올해는 내가 진짜 끝장을 본다,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이 녀석이 방에 후배 하나를 들이기 시작했다. 올해 뮤지컬학과에 들어온 이정환이라는 앤데, 애가 붙임성도 좋고 성격도 모난 데가 없다보니 어딜가나 예쁨받는 애다. 게다가 생긴 것도 오리같이 생겨서, 귀엽다. 그런데 그런 애가 동우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거다. 기분 나쁘다.

오늘도 알바 끝내고 들어오는데, 둘이 나란히 침대에 앉아 이어폰을 나눠낀 채 랩탑으로 뭘 보고 있다. 뮤지컬학과에서 축제 때 무슨 공연을 한다더니, 그거 모니터 하고 있나 보다.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둘이 꼭 붙어앉아 랩탑 스크린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왠지 열받는다.

사실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닌 건 안다. 정환이는 누가 봐도 여자를 완전 밝히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이 상황이 화가 나는 거다. 저렇게 친한 후배까지 질투하고 있는 내가 짜증나고, 한심하다. 이게 다 저 곰새끼가 눈치를 밥 말아 먹어서 그러는 거다.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 같긴 한데, 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서 그게 짜증난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말 하기엔... 자존심 상한다. 원래 더 많이 좋아하면 지는 거라는데,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내가 지는 거니까. 그리고... 걱정도 된다. 내가 잘못 안 걸까 봐. 진짜 속마음을 털어놨다가 저 녀석이 같은 마음이 아니면, 친구도 못 하는 거니까. 그래서 지금 몇 년째 말도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는 거다. 그런데 저 녀석은 뭐가 좋은지 정환이랑 둘이 낄낄거리고 있다. 아오, 저걸 확!

"넌 룸메가 들어오는데 쳐다보지도 않냐?"

괜히 시비걸며 발을 찼다. 녀석이 놀란다.

"어? 언제 왔어?"
"온지 한참 됐다, 이 자식아."
"에이, 선배, 그럼 기척이라도 하지."

왠지 이정환이 저 녀석도 얄미워서 손에 한 움큼 잡히는 볼을 양손에 가득 잡고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다.

"윽, 뭐하는 거에요."
"기척 하는 거다, 임마. 매일 보는 후배가 귀여워 죽겠어서."
"이씨, 이 볼 변태."

볼 변태는 또 뭐야. 오리의 볼이 빨개질 때까지 주물렀더니 좀 속이 풀린다. 오리는 씩씩거리며 이건 볼희롱이라고 한 마디 더 하고 도망간다. 그래도 내일 또 올 거면서. 저 오리도 은근 즐기는 것 같단 말이지.

오리가 나가고, 냉큼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앉았다.

"뭐 보냐?"
"아, 이거 아까 연습한 거 찍은 건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아까 오리보다 더 동우한테 가까이 앉아 랩탑 모니터를 쳐다봤다. 동우가 보기 쉽게 무릎을 세워 그 위에 랩탑을 얹어 내 눈높이에 맞춰준다.

"그냥 내려놔, 무겁잖아."
"아냐, 이렇게 해야 네가 편하지."

이러니까 이 녀석의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거다. 신동우, 너 도대체 무슨 마음인 거냐?









동우의 일기: 2011년 6월 8일

입영통지서가 왔다. 입대신청을 하고 얼마 안 돼 바로 왔다. 다행이다. 요즘 군대가기도 힘들다던데, 운이 좋았다. 최대한 빨리, 이번 학기 끝나자마자 휴학하고 갈 수 있다. 빨리 가야 한다. 하루라도 더 진영이와 같이 있다가는 진짜 평생 후회할 짓을 할 것 같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멀리 저 녀석과 떨어져야 한다. 내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인데, 이렇게 잃을 수는 없다.

요즘 너무 위험하다. 내 머리에 무슨 음란마귀가 씌였는지, 진영이를 볼 때마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고, 몸이 반응한다. 내 12년지기 친군데, 내 제일 친한 친구이자 소울메이트인데, 그런 녀석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뜻인 거다. 더 심해지기 전에,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 어떻게든 거리를 둬야 한다.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가 방문을 열었는데,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녀석이 쳐다본다. 자연스레 눈을 돌렸다. 요즘, 녀석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자꾸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가득 차버려서, 이런 내 자신이 끔찍하다. 만약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영이가 안다면, 상종 못할 인간말종이라고 나랑 평생 연을 끊을 거다. 그건, 생각만 해도 싫다. 어떻게든 빨리 진영이에게서 떨어져서, 내 자신을 고쳐놔야 한다. 다시 예전처럼.

녀석이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위에 걸쳤던 셔츠를 벗는다. 방이 좀 더운가? 하지만 민소매만 입고 있는 녀석을 보자 나도 갑자기 더워졌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저 민소매 왜 저렇게 야해? 나도 모르게 진영이를 쳐다봤다가, 서둘러 눈을 돌렸다. 요즘 매일매일 이런 지뢰밭을 걷고 있는 느낌이다.

책상의자를 돌려 진영이 앞에 앉았다. 진영이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나... 입영통지서 왔어."
"뭐?"

녀석이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 다가온다. 나도 모르게 의자에 앉은 채 뒷걸음질을 쳤다.

"다음주에 방학하고 바로 가려고."
"나랑 같이 동반입대 하기로 했잖아."
"그냥... 지금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날 보는 녀석의 시선이 따갑다. 녀석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는데, 민소매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몸 때문에 심장이 쿵, 한다. 이런 와중에도 이런 리액션이라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나.

"신동우, 내 눈 똑바로 보고 얘기해. 지금 무슨 상황인 거야?"

우물쭈물하며 눈을 들어 진영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용기가 없다.

"미안해. 내가... 저... 안 될 것 같아..."
"뭐?"
"너랑 같이 있는게... 저... 내가... 이제 안 될 것 같아. 내 마음이... 그게... 안 돼..."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버벅거리는데 녀석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나와 같이 있기 싫다는 거네?"
"응? 어... 그게... 그러니까..."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말이잖아, 너."

진영이가... 눈치를 챘나? 그런 건가? 점점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다.

"진영아..."
"알았어. 무슨 말인지 잘 알겠으니까 나가."
"진영아... 난..."
"나가라고!"

저런 표정의 저런 목소리의 진영이는 처음이다. 진영이가... 눈치를 챘나 보다. 나를 경멸하는 거다.

"미안해..."

그 말을 남기고 그 방을 나왔다. 이제, 다, 끝나버렸다.



진영의 일기: 2011년 6월 8일

동우에게... 거절 당했다.

그래, 내가 계속 티냈다. 어떻게든 내 마음 좀 알아달라고, 되도 않는 유혹까지 해 봤다. 하지만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아서, 저 눈치없는 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나 보다, 했다. 하지만 녀석은 알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결국 내 옆에서 더는 있지 못하겠다고 자기 혼자 결정해버린 거다.

녀석도 힘들었겠지. 착한 녀석인데, 12년지기 죽마고우가, 그것도 남자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는 데, 자기는 같은 마음이 아닌데 날 잘라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계속 같이 지내기도 껄끄럽고, 그랬을 거다. 그래서 결국 택한 게 도망가는 거였다. 아니, 내가 도망가라고 아주 등을 떠밀었다.

녀석의 미안하다는 말이 가슴을 후벼판다. 네가 왜 미안해. 너를 좋아하는 내가 나쁜 거지. 그 마음 못 받아주는 네 잘못은 아니잖아.

차라리 계속 아닌 척, 모르는 척할 걸 그랬다. 그랬다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평생 함께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다...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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