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전교에 이홍빈과 내가 사귄다고 소문이 났다.
Z: 결국 우린 지금 사귀고 있다.

하... 잠깐 눈물 좀 닦고... 결국 어떻게 된 얘긴지 마저 해보자.

그래, 솔직히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어서였다. 어디가서 말하기 부끄럽지만 아직 모태솔로란 말이다. 그래서 대학교만 오면 미팅에, 소개팅에, 아주 여자가 넘쳐날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학교 들어오자마자 게임 동아리 일에 휩쓸려 학기 반 이상을 허비하고, 이번엔 웬 남자가 나 좋다고 쫓아다니고 있다. 게다가 이게 아주 동네방네 소문이 퍼져서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학교 전체에 우리 둘이 사귄다고 소문이 났다. 미팅은 커녕 여자 구경도 못 해보고 졸지에 게임동아리 1호 커플이 된 거다.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이 녀석은 진짜 진심이었다. 남들 다 놀리건 말건, 비웃건 말건, 진심으로 날 꼬시러 들어온 거다. 맘 같아서는 당장 쫓아내 달라고 하고 싶은데, 완전 얄밉게도 이 녀석이 게임을 너무 잘한다. 게임기가 다 없어진 마당에 이 참에 우리도 유행을 따라가 보자, 해서 망한 PC방에서 꽤나 사양 괜찮은 PC 몇 대를 헐값에 사왔는데, 나도 어디 가면 꽤 잘한다고 칭찬받는 게임을 얘는 무슨 프로게이머처럼 하고 있다. 그것도 제일 어려운 캐릭터를. 얘랑 같이 하면 게임을 지지 않는데, 이걸 어떻게 쫓아내냔 말이다. 학생회에서 연 고급시계 대회에서 완전 홍빈이가 하드캐리해서 우리 동아리가 1등 먹었다. 그 공으로, 우리 동아리는 제대로 인정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큰 방으로 이사도 갔다. 이제 홍빈이는 우리 동아리의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래도 제정신이면 나라도 동아리를 나가야 하는 건데, 젠장, 이 녀석과 편 먹고 게임을 몇 번 해보니, 다른 사람하고는 못 하겠단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동아리 사람들 외에는 아는 사람도 몇 명 없는데, 내가 나가면 혼자 아웃사이더 될 거 같고, 그래서 눈 딱 감고 그냥 동아리에 남았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녀석과 나는 거의 매일 붙어다니고 있었다. 아주 우리 둘이 커플이라는 소문에 내가 도장을 찍어버린 것이다. 우리 동아리에 어차피 새내기는 얘랑 나 두 명, 게다가 둘 다 자유전공이어서, 동기 중에 얘 말고는 같이 수업 듣는 사람도 잘 모르고, 해서, 결국 2학기 때에는 수업도 다 같이 들었다. 역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수업 가기만 해도 A를 준다는 전설의 교양수업, 1초만 늦으면 얄짤 없다는 수업도 둘 다 수강신청 성공해서, 진짜 모든 수업을 다 같이 들었다. 그 결과 신혼부부가 금슬이 좋네, 라는 말까지 들었다. 하...

그리고, 이 녀석이 가장 무섭고 위험한 건, 진짜 성격이 너무 좋다는 거다. 약간 또라이 기질이 있지만, 그건 나도 사실 가끔 듣는 소리여서, 딱히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처음엔 약간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뭐 하나에 꽃히면 그것만 보는 성격이라서 그런 거였다. 그리고, 웬만한 장난을 쳐도 웃어넘기고, 가끔 애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을 해서 그렇지 절대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다. 화내는 것도 거의 못 본 거 같고, 뭐 해달라고 하면 다 해주고, 게다가 공부도 곧잘 해서 같이 수업 들으면 편하고, 꽤 괜찮은 녀석이었단 말이다. 그래서... 하... 결국 넘어갔다, 내가. 나 공찬식, 20세 건장한 남자인데, 결국 이 녀석 꼬심에 넘어간 거다.








사실 말이 꼬신다고 했지, 녀석이 나한테 딱히 뭘 심하게 들이대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그냥, 뭐, 매일 같이 게임하고, 같이 학생회 대회 나갈 준비로 연습하고, 하면서 점점 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됐는데, 가끔 선배들한테 "제가 얘 좋아하잖아요"나 "찬식이 예뻐서 좋아하는데요?"라는 헛소리 하는 거 빼고는 뭐 딱히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 전까지는 같은 1학년 중에 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래도 홍빈이 덕분에 처음으로 동기 친구가 생겼다. 게다가 알고 보니 홍빈이와 같이 듣는 교양 수업도 있었다. 첫 학기라 좀 해이해져서 수업 좀 빠지고 해서 위태위태 했었는데, 홍빈이 덕분에 학고 맞는 건 다행히 피할 수 있었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여름 방학이 되어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오이 농사를 도와드리러 내려갔는데, 제일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홍빈이었다. 젠장. 미운 정이란 게 진짜 무서운 거였다. 그래서 녀석이 "담주에 알바 끝나는데 나도 순천 놀러갈까?" 하고 톡 보냈을 땐 반가워서 바로 오라고 그랬다. 진짜 다른 뜻은 없었다. 그냥 같이 게임이나 하자고 부른 거였다. 진짜 녀석은 와서 농사 일 도와주고, 같이 게임하고, 그게 다였다. 그리고, 별다른 일 없이 여름방학이 끝났다.

다시 같이 서울로 올라와서, 수강신청을 하는데 아무래도 지난 번에 홍빈이 도움 받은게 생각나서 "같은 수업 들을래?" 하고 먼저 말을 꺼낸 것도 나였다. 홍빈이도 그러자고 해서 결국 수업을 다 같이 듣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듣게 된 교양 수업 중 하나에서 여자애 하나가 홍빈이에게 대놓고 들이대는 거다. 내가 하도 우리 둘이 사귀는 사이 아니라고 발악하고 다녀서 이미 학교 사람 대부분이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여자애가 홍빈이한테 들이대는 게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했다. 게다가 더 이상한 건, 홍빈이도 그 여자애를 단칼에 잘라내지 않는 거였다. 어쩌다 보니, 그 수업을 들을 때는 홍빈이 오른쪽에 내가 앉고, 왼쪽에 그 여자애가 앉는 게 우리 지정석이 됐고, 한 번은 캠퍼스에서 그 둘이 나란히 걸으면서 뭔가 소근거리며 웃는 걸 본 적도 있었다. 그때, 뭔가... 기분이 이상했었다.

정점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데, 무려 내가 게임하자고 불렀는데 홍빈이가 바쁘다고 안 온 때였다. 뭐가 바쁘냐니까 말을 얼버무리는 거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여자애랑 놀이공원에 놀러갔단다. 이게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야. 왜 걔랑 그런 델 같이 가? 홍빈이가, 친군데 그런 데 같이 갈 수도 있지, 하는데 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래서 진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다. "걔가 그렇게 좋으면 걔랑 놀아라"라고. 아, 지금 생각해도 쪽팔린다. 어디 그런 초딩도 하지 않을 유치한 말을... 그래놓고 진짜 쪽팔려서 홍빈이 연락을 며칠동안 받지 않았다. 수업도 가지 않았다. 결국 홍빈이가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미안하다고 싹싹 빌어서 용서해줬다. 홍빈이와 연락을 끊은 그 며칠이, 진짜 몇 년인 것 같아서, 속으로는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홍빈이가 완전 심각한 얼굴로 날 자기 자취방으로 끌고 가서, 이제 더 이상 안 기다리겠다고, 예스 아님 노로만 대답하라고, 사귈 거면 사귀던가, 안 사귈 거면 친구도 하지 말고 다시는 연락도 하지 말자고 그러는데, 내가 어떻게 노라고 하냐고. 얘 없는 며칠이 몇 년 같았는데, 내가 어떻게 얘 없이 학교를 다니고 게임을 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겠냐고. 그래서 결국 예스라고 했다. 그렇게, 결국 넘어가 버렸다.

결국 이 얘기를 짧게 요약하자면, 우리 학교 전기 시설이 형편없어서 내가 이홍빈과 지금 사귀고 있다는 얘기다. 이게 도대체 뭔 말이야,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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