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마치고 늘 같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발걸음이 왠지 무겁다. 앞으로 다가올 무언가가 두렵다. 일부러 집에 가지 않기 위해 시간을 끈다. 편의점에 들러 뭘 좀 먹고, 괜히 서성여 본다. 차라리 술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좋겠다. 술이 안 받는 몸이 오늘따라 원망스럽다.

결국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어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라디오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집 문 앞에 녀석이 서 있었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별 말 없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다. 녀석이 뒤따라 들어오는 게 들리지만,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들어섰다. 오래전부터 생각이 많아지면 뜨거운 샤워기 물 아래에서 생각을 지우는 버릇이 있었다. 이렇게라도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생각들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 애쓴다.

젖은 몸을 대충 말리고 나와 옷을 입어서인지 옷이 등에 달라붙는다. 모든게 귀찮아서 젖은 머리도 대충 말리고 방에서 나왔다. 녀석은 소파에 앉아 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던 듯 싶다.

일부러 녀석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냉장고로 향해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신다. 딱히 목말라서가 아니라, 녀석 옆으로 가지 않을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다. 녀석이 먼저 뭐라도 말을 꺼내길 기다린다.

"왜 그렇게 갔어."

결국,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져서."

녀석이 내 말에 말없이 날 올려다본다.

"나... 때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냉장고에 물병을 도로 넣었다. 녀석은 잠시 말이 없다.

"나,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아."
"네 와이프는 어쩌고?"

내가 뱉는 말에 녀석이 놀란다.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다. 녀석이 라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한다고 했을 때, 이 정도 조사는 다 으레 하는 건데 말이다. 날 올려다보던 녀석이 눈을 피한다.

"이혼... 했어."
"그래?"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니까. 나나, 그 애나."

뭐, 그럴 것 같긴 했다. 누가 봐도 재벌 집안끼리 한 정략결혼이었다. 그래도, 이혼이라니... 아버지가 무서워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던 녀석이... 새삼 놀랐다. 하지만,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한다.

"그래?"

다시 녀석에게 등을 돌리고 뭐라도 할 것을 찾아서 커피메이커를 켜는데,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갑자기, 뭔가 많은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계속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나 한국 오기 며칠 전에. 이제 곧 발표 날 거야. 회사가 좀..."
"하, 이 비겁한 새끼."

나도 모르게 악문 입술 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손에 들었던 커피잔을 싱크대에 던지고 돌아서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돌아온 거야?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이제 네 마음대로 뭐든 할 수 있게 됐으니까?"

나를 올려다보는 눈에 눈물이 고인다. 가증스럽다.

"한동안 갖고 놀던 장난감을 뺏겨서, 한쪽에 버려놨다가, 다시 갖고 놀겠다고, 지금?"
"그런 거 아냐."
"그럼 뭔데!"

차마 녀석을 칠 수 없어서 녀석 머리 위의 벽을 주먹으로 쳤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너 때문에, 네 아버지 때문에 내가 어떻게 힘들게 살았는데! 10년 동안 아버지가 무서워서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이제 돌아가셨으니까 돌아오겠다고."

점점 화가 치미니까 오히려 목소리가 점점 조용해진다. 그만큼 속은 더 끓고 있다.

"너와 같이 있고 싶어."

저런 말을 하는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 그 분노를 말로 퍼부어댄다.

"널 보면 메스꺼워. 널 보면 네 아버지가 나한테 한 모든 짓들이 다 떠오르거든? 네 아버지가 내 인생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알기나 해? 내 날개를 꺾어버리고 좁디 좁은 새장에 처넣었어. 내가 원했던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갔어. 네 아버지가 나를 서서히 말라 죽여서 이제 난 빈 껍데기만 남았는데, 내가 널 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것조차도 화가 난다.

"많은 거 안 바래. 그냥... 옆에만 있을게."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진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꺼져.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마."
"동우야..."

저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도 이제는 듣고 싶지 않다. 녀석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내가 사랑하는 건 너 하나뿐이야. 동우야, 제발..."

저 말만은 하지 말아야 했다.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연 건 내가 아니라 진영이다.

다시 돌아서서 녀석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일으켜세웠다. 내 손에서 흐르던 피가 녀석의 옷에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면 돌아오지 말았어야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이런 모습으로 돌아올 거면 차라리 돌아오지 말았어야지. 나한테 그나마 남아있던 너에 대한 좋은 추억들은 그래도 끝까지 남겨줬어야지. 네가 이렇게 돌아와서 모든 걸 깨트려버리면, 난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녀석이 눈을 깜빡인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는 거다. 내가 굳이 친절히 설명까지 해줘야 하는 거다. 녀석이 끔찍하다.

"네가 자존심이 쎄서, 어느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애여서, 무슨 일에든 한 번 고집 부리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녀석이여서, 그래서 내가 널 사랑했는데.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사랑을 구걸하는 넌 내가 사랑한 정진영이 아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싫다는 말 한 번 안 하고 다 받아들이는, 그런 네가 아냐. 아버지가 무서워서 도망가 숨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에서야 돌아오겠다는 비겁한 네가 아냐. 지금 이런 네 모습, 역겨워. 그러니까, 꺼져."

진짜 역겹다는 듯이, 녀석을 놓고, 손을 털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진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후련했고, 슬펐다.

그리고 그날 밤, 정진영은 손목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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