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난 지금 몹시 화가 나 있다.
Z: 오늘 이홍빈은 죽은 목숨이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이 떨린다. 이걸 어떻게 죽이지? 이 생각 뿐이다.

오늘 하루의 시작은 꽤나 상쾌했다. 웬일로 일찍 일어나서 수업에 늦지 않았고, 오늘 학식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즈돈까스였다. 게다가 내가 너무 배고파 하니까 아주머니가 몰래 밥을 리필해 주셨다. 오후 수업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전공 수업인데, 점심을 먹고 있는 동안 휴강이 됐다고 알림이 떴다. 2학년이 되고 홍빈이랑 나랑 둘 다 전공을 게임공학으로 바꿨는데, 홍빈이가 1학년 1학기 때 이 수업을 들어서 유일하게 따로 듣는 수업이었다. 오늘 오랜만에 공강이 겹치니, 같이 게임이라도 한 판 하러 갈까, 하고 룰루랄라 동아리 방 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저 쪽에서 홍빈이가 보이는 거다. 반가워서 이름을 부르려는데, 홍빈이가 다른 방향으로 돌아보더니 그 쪽으로 가길래 나도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을 봤다. 1학년 때 홍빈이한테 들이댔던 여자애다.

나는 절대 내 애인을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건 의심이 아니라 그냥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한 것 뿐이다. 사람이란 게 원래 호기심 많은 동물이잖아? 그러니까 이건 절대 의심하는 게 아니다, 라고 스스로 되뇌이며 두 사람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짜 의심해서 그런 거 아니다.

둘은 딱히 비밀얘기가 아닌지 평소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거 봐, 난 의심한 게 아냐, 둘이 뭐 소근거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껴도 상관 없겠지, 하고 앞으로 한 발 디디려는 순간, 여자애가 말했다.

"찬식이랑은 요즘 잘 지내?"
"당연하지."
"다 내 덕인 거 알지?"
"알지, 내가 그래서 그때 삼겹살 쐈잖아."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래.

"아무리 생각해도 삼결살은 너무 약해. 내가 거의 한 학기 동안 너 걔랑 잘 되라고 도와줬는데, 적어도 소고기 정도는 쏴야 하는 거 아냐?"
"야, 내가 무슨 돈이 있냐?"
"와, 이거 완전 웃기는 놈이네. 야, 내가 너 코치해 줘서, 밀당 하는 거며, 여자애랑 따로 만나는 척하는 거며 다 내가 가르쳐 줘서 너 지금 걔랑 사귀는 거야. 나 아니었으면 너 지금도 걔 뒷꽁무니만 따라다니고 있을 걸? 너 고마움이 너무 약하다."
"그래, 내가 소고기 한 번 쏜다. 됐냐? 알바비 들어오면 쏠게."

둘은 이번에 한우냐 아니냐로 티격태격하며 저쪽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난 계속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좋은 녀석인 줄 알았더니 아주 나를 한 손 위에 올려 놓고 처음부터 갖고 놀고 있었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장단에 놀아난 거고. 이제 얼마 후면 우리 둘이 백일이라고 나름 선물도 준비하려고 몰래 알바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내 인생의 모든 부분이 다 저 녀석과 연결되어 있다. 하... 저딴 놈 때문에 내가... 진짜, 울고 싶다.

당장 두들겨패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릴 거 같은데, 그러다 진짜 학교에 둘이 치정싸움했다고 소문이라도 날까 봐 무섭다. 가뜩이나 진영 선배고 신우 선배고 둘이 하루라도 같이 안 다니면 너네 사랑싸움했냐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오는데, 이러다 무슨 소문이 어떻게 퍼질지 아무도 모르는 거다. 결국, 녀석의 자취방에서 녀석이 알바 끝내고 오길 기다렸다.

자취방이라기엔 꽤 좋은 원룸이다. 고등학교 때 아마추어 게임 대회에 나가 상금을 꽤 탔단다. 그래서 그걸로 학비도 내고, 이렇게 좋은 방도 빌렸다고. 지금 왜 알바를 하는지도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그 시꺼먼 속을 누가 알겠어? 아, 다시 생각하니까 열받는다.

오늘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기다리다 잠들었나 보다. 이 녀석은 돌아와서 내가 자고 있으면 깨울 것이지 옆에 누워 같이 자는 건 또 뭐야? 눈을 떠 보니 녀석 품에 안겨 있다. 아, 짜증난다.

날 안고 있는 녀석의 팔을 치우고,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녀석이 깨어 있다.

"뭐야? 안 잤어?"
"네가 이렇게 예쁘게 자고 있는데, 내가 잠이 오겠냐?"

아, 저 주둥이를 정말. 갑자기 확 열이 뻗쳐서 벌떡 일어났다. 녀석도 따라 일어난다.

"알았어, 미안해. 예쁘단 말 안 할게."

내가 저 말 때문에 화가 난 거라 생각한다. 당장 아까 들은 얘기를 따지고 싶은데, 당황하거나 흥분하면 말바보가 되는 나라 최대한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화만 더 난다.

"너, 너, 너, 이거 사기결혼이야!"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아, 저 녀석 주둥이가 아닌 내 주둥이가 문제다. 녀석이 크게 웃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너, 너 내가 다 봤어. 아니, 들었어. 아니, 보고 들었어."

아오 진짜, 이놈의 말바보 병. 제발 제대로 된 말 좀 하라고, 공찬식! 이제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나려 하고 있는데 녀석이 그런 나를 안고 이마에 쪽, 한다.

"왜 그래? 뭐 때문에 화가 난 건데?"

안돼, 이런 거에 넘어가면 안돼. 녀석을 밀쳐냈다.

"아까 다 봤어, 너랑 그 여자애랑, 막 뭐 밀당에 뭐에, 다 사기라고! 아냐?"
"아..."

뭐야, 겨우 그거야? 라는 느낌의 리액션이라 식으려던 화가 다시 불타오른다.

"너, 지금까지 날 속여온 거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말했어. 아냐?"
"넌 어떻게 화나도 이렇게 귀엽냐?"

이 자식 진짜 사람 열받게 하네. 주먹에 힘을 실어 진짜 세게 한 대 때렸다. 녀석이 놀라 비틀거린다.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마, 알았어?"

뒤돌아서 나오려는데 녀석이 서둘러 따라와 팔을 잡는다.

"미안해. 진짜 그렇게 화난 줄 몰랐어. 우선 내 얘기는 듣고 가, 응?"

이제 화가 나기보다는 서러워져서, 팔을 뿌리치고 나갈 힘도 없다. 결국 다시 방으로 끌려 들어와 침대에 앉았다. 녀석도 내 옆에 앉아 내 눈치를 살핀다.

"널 OT때 처음 봤는데, 너무 예뻐서, 아니 미안, 잘생겨서, 진짜 내가 첫눈에 반했어. 그런데 그 후로 너랑 어디에서도 마주치질 않는 거야. 같이 듣는 수업에서도 한 번도 못 봤고. 그래서 이리저리 찾아다녔는데, 한번도 못 봐서, 자퇴했나, 생각했어. 그런데 그날, 너네 일일술집 한 날, 저녁 다 되서 소문을 들은 거야. 신우 선배네 삼겹살 집에서 게임 동아리가 일일술집 하는데 너무 예쁜 남자애가 메이드 복 입고 주문받고 있다고. 단번에 넌 줄 알고 바로 갔어."

마음이 살짝 풀리고 있다. 예쁘다는 말은 여전히 싫지만, 날 처음부터 좋아했고, 거의 반 학기동안 찾아다녔다는 건 몰랐었다.

"가서 봤는데 진짜 너인 거야. 너무 좋아서 한쪽에 앉아 있는데, 다들 너한테 농담하고, 장난치고 하길래 나도 이 참에 너한테 고백해 볼까 해서 말 꺼냈다가 된통 당한거고."

아, 저건 진짜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이마에 퍼런 멍이 나중에 갈색이 되고, 없어질 때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렸다.

"그래서, 너 꼬실려고 동아리 들고, 같이 다니고, 순천까지 가고, 했는데, 좀 진전이 있는 거 같긴 한데 거기서 더 앞으로 가지를 못하니까 답답해 미치겠더라고. 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으니까 그 여자애가 도와주겠다고 했어. 걔가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라 잘 아는 사이거든. 그래서 걔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진짜 네가 결국 내 거가 됐어. 진짜 그게 다야. 정말이야."

홍빈이의 진심어린 말에 마음이 사르르, 풀린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엔 뭔가 억울하다.

"그래도, 나 속인 건 속인 거잖아."

하... 화난 목소리로 말하려고 했는데 완전 투정이 되어버렸다. 홍빈이도 내가 풀린 게 느껴지는지 좀 더 다가와 안아준다.

"미안해. 다시는 너한테 거짓말 안 할게. 절대로. 용서해줘."

이미 다 용서한 거 뻔히 알면서... 팔을 뻗어 홍빈이 허리를 꼭 감싸안았다. 홍빈이도 나를 더 꽉 껴안았다.

"너 걔 한우 사주려면 알바비 다 털리겠다."

웅얼웅얼 말했는데도 알아들었는지 홍빈이가 웃는다.

"괜찮아. 알바비 말고 용돈 받은 거로 사줄거야. 알바비는 따로 모으고 있거든."
"왜?"

대답이 없다. 팔을 풀고 떨어져 홍빈이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속이는 거 없기로 했잖아."

홍빈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연다.

"너 배낭여행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 여름방학 때 같이 가려고 돈 모으는 중이야."
"헐. 대박."

내 리액션이 의외였는지, 이번엔 녀석이 날 쳐다본다.

"나도 우리 같이 여행가려고 요즘 알바해서 돈 모으고 있는데. 와, 우리 완전 통했나 봐."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 홍빈이가 팔을 벌렸다. 다시 홍빈이 품에 파고들었다. 홍빈이의 팔이 나를 따뜻하게 감싼다. 나도 다시 홍빈이 허리를 꽉 안았다. 홍빈이가 머리에, 귀에, 이마에 쪽 쪽 소리나게 뽀뽀해준다. 그게 기분 좋아서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에도 쪽, 했다가 제대로 된 키스를 해 준다. 결국, 오늘 하루는 상쾌하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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