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리가 듣기 좋다. 물론 아직 배우는 단계이고, 재활 치료도 병행 중이라, 음이 빠르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래도 듣기 좋다. 진영이는 여전히 그 예쁜 손으로 예쁜 음악을 만들고 있다.

결국 기타를 치는 건 어렵게 됐다. 아쉬워하는 내게 진영이는 그저 웃어보였다.

"괜찮아. 20년 쳤으면 오래 쳤지."
"그래도, 평생 해온 건데..."
"너만 있으면 돼, 난."

녀석이 점점 뻔뻔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어서, 내가 네 손이 되어줄게, 라고 했었다. 그래서 결국 난 요즘 녀석에게 기타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녀석은 내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고. 어렸을 때는 둘 다 적성에 안 맞아서 녀석은 기타만, 나는 피아노만 배운 거였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배워보니 기타도 꽤 재밌다. 녀석도 피아노가 재밌단다. 녀석은 요즘 피아노 곡을 작곡하고 있다. 나도 가수 생활을 끝내고 손 놓고 있던 작곡을 다시 시작했다. 기타곡을 만드는 게 생각보다 즐겁다. 내년에, 우리 둘이 만든 곡으로 꽉 꽉 채운 앨범을 내는 게 우리의 현재 목표다.

잠시 피아노 소리가 멈춘다. 컴퓨터로 악보를 그려넣고 있을 것이다. 식기세척기에서 깨끗해진 그릇을 꺼내 찬장 안에 차곡차곡 넣어 놓는다. 워낙 덜렁대는 녀석이고, 집안일은 영 젬병이라 녀석의 손목이 멀쩡했어도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찬장 안이 깔끔하게 정리가 된 후에야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런 일상적인 행동 하나 하나가 참 즐겁다. 요즘, 하루 하루가 즐겁다.

녀석은 피아노를 쳐 가며 악보를 채워넣고 있다. 원래 곡 작업을 시작하면 주위의 어떠한 소리도 듣지 못하는 녀석이라, 별다른 말 없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녀석이 올려보고 미소를 보인다.

"잘 돼가고 있어?"
"좀 막힌 것 같기도 하고, 풀릴 것 같기도 하고..."
"산책 갈래?"

내 말에 냉큼 따라나서는 걸 보니, 녀석, 역시 막혔던 모양이다. 아직 불편한 왼손 말고 오른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거실 앞, 활짝 열어놓은 문으로 테라스에 나와 바닷가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바닷바람이 시원하니 기분이 좋다. 약속이나 한 듯 둘 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다. 햇빛에 따뜻해진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파고든다. 마음이 여유롭다.








이런 마음의 여유를 얻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천재 기타리스트이며 작곡가 정진영의 자살 기도 얘기가 수그러들기도 전에 이번에는 진영이와 나의 열애설. 물론, 병원에서 대놓고 연애한 우리 탓도 있지만, 어쨌든 그 일로 결국 난 라디오를 그만둬야 했다. 4년 넘게 한 프로그램이었는데도, 왠지 아쉽지가 않았다. 20년 넘게 친 기타를 더 이상 못 친다는 걸 알았을 때, 진영이 역시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았듯 말이다. 진영이처럼 대놓고 말하진 못하지만, 나 역시 진영이만 있으면 되는 사람인가 보다.

그 다음에 터진 정진영의 출생의 비밀... 이라고 하기도 우스운 정진영이 사실은 그 재벌인 정 회장의 외아들이란 사실과, 정 회장이 오랜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으로 또 한 번 떠들썩해졌다. 게다가, 아버지의 어떠한 것도 받기 싫다고 완강히 거절한 진영이가 결국 물려받은 재산을 다 기부한 사실까지 알려져, 진영이가 퇴원할 때쯤에는 병원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이 백 명이 넘었다. 해외에서까지 취재하러 몰려온 통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결국, 한국에 더 이상 있기 힘들어진 우리는 유럽의 한 조그마한 바닷가 마을로 도망왔다. 유럽에서 유학할 때 진영이가 한 번 왔었는데, 언제 꼭 나와 함께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었단다. 결국, 그 바람이 이뤄졌다. 바닷가와 인접한 별장을 빌려, 우리 둘만의 생활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도시까지 재활치료를 받으러 가야하는 불편함 빼고는 더할 나위 없이 살기 좋은 곳이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상쾌하고, 공기도 맑아서,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곡이 써지는, 그런 곳이다. 이 곳에서 생활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평생을 살아도 좋을 것만 같다. 가장 좋은 건, 이렇게 우리 둘이 손 잡고 바닷가를 걸어도, 손가락질하거나 욕할 사람이 주위에 하나도 없다는 것. 이 세상에 마치 우리 둘만 남은 것처럼.

한참을 걷다 석양이 지는 것을 보기 위해 바닷가에 나란히 앉았다. 진영이가 자연스럽게 팔을 허리에 두르고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이렇게 자연스러워지기까지 한참을 걸렸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지 않을 때가 더 어색하다. 나 역시 진영이의 어깨를 감싸고 머리에 기댔다. 진영이가 귓가에 웅얼거린다.

"얘기해 줘."
"무슨 얘기?"
"아무 얘기나. 네 목소리 듣고 싶어."
"매일 듣는데 뭘, 새삼스레."

진영이가 왼쪽 손목을 내밀어 보인다. 손목에 선명한 칼자국이 아프다.

"이 상처는 좀 오래된 거야."

그러고 보니 손목의 상처가 새로 생긴 것들 말고도 여러 개 있다. 진영이 역시,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는 뜻이다.

"그냥, 너무 힘들고, 곡도 안 써지고, 우울하고, 해서, 딱히 죽으려고 한 것보다는 그냥 제발 다 끝났으면 좋겠다, 싶었던 때가 여러 번 있었어. 마지막으로 그랬던 게 3년 전이었는데, 그때 입원한 병원에 1인실이 없어서 잠깐 2인실에 있었거든. 그런데 옆 환자도 한국 사람이었어. 같은 한국 사람이라서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다른 방이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어. 어떤 아주머니였는데, 다리 골절된 환자라 거의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는 거야. 그런데 TV엔 다 영어 프로그램만 나오니까, 아주머니가 지루할까 봐 딸이 한국 라디오 프로그램을 녹음해다가 아주머니가 들을 수 있게 틀어주더라고."

얘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왠지 알 것 같았지만 말을 끊지 않고 계속 들었다. 진영이의 어깨를 잡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나도 들리니까 같이 듣고 있는데, 갑자기 너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서, 내가 너무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려서 그만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어. 아주머니가 놀라서 간호사를 부를 정도로. 퇴원한 후에 인터넷을 뒤져서 그동안 네가 했던 방송을 다 찾아서 들었어. 보이는 라디오로 네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고, 방송으로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어서, 다시 버틸 수 있게 됐어. 그래서, 네 목소리를 들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져.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기고. 그러니까, 들려줘, 네 목소리. 비싸게 굴지 말고."

진영의 머리에 기댔던 머리를 약간 들어올려 이마에 살짝 입맞춰 주었다. 뭐, 내 1호 팬이 원한다면야.

"그럼 좀 닭살돋는 짓 한번 해 볼까?"

다시 머리를 편하게 기대고 심각하게 말을 시작했다.

"신우의 어메이징 라디오, 오늘은 특별히 단 한 명의 청취자를 위한 방송인데요, 그 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게스트 분, 자기 소개 좀 해 주시죠."
"그게 뭐야."

진영이가 푸스스하고 웃는다. 진영이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처음 만났던 라디오 방송이 떠오른다. 역시, 클리셰는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모든 막장드라마의 클리셰적인 엔딩답게, 우리도, 모든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결국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아니, 그러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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