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나는 헛소리하는 이홍빈의 이마에 커다란 멍을 들게 했다.
P: 나와 이홍빈은 우리 게임 동아리의 공식 1호 커플이라고 소문이 났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거냐고. 그래, 어떻게 됐는지 얘기나 좀 해 보자.

저녁 내내 주문 받고 접시 치우고 한 탓에 이제 구부러지지도 않는 팔을 이리저리 휙 휙 저으며 가게를 나왔다. 수고했다며, 뒷처리는 우리가 하겠다는 동아리 멤버 선배들의 말에 냉큼 자리를 뜬 거였다. 혹시나 선배들이 마음 바꾸고 다시 부를까 봐 서둘러 걷고 있는데, 저쪽 골목 벽에 누군가 기대 서 있다.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는데, 그 사람이 나와 발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마침 비치는 가로등 불빛에 보니 이마에 멍이 시퍼렇게 든 이홍빈이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저거 합의금 물어주려면 오늘 번 돈 다 들어가겠다, 싶었다.

"아, 저, 그게..."

내가 걸음을 멈추고 우물쭈물하자 이홍빈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아니 저녁 내내 그런 농담을 계속 들어서, 내가 진짜 열받아서, 나 원래 그렇게 폭력적인 놈 아닌데, 그게 내가..."

이제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 이 말바보 정말... 이홍빈이 슬쩍 웃는다.

"아, 이마? 신경쓰지마. 생각해 보니 좀 기분 나쁠만한 상황인 거 같아서. 괜찮아."

오, 생각보다 나쁜 놈은 아니었나 보다. 다행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확답을 받아야 한다.

"그... 합의금..."
"합의금 받을 생각 없어. 걱정 마."

휴, 진짜 한숨 놨다.

"그런 얘기는 단둘이 있을 때 해야 되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응? 이건 또 무슨 얘기지?

"그래서,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하자."
"아까... 하던 얘기?"
"응. 너 나랑 사귈래?"

이 자식이 착한 척하면서 은근히 사람을 슬슬 놀리는 타입인가? 싶어서 얼굴을 자세히 보는데 농담 같지가 않다. 그래도 합의금 달라지 않겠다고 한 게 있어서 최대한 말로 풀어야지, 싶었다.

"내가 아까 옷을 이상하게 입고 있어서 네가 뭘 착각했나 본데, 나 남자야."
"알아."
"그러니까 그런 농담은 기분 나쁘다고."
"농담 아닌데?"

이 자식 이거 사람 열받게 하는 데 뭐가 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다.

"그럼 뭔데 이 자식아?"
"너 예쁘다고. 마음에 드니까 사귀자고."

이 자식의 의도를 알겠다. 내가 또 꼭지 돌아서 한 대 더 때리면 그만큼 합의금을 더 받아내려는 수작이다. 여기서 낚이면 내가 망하는 거다.

난 녀석을 무시하고 다시 미친 듯이 빨리 걷기 시작했다. 녀석도 같이 보폭을 맞춰서 걷고 있다. 이제 소름이 돋는다.

"왜 대답을 안 해? 너 나랑 사귀기 싫어?"

그냥 무시하고 빨리 걸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혹시... 부끄러워서 그래?"

그 말에 또 빡돌았다. 다시 걸음을 멈추고 녀석의 멱살을 잡아 골목 벽으로 밀었다.

"너, 장난도 사람 봐 가면서 쳐라."
"아까부터 말했잖아. 장난 아니라고."

녀석도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는 모양이다.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 남자라고."
"안다니까."
"그런데 왜 사귀자고 그러는 건데, 새꺄?"
"네가 예쁘니까. 마음에 들었어."

녀석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놨다. 이 녀석은 나쁜 놈도, 착한 놈도 아니었다. 그냥 미친놈이었다. 아주, 뭔가, 된통, 잘못 걸렸다.

"난 너와 사귈 마음이 없어."

최대한 또박 또박, 이 미친놈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얘기해 줬다. 이홍빈이 눈을 깜빡인다.

"네가 아직 날 잘 몰라서 그래. 앞으로 알아가면 돼."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말이 안 통하는 미친놈이었다. 난 다시 최대한 빨리 기숙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녀석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발등의 불은 껐고,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동아리방 문을 열었는데, 순간 굳었다. 방 한쪽에 놓인 낡은 소파에 이홍빈이 앉아 있다. 이마의 멍이 더 파래져서 거의 무서울 지경이다.

"너... 너가 여기 왜 있어?"

말까지 더듬어가며 물었는데, 이홍빈이 시선 강탈을 해서 옆에 있는 줄 몰랐던 진영 선배가 해맑게 말한다.

"홍빈이 오늘부터 우리 동아리 멤버야."

나, 인간 공찬식, 건장한 20세 남자, 오늘부로 악연이란 걸 믿게 되었다.

결국 그 날 저녁, 전날의 성공도 축하할 겸, 두번째 새내기 멤버가 들어온 환영회도 할 겸, 해서 동아리 멤버들이 신우 선배네 가게에 모였다. 신우 선배가 "난 동아리 멤버도 아닌데 왜 여기로 오냐?"고 따졌지만, 전날 가게에서 일일술집을 하며 신우 선배가 혼자 가게 위 다락방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냈기에, 이걸 안 써먹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바로 쳐들어간 거였다. 게다가 신우 선배네 부모님과 누나는 따로 살아서, 아침에 부모님이 가게에 오기 전까지만 치워놓으면 2층에 있는 넓은 방을 써도 되는,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기회였다. 가뜩이나 술도 못 마시는데 내 집에 술 마시러 왔다고 투덜거리는 신우 선배를 위해 진영 선배가 떡볶이를 만들어주러 가고, 우리 나머지 멤버들은 소주를 궤짝째 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곧, 떡볶이로 신우 선배의 기분을 풀어주고 방에 자라고 보내고 온 진영 선배가 돌아와서, 동아리 멤버들이 다 모였다.

어쨌든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일일술집이었지만, 결과가 좋아서 다 즐거운 분위기였다. 전날 판 삼겹살 때문에 당분간 삼겹살 냄새는 맡고 싶지도 않아하는 멤버들을 위해, 진영 선배가 본인이 알바하는 닭발 집에서 매운 닭발을 잔뜩 가져왔다. 매운 닭발에 소주에, 모두 먹고 마시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특히, 닭발에 환장하는 나로서는 정말 최상의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새 내 옆에 앉아 있는 이홍빈 저 녀석을 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진영 선배가 소주병을 들고 한바퀴를 돌며 격려차 한 잔씩 따라주고 있었다. 선배는 나한테 특히 고생했다고, 어제 네가 고생해서 활동비도 충당하고, 이렇게 새로운 멤버도 들어왔다고 등을 토닥여줬다. 그동안 선배한테 쌓였던 게 다 풀어졌다. 선배는 다음으로 이홍빈에게 한 마디 건네며 한 잔을 따라주었다.

"어제 우리 하는 거 보고 재밌어 보여서 들어온 거지?"
"아뇨. 저 공찬식 꼬시러 들어온 건데요?"

멤버들 반 이상이 소주를 뿜었다. 나머지 반은 웃느라 아주 자지러진다. 저 미친놈, 또 시작이다. 진영 선배가 웃으며 홍빈이를 툭 친다.

"이거 아주 재밌는 놈이네. 재밌는 녀석이 들어왔어."
"저 지금 진지한데요?"

이번엔 다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점점 굳어가고 있는 나와, 왜 웃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이홍빈 빼고. 진영 선배가 거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럼 우리 동아리 1호 커플이네. 잘 해봐."

그렇게 우리는 게임 동아리의 공식 1호 커플이 되었다. 이홍빈 저 또라이가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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