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 있는 하얀 침대 시트만큼이나 녀석의 얼굴이 창백하다. 병원 건물 밖에는 천재 기타리스트이며 작곡가인 정진영의 자살 기도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이 들끓고 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병실이 어두워졌다. 결국 전등불을 켜고, 다시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녀석을 지켜본다.

한국에 처음 돌아온 날보다 더 말랐다. 그러고 보니, 매일 밤 녀석을 안을 때마다 더 말라가고 있었다. 그게 더 싫어서, 더 함부로 대했던 것 같다. 한번도 다정하거나 배려하는 섹스가 아닌, 그냥 상처만 입히는, 그런 일종의 폭력이었다. 그걸 아무 말 없이 견디는 녀석을 증오했다. 10년 전, 내가 너무도 소중히 대하던, 조금이라도 아플라치면 깨물고 투정부리고 어리광부리던 녀석이 지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 녀석의 그림자조차 이제 없는 것 같아서, 그 화풀이를 이 작은 몸에 해버린 것 같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하얀 손목의 붕대가 가슴을 후벼판다. 손목에 어찌나 난도질을 해 놨는지, 앞으로 기타를 칠 수 없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주저앉을 뻔했다. 제 인생에서 음악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 녀석이, 이 무슨 짓을 한 건지... 하지만 그 생각조차도 웃긴 거다. 인생을 끝내려 한 녀석이 그런 걸 신경쓰지 않았겠지.

연락을 받고, 미친놈처럼 운전해 병원까지 왔다.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가 내 번호 하나여서, 자연히 내가 보호자가 되었다. 다행히 호텔의 화재경보기가 오작동을 해, 누군가 와서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조금 더 늦었으면 진짜 큰일날 뻔했다.

진영이가 치료를 받는 내내 병원 복도를 걸으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까짓 게 뭐라고, 그런 얘기를 한 거지? 나야말로 예전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는데. 있는 대로 망가지고 말라 비틀어진 건 난데. 결국 내게 화가 나서 그 화풀이를 녀석에게 한 거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전 아버지를 잃고,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된 녀석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나의 멍청함에 치가 떨린다.

1인실로 옮겨진 녀석이 너무 창백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아서, 만지기도 조심스럽다. 그냥, 옆에 앉아 마취가 풀리길 기다리고 있다. 정작 녀석이 깨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녀석이야말로 다시는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을테지만, 그래도 녀석이 깼을 때 제일 먼저 보이는 얼굴이 나였으면 해서, 계속 옆을 지키고 있다.








머리를 만지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는데 녀석의 눈과 마주쳤다. 한참 깨어있었던 것 같다.

"일어났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녀석은 내 머리쪽으로 뻗었던 손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러운지 잠시 눈을 감더니, 다시 눈을 떠 날 지그시 바라본다.

"괜찮아? 의사 부를까?"
"왜 왔어?"

일어서려는 나를 녀석의 나지막한 질문이 붙잡는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뭐라 할 말이 없다.

"미안해서... 온 거야?"

글쎄. 내가 미안해서 온 건가? 물론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게 여기 온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내가 대답이 없자 녀석이 몸을 고쳐 앉는다.

"그럼 돌아가. 다시 이런 짓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가."

녀석의 말에 일어섰다. 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가슴이 아린다. 이대로 여기를 나가버리면 진짜 평생 후회할 것 같다. 다시 녀석 쪽으로 다가갔다. 내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녀석이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너무 망가졌어. 지난 10년 동안, 난 너무 많은 걸 겪었고, 너무 많이 아프고, 힘들고, 외로웠어. 나야말로 예전의 내가 아냐. 지금의 난 그냥 빈 껍데기야. 내 안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다른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이런 나라서, 널 사랑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난 네가 나 말고, 널 온전히, 제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면 좋겠어. 이게 내 진심이야."

다시 돌아서려는 내게 녀석이 손을 뻗어 내민다. 저 손을 잡으면 안 된다, 머리로 생각했지만 이미 내 손은 그 희고 거의 투명한 손을 잡고 있다. 결국 녀석의 옆에 다시 와 앉았다.

"아버지가 유럽으로 가지 않으면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어. 무서웠어. 네가 어떻게 될까 봐, 나 때문에 너한테 어떤 짓을 할지 몰라서. 그래서 갔어. 너에게 연락이라도 하면 그 날로 너뿐만 아니라 네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망쳐버릴 거라고 하시는 아버지가 괴물 같았어. 그래서, 진짜 쥐죽은 듯 조용히, 진짜 음악 공부만 하고 살았어."

진영이의 조용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후벼판다. 나도 모르게 진영이의 손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했을 때는, 싫다고 했어. 그건 진짜, 어떻게든 하지 않으려 했어. 며칠 조용하시던 아버지가 날 불러서, 동우의 가수인생을 끝냈다고,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보고 싶냐고 하셨어.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힘 있는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지, 내가 너에게 얼마나 해로운 존재인지 깨달았어. 그래서 결혼했어. 그 여자애 역시 비슷한 처지에, 비슷한 협박으로 나와 결혼한 애라서, 서로 동지애는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어. 지금 그 애도 아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거야."

허탈하다. 이제는 되려 웃음이 난다. 내 인생은 한편의 막장드라마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채널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되면, 이게 뭐냐며 바로 다른 데로 돌려버릴, 클리셰가 뒤범벅이 된 막장드라마. 정 회장님은 정말, 그런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악역이었다. 그 사실이 왠지 우습고, 슬프고, 비참해서, 되려 웃음이 났다.

내 쓴웃음을 보며, 진영이 역시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굳이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거 하나야. 네가 망가졌다면 그건 나 때문이야. 네가 아팠던 것도, 혼자 남겨졌던 것도, 네가 잃은 것 모두, 다 내 탓이야.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다 널 사랑한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뭘 어떻게 해도, 난 뭐라고 할 수가 없어. 네가 그렇게라도 나한테 해주는 게, 날 봐주는 게, 난 고마워. 너한테 뭘 바랄 자격 같은 거 내겐 없는데, 그래도 네 옆에 있고 싶어서, 떼를 써서라도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서 돌아온 거야. 그 이상 안 바래. 정말이야."

눈물을 힘껏 참으며 진영이가 웃어보인다. 결국, 정진영은 바뀐 게 없었다. 여전히, 10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변한 건 나였다. 그걸 이제서야 깨닫다니, 난 역시 멍청한 놈이다.

꽉 잡았던 녀석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뭐라 녀석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딱히 없다. 그냥, 옆에 있어줄 거란 무언의 약속 뿐이다.

"피곤하지? 좀 더 자."

녀석이 실망하기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라디오 생방송이라 지금 가야 되는데, 끝내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좀 쉬고 있어."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그래도 마음이 좀 낫다. 녀석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지고 돌아서는데, 녀석이 다시 불러세운다.

"잠깐, 가기 전에, 동우야."
"응?"

날 올려보며 그 언젠가처럼 웃어준다.

"키스해 줘."

결국 우린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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