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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진영] Cliche 2

#신영 #신우 #진영 #Alternate Universe (AU) #Drama

방 안이 어둡다. 해는 벌써 중천인데, 밤낮이 바뀐 이유로 단 암막 커튼 덕이다. 옆에 잠든 진영이가 깰세라, 조심히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뜨거운 물을 세게 틀어놓고, 그 밑에 서서, 머릿속의 생각들을 지우려 애쓴다.

타월 한 장을 걸치고, 다른 한 장으로 머리를 말리며 나왔다. 진영이는 여전히 자고 있다. 옷을 대충 챙겨 입고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거실로 나와 우선 커피메이커를 켜고, 키친 카운터에 기대 서서 머리를 마사지 한다. 요즘들어 두통이 심해졌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보니 진영이가 방문 앞에 서 있다. 어제 내가 벗어놓은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다. 옷깃 사이로 내가 새겨놓은 흔적들이 붉게 보인다. 하얀 몸에 붉은 흔적들이 너무 야해서, 너무 유혹적이어서, 메스껍다. 이런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저 녀석이 증오스럽다.

"일어났어?"

조심스레 꺼내는 말도 가증스럽다.

"뭐, 보다시피."

내 눈길을 느꼈는지 녀석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자국들이 보이자 멈칫한다. 커피가 다 된 소리에 일부러 등을 돌려 녀석을 보지 않는다. 커피를 따르고,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녀석이 없다. 샤워기 소리가 들린다. 배가 고픈데, 입맛이 없다. 어차피 이따가 나가 뭐라도 먹을 거니까. 빈속에 마시는 커피가 쓰다.

곧 진영이가 옷을 갖춰 입고, 젖은 머리 채로 나왔다. 녀석을 흘깃보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뭔가 딱히 할 말이 없다. 진영이 역시 말없이 자켓을 걸치고 현관 쪽으로 향하다 걸음을 멈춘다.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야."
"그래?"

관심 없는 양 말한다. 마치 몰랐다는 듯이.

"보러... 올 수 있어?"
"라디오 있잖아."
"공연... 5시에 시작해."

모르지 않는다. 한참을 알고 있었다.

"그래?"
"네가 와 주면... 기쁠 것 같아."

꽤 많이 용기내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내 눈치를 보는 녀석이, 내게 부탁을 하는 녀석이, 내게 조심스러운 녀석이, 신물이 난다.

"뭐, 생각나면 가고."

뭔가 더 말하려던 진영이는 입을 다물고 아파트를 나섰다. 나는 한 모금 마신 커피를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속이 쓰리다. 커피잔을 싱크대에 놓고 돌아서는데, 뭔가가 눈에 띈다. 키친 카운터 위에 놓인 티켓 한 장이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그걸 집어 찢어버리려 했는데,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이런 내가 한심스럽다.








이런 상황을 바란 게 아니다. 그 날, 라디오가 끝나고 내 집을 찾아온 진영이를 그냥 돌려보내야 했다. 하지만 너무 조심스러운 그 녀석이, 10년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데, 10년 전과 하나도 같은 게 없는 그 녀석을 보는 게 화가 났다. 10년 동안 꾹 누르고 있던 내 안에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녀석을 소파로 밀치고, 옷을 거의 찢어발기고, 녀석을... 범했다. 뭐라 다르게 표현할 수가 없다. 녀석의 아버지에게 쌓였던 모든 걸, 외톨이가 돼버린 나를 10년 동안 혼자 둔 녀석에 대한 화를, 어리고 힘이 없어 뭐든지 당할 수 밖에 없었던 나에 대한 분노를, 그 몰라보게 말라버린 몸에 다 풀어버리려는 듯이. 참 못할 짓을 했다.

그리고,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리던 녀석을, 덜덜 떠는 몸을, 본체만체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갔을 때 녀석은 없었다. 다신 오지 않겠지, 이제 끝이겠지, 하고 안도를 하며, 방금 내가 벌인 짓에 내 자신을 역겨워 하며, 그날 밤을 보냈다. 하지만, 녀석은 다음 날 다시 나타났다. 10년 전의 녀석이었다면 그런 짓을 한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당하고 있지 않았을 거다. 그 생각 때문에 다시 나타난 그 녀석을 더 괴롭혔다. 10년 전에는 깨질 유리병처럼 소중히 다뤘던 그 몸을, 아무런 배려 없이, 아무런 다정함 없이, 안았다. 그리고, 그 후, 매일밤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마치 서로를 어떻게든 망가트리려는 듯이, 서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내가 사랑했던 정진영은 이제 없다.








결국 두통이 너무 심해 약을 몇 알 삼킨 후에야 집을 나섰다. 뭔가 요기가 될 만한 걸 먹고,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진영이의 공연장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여기 오려고 했다는 듯이. 자켓 주머니에는 진영이가 놓고 간 티켓이 들어있다. 이런 내 모습에 헛웃음을 짓는다. 다시 돌아서려 하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공연장에 들어섰다.

어두워진 공연장 안에서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린다. 무대 위 조명이 켜지고, 진영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까 봤을 땐 부서질 듯이 여려 보였는데, 지금은 그 존재감만으로 무대 위를 꽉 채우고 있다. 첫 곡은 솔로 기타곡이다. 예쁜 손가락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 무대 위의 저 모습이, 10년 전 저 녀석의 모습과 너무 닮아서, 일부러 눈을 감고 소리에만 집중한다. 감겨진 눈에 옛 추억이 그려진다.

녀석을 처음 봤을 때는 어머니가 처음 그 집에 입주 가정부로 일하게 됐을 때였다. 노름 빚에 시달리다 결국 도망을 간 아버지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채 어린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일을 구하려 애썼다. 그러다 그 집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순전히 내 덕이었다. 그 부잣집의 외아들 도련님이 나와 동갑내기였는데, 항상 혼자여서 늘 외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을 구하러 온 우리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뒤에 숨어 있던 나를 녀석이 우연히 본 것이다. 내가 녀석의 놀이동무가 되어주는 조건으로 어머니는 그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린 내가 봐도 녀석은 귀티가 줄줄 흘렀다. 없는 게 없는 방에는 고급 침대가 놓여져 있고, 녀석은 고급스런 옷을 입고 고급스런 장난감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심성은 착한 녀석이어서, 금방 친해졌다. 녀석은 외로움을 참 많이 타서, 늘 바쁜 아버지와 쇼핑에 더 관심이 많은 어머니 대신 항상 함께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게 나였던 거다. 결국 녀석과 나는 24시간 붙어다니며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녀석과 난 늘 모든 걸 함께 했는데도, 늘 모든 걸 같이 공유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녀석은 도련님 같았고, 난 시종 같았다. 참 웃기는 표현이지만, 진짜 그랬다. 점점 커가면서, 어릴 때 깨닫지 못했던 둘의 신분 차이를,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점점 더 느끼게 됐다.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는 나를 보며, 녀석은 점점 더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뭐든지 다 받아줄수록, 더 못되게, 나쁘게 굴었다. 그게 다 자기는 날 온전히 친구로만 생각했는데, 괜히 둘 사이에 거리감을 느끼는 내가 서운해서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걸 알게 된 후, 둘 사이를 가로막던 뭔가가 없어졌다. 그렇게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우리 둘 다 16살이 되던 해의 녀석의 생일날, 녀석의 부모님은 둘 다 집에 없었다. 결국 일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도련님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뭐, 워낙 흔한 일이라 녀석은 슬퍼하지도 않았었지만. 흔한 부잣집의 클리셰 스토리.

둘 다 배부르게 먹고, 녀석의 방의 침대에 뻗었다. 어릴 때는 나와 절대로 떨어지기 싫어하던 녀석이라 둘 다 같은 방에서 잤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녀석이 갑자기 날 옆방으로 내쫓았었다. 뭐, 우리 둘 다 사춘기였으니까, 차라리 잘 됐다 싶었었다. 하지만, 그 날은 너무 배부르고 일어나기 귀찮아서, 내 방까지 가는 그 몇 발짝이 귀찮아서, 그냥 녀석의 침대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녀석은 내 옆에 내 팔을 베고 누웠다.

"무거워, 치워."
"싫어."

다시 말하는 것도 귀찮아 그냥 내버려 뒀다. 내가 입 다물자 녀석이 옆으로 돌아누우며 내 볼을 툭툭, 쳤다.

"아, 하지마."
"할 건데?"
"뭐야, 진짜?"
"너야말로 뭐야? 생일선물 안 줄 거야?"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았다.

"이거 완전 웃기는 놈이네. 야,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그때는 내가 가난한 게 그다지 상처가 아니었기에, 저런 농담쯤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줄 거야, 말 거야?"

끈질긴 녀석 때문에 짜증 내며 일어났다. 갑자기 머리를 지탱하던 팔을 빼내자 녀석도 궁시렁대며 일어났다.

"그래, 준다, 줘. 갖고 싶은 게 뭔데? 내가 천원까지는 통 크게 쏠 수 있어."

궁시렁대던 녀석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일어섰다. 뭐지? 싶었는데 방문 쪽으로 가 문을 잠그고 돌아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녀석이 내 앞에 가까이 와 앉았다.

"키스해 줘."

잠깐 녀석을 미친놈 보듯 내려다보았다. 무슨 이런 거지 같은 농담을. 하지만 농담하는 눈빛이 아니다.

"무슨 헛소리야. 뭐 잘못 먹었어?"
"아니. 키스해 줘."
"너 어디 아파? 뭐 열이라도 나는 거야?"

손으로 이마를 짚는데 그 손을 치우며 더 바짝 다가앉았다.

"내가 원하는 생일 선물이야. 키스해 줘."

녀석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잠시 숨이 멈춰졌다.

"무슨 이런 장난을 쳐. 꺼져, 인마."
"장난 아냐. 키스해 줘. 벌써 네 번째 말하는 거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늘 느린 게 곰 같다는 말을 자주 듣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이 녀석이 미쳤거나, 내가 미쳤거나, 아니면 지금 꿈을 꾸고 있거나, 어쨌든 이게 현실이 아닌 것 같다.

"어디 아프면 누워서 자, 이러지 말고."

녀석을 살짝 밀치고 일어서려는 날 녀석이 잡아 다시 앉혔다.

"절대로 내가 먼저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해줘. 내 생일이잖아."

녀석이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거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날 보며 녀석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키스해 줘. 해줄 때까지 안 놓아줄 거야."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내 손을 꽉 잡는다. 이 녀석 한 번 고집 부리기 시작하면 진짜 한도 끝도 없다.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차라리 해 주고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하,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지금 남자랑 뭘 하는 짓이냐, 싶었지만 뭐, 키스 한 번 정도야, 싶은게 내가 얘한테 그동안 참 많이도 시달렸었나 보다.

입술에 살짝 쪽, 하고 입술을 떼었다. 눈을 감았던 녀석이 눈을 뜨고 뾰로통하게 쳐다본다.

"됐지? 이제 이거 놔."
"이런 거 말고, 제대로 해줘. 제대로 된 키스."

아주 가지가지 한다. 이러다 진짜 밤샐 것 같아서, 오냐, 너 당해봐라, 식으로 약간 거칠게 입술을 부딪혔다. 녀석의 뒤통수를 꽉 잡고, 닫힌 입술을 혀로 열고 녀석의 뜨거운 입 안을 혀로 핥았다. 녀석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이제 됐겠지, 싶어 떨어지려는 순간, 녀석이 두 팔을 내 목에 감으며 몸을 밀착해 왔다. 서툴게 혀를 놀린다. 녀석의 몸이 점점 뜨거워진다. 이거, 좀 위험하다.

결국, 힘으로 녀석을 떼어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이 너무 야해서,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진짜, 걷잡을 수 없이 되기 전에,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녀석이 다시 안겨왔다. 녀석의 입술이 다시 내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도 녀석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녀석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했던 녀석이 지금 저 무대 위에 있다. 10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하지만 10년 전과는 모든 게 달라진 지금, 내 앞에 있다. 녀석의 하얗고 예쁜 손이 너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이 10년 전과 너무 같은데, 10년 전과 너무 달라서, 갑자기 숨통이 조여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 사람들을 헤치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여길 오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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