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의 일기: 2008년 6월 16일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녀석의 생일이라 큰 맘 먹고 내가 저 곰새끼 맛있는 거 먹이겠다고 알바까지 했는데, 뭐? 여자친구랑 데이트를 하겠다고? 여자친구?

그래, 학교가 갈렸을 때 솔직히 불안했었다. 중학교까지는 동우한테 관심 보이는 여자애들을 내 선에서 차단해서, 저 눈치는 밥 말아 먹은 곰이 누가 자기에게 관심 있는지도 모르고 살게 잘 만들어 놨었는데, 다른 학교에 다닌 지 1년 만에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그것도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다. 그래, 이 곰새꺄, 잘 먹고 잘 살아라.



동우의 일기: 2008년 6월 23일

요즘들어 진영이가 까칠하다. 왜 그러는지 알 것 같다. 항상 진영이가 나보다 더 인기있었는데, 내가 먼저 여친을 사겨서 저 녀석 자존심에 금이 간 거다. 아, 멍청하게 여친 얘길 왜 했지? 게다가 내 생일날 둘이 데이트 한다는 말에 진영이가 열받았는데 거기에 대고 "너도 올래?"라고 했으니 녀석이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아오, 진짜, 이럴 때는 나도 내가 곰 같다. 하...



진영의 일기: 2008년 8월 14일

방학이 시작된 지도 몇 주가 지났는데 저 곰이 통 보이질 않는다. 뭐, 그 잘난 여친하고 데이트하고 있겠지. 그래도, 여자 생겼다고 죽마고우는 나몰라라하는 놈인 줄은 몰랐다. 맘 같아서는 집에 쳐들어가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주고 싶은데,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놀란 눈을 하고 맞을 녀석을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온다. 알바를 끝내고 집에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놀이터를 지나는데 낯익은 모습이 보인다. 녀석이 벤치에 누워 자고 있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저거 저거, 누가 그러다 업어가면 어떡하려고. 물론, 저 덩치를 업어가는 게 더 고생일 테지만. 아무튼, 저 곰새끼 아무데서나 잘 수 있는 건 진짜 존경스럽다.

녀석이 괘씸해 내버려둘까, 하다가 그래도 모기에 뜯기고 있는 녀석이 불쌍해 발로 툭툭, 차서 깨웠다.

"야, 인나. 뭐 이런데서 자고 있어?"

누가 둔한 녀석 아니랄까 봐 한참을 깨운 후에야 느릿느릿 일어나 눈을 비빈다.

"어? 내가 언제 잠들었지?"

아오, 저 둔팅이 곰.

"들어가서 자,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너 기다리느라... 요즘 내 전화도 안 받고, 집에 가도 없다고 그러고, 그래서. 너 집에 가려면 여기 지나가야 하니까 기다리면 오겠지, 했지."

괘씸한 마음이 조금 풀어진다. 내가 좀 녀석을 대놓고 피하긴 했지. 약간 미안해져서 녀석의 옆에 앉았다.

"날 왜 기다렸는데?"
"왜냐니. 지금 며칠을 못 봤는데..."
"여친 만나느라 바쁜 거 아니었어? 나랑 놀아줄 시간이 있기는 해?"
"걔랑 헤어진 지 한참 됐는데?"

대수롭지 않은 녀석의 말투에 녀석을 쳐다봤다. 큰 소리로 웃고 싶지만 참는다. 그래도 명색이 친군데, 헤어졌다는 애 앞에서 그러면 안 되지...

"헤어졌어? 왜?"
"차였어. 내가 너무 재미없대."

웃기는 기지배네. 지가 뭐라고...

"내가 밴드 해서 멋있을 줄 알았는데... 헙."

녀석이 말을 하다 말고 토끼눈을 하고 입을 그 곰손으로 막는다.

"밴드라니, 무슨 말이야?"

이 녀석이 나한테 비밀이란 걸 만든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는 서운해진다. 이렇게 점점 멀어지는 건가...

"아니... 그게... 저... 주영이가..."

왜 그 새끼 이름 안 나오나 했다. 1학년 2학기 때 전학 온 녀석인데, 다들 동우가 무서워서 기는데 얘만 뭘 모르는 애라서 동우랑 친해졌다고 했다. 나 말고 다른 친한 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짜증이 나 일부러 그 녀석 이름이 나올 때마다 말을 돌리곤 했다.

"그래서, 주영이랑 밴드를 한다고?"
"그냥, 장난식으로... 걔가 전학 오기 전 학교에서도 밴드 했었는데, 여기서도 하고 싶다고, 그래서... 어쩌다 보니..."
"근데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
"우리가 너무 못해서..."

하... 웃기지도 않는다.

"니 여친한테는 얘기했잖아."
"그거야, 걔는 같은 학교니까, 학교 축제 때 우리가 공연하는 걸 봐서... 헙."

또 한번 입을 손으로 가린다. 아주 가지가지 한다.

"학교 축제면 몇 달 전이잖아. 너 몇 달 동안 나한테 비밀로 한 거야? 너 완전 실망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데 녀석이 손을 잡아끈다.

"아니야, 진영아, 진짜 미안해. 내가 연습 많이 해서 잘하게 되면 말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지금은 진짜 너무 형편 없어서, 정말이야, 그래서 그랬어."

평소에는 말도 느린 애가 속사포처럼 얘기하는 거 보니,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다.

"학교 축제에서도 공연했다며. 나한테 못 보여줄 건 뭔데?"
"그래도... 제일 잘 하는 모습 보여주고 싶으니까..."

아, 난 신동우한테 너무 약해. 저런 말을 들으니 바로 화가 풀린다.

"그것 때문에 지난 몇 주간 코빼기도 안 비친 거야?"

조금 풀어진 내 목소리에 녀석이 안도하며 날 다시 벤치에 앉힌다.

"응, 요즘 매일 모여서 연습하고 있거든. 주영이가 청소년가요제 나가고 싶다고."
"제대로 하지도 못한다면서 가요제는 또 뭐야?"
"걔는 가수하고 싶어하니까. 그런 데 나가면 이름 알릴 수 있으니까."
"그래?"

걔가 가수하고 싶어하건 말건.

"그럼 넌? 너도 가수 되고 싶어서 그래?"
"나? 아니."
"그럼 넌 뭐가 하고 싶은데?"

그러고 보니 우리가 벌써 10년지기 친구인데 아직 이런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녀석은 잠시 망설였다.

"신동우, 너 자꾸 나한테 비밀 만들래?"

내 말에 동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뮤... 뮤지컬배우 하고 싶어."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뮤지컬?"
"응. 전에 한 번 여친이랑 보러 갔었는데, 너무 멋있는 거야. 배우도 멋있고, 의상도 멋있고, 그 넓은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도 멋있고. 진짜 꼭 해보고 싶어."

뭐, 동우가 목소리는 좋으니까. 그런데, 얘가 노래를 잘 했던가? 괜히 헛된 꿈 꾸고 있는 거 아냐? 맘도 여린 애가, 괜히 이루지도 못할 꿈을 꾸다 상처 받을까 봐 걱정된다. 역시, 얘는 내가 없으면 안 돼.

"내일도 밴드 연습할 거야?"
"응, 요즘 매일매일 해."
"어디서?"
"주영이네 사촌형이 안 쓰는 창고 빌려주셨거든. 완전 좋아. 주변에 건물도 없고 해서, 아무리 시끄러워도 괜찮아."
"나 그럼 내일 너네 연습 보러 갈래."
"어..."

내 말에 녀석이 쭈뼛거린다.

"왜, 안 돼?"
"아직 완벽하게는 못 하는데..."
"그래서, 지금 싫다, 이거야?"
"아냐, 내일 보러 와."

내 험악한 말투에 바로 꼬리내릴 거면서, 반항은.



동우의 일기: 2008년 8월 15일

떨린다. 마이크를 잡은 손이 자꾸 힘이 빠져서, 스탠드 아니었으면 마이크를 여러 번 떨길 뻔했다. 학교 축제 때도 이렇게 떨지 않았는데, 진영이가 온다는 사실에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린다. 아, 진짜, 말실수는 왜 해서 결국 다 불어버렸는지...

오늘 노는 날이라서 보충수업도 알바도 없으니 아침부터 같이 온다는 걸 한사코 말려 혼자 먼저 왔다. 어떻게든 최대한 연습을 해서 절대로 실수하지 않도록. 그런데... 왜 이렇게 떨리냔 말이다.

"신동우! 집중 안 할래?"

결국 주영이가 짜증낸다. 아오... 걱정돼 죽겠다.

진영이는 약속했던 대로 오후 늦게 왔다. 오자마자 밴드 이름이 '갭골'이 뭐냐고 비웃어서 주영이랑 한바탕 했다. 나도 사실 좀 쪽팔린 이름이라, 진영이 편 들었다가 배신자라고 주영이한테 한 대 맞았다. 시작부터 느낌이 안 좋다.

진영이를 위해 급하게 공수해 온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진영이가 우릴 쳐다보고 있다.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 같은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은 손이 진짜 눈에 보이게 덜덜 떨린다. 심호흡을 크게 했다. 드럼소리와 함께 노래가 시작됐다. 경직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부른지도 모르게 노래가 끝났다. 진영이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옆에서 주영이가 호들갑 떤다.

"완전 죽이지? 장난 아니지? 우리 대박 잘하지?"

진영이가 입을 열었다.

"동우 노래 잘하네."

와, 저 말이 뭐라고. 완전 뿌듯하다.

"근데 노래가 구려."
"아이씨, 내가 쓴 거거든?"

진영이와 주영이가 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난 별 상관 안 했다. 중요한 건 진영이에게 칭찬 받았다는 거니까.

"어디 동우한테 이딴 노래를 부르게 하냐?"
"이 새끼 말하는 뽄새 보소. 니가 뭐라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냐?"
"내가 발로 써도 이것보단 잘 쓰겠다."
"어디 그럼 한번 써와 보던지!"

씩씩거리는 주영이 앞에서 진영이가 씩, 웃는다.

"내기할래? 내가 너보다 잘하는지, 못하는지?"
"그래, 해! 해! 뭐든 다 들어주마."
"그럼 내가 써온 곡이 너 거보다 좋으면, 너 나 형님으로 모셔라. 알겠냐?"
"그래, 내가 아주 평생 형님으로 모셔주마."
"어차피 동우 아니면 너 볼 일도 없는데 내가 왜 널 평생 보냐?"
"이 새끼가 진짜!"

결국 내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쟤들은 왜 저리 사이가 안 좋은지 모르겠다. 어쨌든, 난 진영이한테 칭찬 들었으니까, 그걸로 됐어.



동우의 일기: 2008년 8월 16일

오늘 저녁, 진영이가 진짜로 곡을 써왔다. 그것도 주영이 곡보다 훨씬 좋은 걸로. 어젯밤에 집에 가서 작곡프로그램 다운로드 하고 바로 썼단다. 와, 진영이 완전 천재 아냐? 결국 밴드 멤버들 전부 다 진영이 거가 훨씬 좋다고 인정해버려서 주영이가 삐쳤지만, 진영이가 마음 넓게 "이 곡, 너네가 써라", 해서 결국 그 노래를 연습해서 가요제에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진영이는 드디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며, 작곡을 공부하겠다고 했다. 진영이랑 고등학교가 갈린 후로 점점 더 같이 있을 수 있는 이유나 시간이 없어져서, 나랑은 앞으로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갈 것 같아서, 이렇게 점점 멀어질까 봐 걱정됐는데, 다시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 것 같아서 기쁘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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