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의 일기: 1999년 4월 23일

클났다. 엄마가 학교 끝나면 바로 오라고 했는데 길고양이랑 놀다가 늦었다. 빨리 집까지 뛰어가는데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 처음 보는 남자애가 그네에 앉아 멀뚱히 쳐다보고 있다. 눈이 째진 게 꼭 여우 같다. 아, 방금 같이 놀던 길고양이도 닮았다. 그 길고양이도 하얗고 예뻤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녀석을 쳐다보았다. 말 걸어 볼까? 인사할까?

"안..."
"신동우! 너 빨리 안 올라와?"

헉, 엄마 목소리다. 난 인사하려고 들어올리던 손을 내리고 아파트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결국 엄마한테 혼났다.

풀 죽어서 조용히 밥 먹고 있는데 엄마가 아빠한테 하는 얘기를 들었다. 오늘 건넛집에 새로 이사왔는데, 나랑 동갑인 아들이 있다고. 아까 그 예쁜 애였으면 좋겠다.



진영의 일기: 1999년 4월 24일

짜증난다. 이사온 집도 싫고 새 학교도 싫고 다 싫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 학교도 집이랑 엄청 멀어서, 30분 넘게 걸어가야 한다. 옛날 살던 집은 학교 바로 앞이었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거 진짜 싫은데 이제 30분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 모든게 다 짜증난다. 아빠도, 엄마도 다 밉다.

엄마랑 선생님이랑 한참을 얘기하더니 선생님이 따라오라고 하셨다. 엄마는 집에 가고, 나는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갔다. 다 모르는 얼굴들. 쟤네는 다 친해졌을 텐데. 이러다 나 왕따 당하면 어떡하지?

애들 앞에서 웅얼웅얼 인사를 하고 빈 자리로 갔다. 다들 짝꿍이 여자앤데 나만 아니다. 이것도 짜증난다.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이 책을 꺼내라신다. 난 책도 하나도 없는데.

짜증나서 책상 위만 노려보고 있는데, 짝꿍이 책을 책상 한가운데로 밀었다.

"너 책 없지? 같이 보자."

짜증난 게 조금 풀린다. 같이 책을 읽다가 얼굴을 살짝 봤는데 어디서 본 것 같다. 어디서 봤지? 아, 어제 놀이터에서 엄마한테 불려간 애. 눈도 작고 뛰는 것도 느리고, 완전 곰 같았다. 그럼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건데. 이따 같이 집에 가면 되겠다. 다행이다. 엄마가 열심히 설명해줬는데도 집에 가는 길을 전혀 모르겠다. 길 찾는 건 너무 어렵다.

"너 우리 아파트 살지? 이따가 집 같이 가자."

어? 녀석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생각보다 잘 맞을 것 같다.








동우의 일기: 2004년 3월 2일

아, 울고 싶다. 진짜 둘이 같은 중학교 가려고 엄청 열심히 공부했는데, 같은 중학교 됐다고 완전 좋아했는데, 반이 갈라졌다. 초등학교 때는 4학년 빼고 다 같은 반이었는데, 그래서 매일 같이 등하교 하고 집에 가면 진영이 방에서 같이 놀고 했는데, 이제 어떡하나. 4학년 때처럼 학교 앞에서 기다리면 되나? 진영이 완전 길치라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학교에서 집 가는 길을 못 찾았는데, 혼자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진영의 일기: 2004년 3월 2일

동우한테 좀 미안한 짓을 했다. 그래도, 다 그 녀석을 위해 한 일이니까.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앤데 다른 반 됐다고 저렇게 우울해 하는 걸 보기도 좀 그렇잖아. 이럴 땐 약간의 꼼수와 약간의 잔머리로 이런 상황을 극복해야지.

하지만 그래도 동우한테 좀 미안하긴 하다.



동우의 일기: 2004년 3월 2일
3교시 끝나고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불러 3반으로 가라고 하셨다. 응? 거기 진영이 반인데? 어떻게 된 거지? 선생님께서 그런데 왜 저렇게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 해 주시는 거지? 뭐, 그래도, 반이 같아져서 좋다.



진영의 일기: 2004년 3월 2일

4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동우가 우리 반으로 왔다. 옆에 앉았던 녀석을 미리 쫓아내길 잘했다. 동우가 환하게 웃으며 내 옆에 와 앉았다. 왜 반을 바꿔주셨는지 모르는 눈치다. 뭐, 내가 딱히 선생님께 거짓말 한 건 없으니까, 알게 되도 상관 없다. 동우가 조금 느린 건 사실이니까. 행동도 느리고 말도 느리고, 리액션도 느리고. 그냥 그렇다고만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렇게 좀 느리기 때문에 내가 같이 있어줘야 한다고. 진짜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물론 그게 다 느긋한 성격 때문이라고는 말 안 했다.

뭐, 나중에 선생님이 사실을 알게 되서 뭐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난 거짓말은 하나도 안 했으니까. 괜찮다.








동우의 일기: 2006년 11월 11일

진영이와 집에 가려고 학교를 나서는데 갑자기 웬 여자애 하나가 우리 앞을 가로막아 섰다. 손에 뭔가 들고 쭈뼛거리고 있다. 한눈에 봐도 진영이에게 고백하러 온 애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학교 바로 옆에 여자중학교가 있어서, 우리 학교 여학생 뿐만 아니라 옆 학교 여자애들까지 진영이에게 고백하는 걸 몇 번 본 적 있다. 눈치빠른 내가 이럴 때는 자리를 비켜줘야지.

"아참, 나 오늘 뭐 살 거 있었는데, 진영아 그럼 난 가게 들렀다 가야 돼서 먼저 갈게."

오,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연기다. 진영이 어깨를 툭, 치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매번 둔팅이 곰에 눈치는 밥 말아 먹었냐고 구박하는 진영이지만, 오늘은 절대로 그런 말 못 할 걸?



진영의 일기: 2006년 11월 11일

저 눈치는 밥 말아 먹은 둔팅이 곰. 누가 봐도 저한테 고백하러 온 앤데. 며칠 전부터 동우 옆을 얼쩡거리더니, 오늘 빼빼로 데이라고 큰맘 먹고 왔나 보다. 손에는 직접 만들었는지 뭔가 요란한 게 리본에 포장되어 있다. 동우가 로봇도 울고 갈 연기를 펼치며 자리를 뜨자 여자애가 허탈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괜히 짜증난다. 동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상술로 만들어진 날을 틈 타 고백하려 하다니. 홧김에 여자애에게 말했다.

"미안. 동우가 너 며칠 전부터 보긴 했는데 고백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자긴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그렇게 말해 달래. 자식, 이런 건 자기가 직접 말해야지, 저렇게 대놓고 도망갈 게 아니라."

망연자실한 여자애를 뒤로 하고 서둘러 동우 뒤를 따라갔다. 뒤에서 여자애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저 딴 곰이 뭐가 좋다고. 눈치는 드럽게 없어서 누가 자길 좋아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녀석을.

갑자기 녀석이 괘씸해져서 뛰어가 등에 업혔다. 녀석이 휘청거린다.

"깜짝이야! 뭐야, 너?"
"그러는 너야말로 그 로봇 연기 뭐냐?"

로봇 연기란 말에 녀석이 입을 삐쭉거리며 날 내려놓는다. 다시 같이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백 받았어?"
"응, 근데 내 스타일 아냐."
"너도 참... 지난번에 그 여자애도 예뻤는데 넌 별로라고 하고, 도대체 네 스타일이 뭔데?"
"눈치 없는 애."

그게 무슨 말이야, 라며 녀석이 웃는다. 다시 녀석과 보폭을 맞춰 걷는다.

"너, 근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긴 알아?"
"오늘? 목요일."
"됐다, 말을 말자."

아까는 그 여자애한테 미안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다. 그 여자애는 오히려 이런 둔팅이 곰한테서 구해준 나를 고마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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