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의 일기: 2017년 3월 17일

엎드려 누워 따뜻한 수건에 허리를 맡긴 채 녀석을 노려보았다. 동우는 혼난 강아지마냥 고개를 푹 수그리고 내 눈치만 보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더 열받는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한다. 시작은 내가 했다. 동물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먹이 주지 마시오" 푯말을 무시한 채, 곰에게 먹이를 던져 주었다. 그러니 내 잘못이 진짜 병아리 눈물만큼은 있다. 그래도 그 원인제공자는 저 녀석이다.

졸업 후 나는 프리랜서 작곡가로 일을 시작했고, 녀석은 뮤지컬극단에 들어갔다. 선배들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받은 의뢰로 만든 걸그룹 곡이 진짜 초대박을 쳤고, 내 이름은 금방 유명해졌다. 이제는 나한테 곡을 받아가려고 대형기획사들이 줄을 서고 있다. 내 감성이 걸그룹 곡에 딱 맞는다나, 뭐라나... 어쨌든, 졸업하고 채 일 년도 안되서 우린 동우의 자취방을 나와 제대로 된 아파트로 이사했다.

동우는 처음엔 작은 배역들로 시작했다. 하지만 목소리도 괜찮고, 연기도 곧잘 하고, 피지컬도 꽤 좋고, 얼굴도 매력 있고,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는 녀석이니까, 점점 비중이 커지고 있다. 그래도, 새로 시작하는 뮤지컬 배우가 버는 돈은 한계가 있으니까, 어쨌든 나라도 어느 정도 괜찮은 수입이 들어오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우리 둘 다 건강한 20대 남자고, 사귄 지 벌써 몇 년인데 아직... 그... 어쨌든, 키스하고, 꼭 껴안고 자고, 그게 다인 거다. 그게 말이 되냐고. 혹시 얘 문제 있는 거 아냐?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입술에, 그 손길에, 몸이 좀 달아오를라 치면 "이제 자자", 하고 꼭 껴안고 잠드는 거다. 진짜 애기곰처럼 잠든 그 얼굴에 수차례 주먹질 하려는 걸 겨우 참았다.

하지만... 여기서 왜 끝까지 가지 않냐고 따질 순 없는 거 아닌가. 솔직히, 내가 남자라서, 저 녀석이 이 이상 가는 걸 꺼려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물어볼 수가 없다. 동우가 나를 좋아하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그 불안함을 더한 건 오리새끼였다. 대학교 때 내내 동우 옆에 붙어있더니, 이정환이가 졸업하고 동우와 같은 극단에 들어갔다. 그 후로, 예전에 우리 기숙사 방에 놀러오던 것처럼 툭하면 우리 집에 놀러온다. 그래도, 동우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극단 소식도 간간히 들을 수 있어서 좋긴 한데, 오리가 필요 이상으로 떠들 때가 많다. 뭐, 우리 둘이 사귀는 사이인 걸 모르니까 그러는 거겠지만, 가끔 혼자 속으로 열불 날 때가 있다.

극단의 누구누구가 동우한테 대시했다가 차였다느니, 얼마 전에 한 여자가 회식 자리에서 아예 맘먹고 동우 옆자리에서 뻗었는데, 동우가 집까지 고이 모셔다 줘서 극단의 여자들 반 이상이 동우한테 뻑이 갔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혀 듣고 싶지 않단 말이다. 가뜩이나 불안해 죽겠는데, 동우 저 녀석이 예전에 여자친구 사귄 적도 있으니까, 남자건 여자건 녀석과 너무 가까워지면 질투가 나 미치겠는데, 우리가 현재 이런 관계니까 더 불안해지는 거다. 그런 소식을 물어올 때마다 오리 볼을 떡 주무르듯 해 쫓아냈지만,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그러다 며칠 전, 동우가 기쁜 얼굴로 집에 들어왔다. 이번에 극단에서 하는 꽤나 잘 알려진 뮤지컬에 비중 높은 조연 자리를 꿰찼다는 것이다. 물론 기뻤다. 그런데 동우 몰래 서치해 보니 무려 여자배우와 키스신까지 있는 배역이다. 불안감이 점점 더 커진다. 내가 자신감 하나는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었는데, 이 곰새끼에 관련된 건 다 불안해 죽겠다. 그래서, 결국, 내가 직접 녀석에게 상을 차려 주었다.







녀석이 배역 딴 걸 축하할 겸, 내가 얼마 전 프로듀싱 한 걸그룹 노래가 1위한 걸 축하할 겸, 해서 둘이 조촐하게 파티를 했다. 술은 소주 한 잔 이상 마시지 못하는 녀석이라, 샴페인 한 잔에 벌써 얼굴이 벌겋다. 나 역시, 조급한 마음에 좀 급하게 마셨더니 좀 알딸딸하다. 좀 더운 것도 있고, 생각한 것도 있고, 해서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었다. 녀석이 말은 안 해도 내가 민소매 입고 있는 걸 볼 때마다 달아오른다는 걸 알고 계획적으로 한 거다. 아니나다를까, 이미 벌개진 얼굴이 거의 타오르고 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녀석이 달려들었다.

처음엔 괜찮았단 말이지. 늘 하던 것처럼 침대에 누워 키스하고, 서로의 몸을 손과 혀로 훑고, 점점 흥분돼 갔다. 그러다 내가 녀석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대자 녀석이 나를 밀치고 일어났다. 순간 화가 났다.

"뭐야?"
"위험해. 여기서 더 가면 안돼."

아, 저 차려줘도 못 먹는 새끼. 결국 폭발했다.

"너, 지금 내가 남자라서 그러는 거야?"
"뭐? 아냐, 절대 아냐."
"그럼 뭔데?"

우물쭈물 거리는 게 더 짜증난다.

"됐어, 관둬."

등을 돌리고 누웠다. 뒤에서 녀석이 쭈뼛거리는 게 느껴진다.

"아프다고... 하니까."

한참 후에야 녀석이 웅얼거린다.

"뭐?"
"그게... 하면... 아프다니까... 내가 너 아프게 할까 봐..."

아, 저 덩치에 저리 귀여운 건 진짜 반칙 아냐? 녀석도 뭐 이것저것 찾아본 모양이다. 결국, 녀석도 하고 싶었던 거다. 속으로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에 엉거주춤 서 있던 녀석을 끌어다 침대에 밀어눕히고, 그 위를 올라탔다.

"왜 내가 아플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토끼눈이 된다. 진짜 놀리기 쉬운 녀석이다.

"아... 저... 그게..."

더듬거리는 녀석이 너무 귀여워 몸을 숙여 그 입술을 핥았다. 천천히, 천천히, 살짝 살짝 키스해가며 녀석의 귀에 입술을 대었다.

"아프게 안 하면 되잖아, 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천천히 민소매 셔츠를 벗었다. 날 올려다보는 녀석의 눈이 점점 더 커진다. 어디, 이래도 네가 안 하나 보자, 싶었다.








하다가 중간에 이성이 날아가버린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이 깨끗이 닦여진 채로 침대에 누워있고, 녀석이 방바닥에 앉아 그런 나를 보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악, 하고 비명이 난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이 아프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녀석은 내 비명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많이 아파?"
"허리... 허리가..."

녀석이 허둥지둥 방에서 나간다. 곧 녀석이 전자렌지에 따뜻하게 데운 수건을 들고 온다. 엎드려 누워 수건을 허리에 대니 좀 살 것 같다. 그리고 지금 현재에 이르렀다. 난 이런 볼썽사나운 몰골로 누워 있고, 녀석은 방바닥에 비맞은 강아지마냥 앉아 있다. 따질 기운도 없지만, 이대로 넘어가고 싶지 않다. 결국 또다시 악,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았다.

"이 곰새꺄, 처음 하는 건데 너 도대체 뭘 어떻게 해서..."

녀석이 말을 끊는다.

"네가... 그만하지 말라고... 그럼 화내겠다고..."

가뜩이나 아파서 열이 나는데 얼굴이 더 달아오른다. 진짜 내가 그랬단 말야? 정말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었나, 내가?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래서 하기 싫었던 건데... 너만 보면 머리가 마비되니까, 절제가 안 될 거 같아서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미안해... 앞으로 다시는 안 할게. 정말이야."

아... 더 화내고 싶은데, 애인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화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결국 밥상 차려준 건 난데, 어찌보면 이건 다 내 잘못인데, 저 착한 녀석은 또 자기 탓이다.

"이리와."

녀석이 쭈뼛거린다.

"기운 없는 사람 자꾸 두 번 말하게 할래?"

허리에 얹었던 수건을 방바닥에 던져놓고, 신음을 참아가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녀석이 우물쭈물 거리며 가까이 다가온다.

"팔베개 해 줘."
"그래도..."

내가 노려보자 녀석은 내 옆에 누웠다. 내 머리를 조심스레 들어 자기 팔 위에 얹는다. 한번 크게 숨을 쉬고, 다시 신음을 참아가며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녀석이 멈칫한다.

몸이 얼어붙은 채로 팔도 제대로 못 피고 있는 녀석이 갑자기 안쓰러워졌다. 결국 내가 밀어붙여서 이렇게 된 건데...

고개를 살짝 들어 녀석의 턱에 쪽, 하고 뽀뽀했다. 좀 더 위로, 좀 더 위로, 입술까지. 녀석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포개온다. 처음엔 엄청 서툴렀던 녀석의 혀가 이제 능숙하게 내 혀를 감아올리고, 치열을 훑고, 입술을 핥는다. 내 위에 어정쩡하게 놓였던 녀석의 손이 차츰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온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녀석은 다시 얼어붙었다.

하... 덩치만 컸지 소심하기는, 녀석... 괜찮다는 뜻으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잠시 멈췄던 녀석의 손이 다시 허리를 조심히 감싼다. 그 손의 온기가, 아까 그 수건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다. 녀석의 입술에 입을 댄 채 속삭였다.

"아팠지만, 좋았어. 그러니까, 다음 번엔 조금만 더 살살해, 알았지?"

다음 번이란 말에 녀석이 귀를 쫑긋, 한다. 귀엽지만, 여기서 뭘 더하면 진짜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입술에 쪽, 뽀뽀하고 고개를 숙여 녀석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곰이 무슨 죄가 있겠어? 배고픈 곰에게 무턱대고 먹이를 던져준 내가 잘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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