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그럼 모두, 좋은 꿈 꾸고, 내일 또 만나요. 신우의, 어메이징, 라디오."

늘 하는 마지막 멘트를 마치고 마지막 노래가 나가는 동안 자리를 정리한다. 밖에서 피디님이 잘했어, 란 사인을 보낸다. 4년 넘게 하고 있는 라디오인데도 매일 방송이 끝나면 하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

벌써 시간은 밤 12시가 되었다. 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시작한 후 그에 맞춰 살다 보니 야행성이 되었다. 부스 밖에서는 다 피곤한 얼굴로 눈을 비비고 있지만 나는 아직 쌩쌩하다. 그도 그럴 게, 요즘은 낮 12 전에 일어나는 일이 드무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부스에서 나오며 오늘도 고생한 피디님과 작가님들, 그리고 스태프에게 인사한다. 이제 집에 가 오랜만에 맛있는 떡볶이나 해먹어 볼까, 하고 생각하는데 피디님이 불러세운다.

"동우야, 잠깐만 얘기 좀 하자."

무슨 일이지? 그러고 보니 다들 얼굴은 피곤한데 눈이 반짝인다. 뭐, 국장님께 금일봉이라도 받았나? 난 별 말 없이 테이블 한쪽에 걸터앉았다.

"너, 혹시 정진영 한국 들어온다는 기사 읽었어?"

순간 얼굴이 경직됐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나와는 상관 없는 사람이다.

"정진영? 그 기타리스트인가 하는 사람이죠? 언뜻 본 것 같기도 하고..."

피디님 옆에 같이 눈을 반짝이고 있던 막내작가가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말을 끊고 들어온다.

"그 사람이 우리 방송 출연하고 싶대요!"

또 한 번 움찔했지만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한다.

"그 사람이 여길 왜요?"
"그러니까, 우리도 그걸 모르겠단 말이지. 천재 기타리스트 정진영이 새 앨범 프로모션 하러 한국에 거의 10년 만에 오는 건데, 다들 모시려고 안달인데 다른 섭외요청은 다 거절했으면서 우리 쪽으로는 직접 연락해 왔거든? 꼭 출연하고 싶다고. 너 혹시 뭐 아는 거 있냐?"

점점 표정관리가 힘들어지고 있다. 이러다 평정심이고 뭐고 다 엎어버릴 것 같다.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 한다.

"전 전혀 모르겠는데요? 어디서 뭐 잘못 알고 그러는 거 아녜요?"
"글쎄다. 난 그냥 혹시 너랑 아는 사인가, 했지."
"제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그런가? 하긴..."

굳어진 얼굴을 일부러 움직여 웃어보인다.

"피디님,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아, 그래, 피곤하지? 자세한 일정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네, 다들 수고하셨어요. 내일 봐요."

거의 도망치다시피 그 곳을 빠져나왔다. 거의 본능적으로 주차장까지 찾아가 차에 올라탔다.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에 다다르자, 그제서야 경직됐던 얼굴이 좀 풀린다. 심호흡을 하고 시동을 걸었다. 빨리 내 집으로, 나만의 안식처로 돌아가야 한다. 기어 변속하는 손이 떨린다.








샤워부스 안, 뜨거운 물을 한참 온몸으로 느낀 후에야 몸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이런 내 자신이 우습다. 10년도 더 된 일인데... 아직도 그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온 몸의 세포가 얼어붙을 수 있다니. 한심하다.

아주 뻔하디 뻔한 얘기다. 흔한 드라마에서 나오는 클리셰. 재벌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아들과, 그와 동갑내기인 주인집 아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고, 같이 모든 걸 함께했다. 어린 나이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인 진영이였는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녀석이라, 결국 정 회장님은 진영이와 나, 둘 다 음악공부를 시켰다. 진영이는 기타를 좋아했고, 나는 피아노를 좋아했다. 늘 모든 걸 함께했기 때문에, 진영이가 작곡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나 역시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진영이 덕분에 음악이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또 클리셰인 이야기다. 사춘기 소년 둘이 늘 붙어있으면, 게다가 한 명은 너무 부자라서, 한 명은 너무 가난해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어 결국 둘만이 늘 함께 있게 되면, 으레 벌어지는 일이다. 결국, 둘이 함께 침대에서 있는 모습을 들켰고, 한 명은 쫓겨났고, 다른 한 명은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 그 일로 어머니는 연을 끊었다. 결국, 클리셰 범벅인 이야기다.

17살의 나이에 하루 아침에 길바닥으로 쫓겨난 난 진영이 덕분에 배운 피아노 실력으로 하루 하루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명했다. 목소리도 나쁘지 않은 편이어서, 노래도 곧잘 했다. 결국, 어쩌다 보니 운 좋게 어느 기획사 사장님 눈에 띄어서, 가수 준비를 하게 되었다. 역시 진영이 덕에 배웠던 작곡 실력을 발휘해, '신우'란 이름에 싱어송라이터라는 타이틀을 걸고 앨범을 냈다. 앨범은 꽤나 잘 됐고, 드디어 내 인생에도 빛이 든다고 믿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일이 끊겼다. 출연하던 프로그램들에서 다 잘렸다. 방송국에서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다. 기획사 사장님이 날 불러, 더 이상 같이 일 못하겠다면서 계약서를 돌려줬다. 하루아침에 내 인생이 끝나버렸다.

나중에서야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서, 진짜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이게 다인데, 음악을 못 하게 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무너지나 싶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출연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피디님께 연락이 왔다. 디제이 해 볼 생각 없냐고. 그 누구의 입김이 라디오까지는 미치지 못하는지, 결국 이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4년 넘게 해오고 있다. '신우의 어메이징 라디오'가 지금은 내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 인생의 전부를 진영이가 다시 깨트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진영이가, 내가 시궁창을 뒹굴 때도 혼자 유학을 가 결국 천재 기타리스트로, 작곡가를 이름을 알린 진영이가, 이제 증오스럽다. 그 얼굴을 보면, 내가 사랑했었던 그 단정한 얼굴을 보면, 주먹이라도 날릴 것 같다. 지금부터 그 녀석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시간은 흘러 결국 다음주가 되었다. 천재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정진영이 한국에 10년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입국한 다음날, 바로 '신어라'에 출연하기 위해 내 라디오 부스에 나타났다. 일주일 넘게 이 순간만을 두려워하며 기다리고 있던 나는, 일주일의 시간이 도움이 됐는지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은 채 '게스트' 정진영을 맞이할 수 있었다.

방송이 시작되기 30분 전, 미리 대본을 보고 준비하기 위해 정진영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피디님부터 시작해서 모든 스태프들이 정진영의 등장에 호들갑을 떨고 있다. 옆 라디오 부스들도 난리가 났다. 건물 밖에는 팬들이 몰려와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 기타리스트이며 작곡가인 정진영이기에, 이런 누추한 곳까지 행차해 주신 걸 황송해 하며 맞이하는 게 어찌 보면 맞는 거다. 하지만 난 내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오늘도 이 두 시간이 빨리 지나가주길 빌 뿐이다. 그리고, 10시가 땡, 하고 되자, on air 불빛이 들어오고, 오프닝 멘트를 시작하는 내 앞에 정진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딱히 변한 건 없다. 얼굴도, 체격도 10년 전과 비슷하다. 여전히 정갈한 얼굴이고, 여전히 말랐다. 왠지 창백해 보이는 얼굴은 좀 피곤해 보이고, 소매 밑으로 드러나는 손은 가늘고 예쁘다. 모든 게 10년 전과 비슷한데, 모든 게 10년 전과 다르다. 그 괴리감이 어색하다.

오프닝 멘트를 끝내고, 처음 보는 사람인 마냥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진영이 역시 어색하게 마주 인사를 한다. 둘 다 자리에 앉고, 라디오 방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말을 참 잘하던 애였다. 모든 게 느린 나라서, 머릿속에서 할 말을 생각하고, 그걸 정리하고, 말을 꺼내는 게 한참을 걸리는 나여서, 모두가 답답해할 때도 혼자서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거나,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미리 알아채고 먼저 말해주는, 그런 애였다. 그런 애가, 오늘은 말이 별로 없다. 결국 대본을 보고 내가 묻고 내가 답하는 식이다. 첫 라디오 방송이라 굳은 것인지, 아니면 10년 만에 본 나 때문에 얼어붙은 것인지, 애가 경직돼 있다. 이럴 거면서 왜 여기 출연하겠다고 했는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너무 대단한 게스트여서, 오늘 방송은 무려 2시간 내내 게스트와 함께 해야하는 특집이어서, 기가 다 빨려나갈 것만 같다.

어찌어찌 한 시간이 지나 1부가 끝나고, 음악을 틀어놓고 헤드폰을 잠시 벗었다. 진영이가 작곡한 기타 곡이 목에 걸린 헤드폰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단정한 외모와는 다르게, 음악은 굉장히 파워풀하게 몰아치고 있다. 왠지 정진영과는 어울리지 않는 곡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따라 피곤이 몰려와 양쪽 눈을 마사지하고 있는데 날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눈에서 손을 떼고 조금은 흐릿해진 시야로 정진영을 쳐다보았다.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눈길이 짜증이 나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녀석에 부아가 치밀어서,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살짝 미소를 띠며 먼저 말을 걸었다.

"한국에 오랜만에 오셨는데, 어때요? 많이 변한 것 같아요?"

내 가벼운 말투에 정진영은 순간 흠칫한다. 그리고 이내 따귀를 맞은 듯 상처받은 얼굴을 한다. 그 표정이 가증스럽다.

"네. 너무 다, 많이 변한 것 같아요."

한참 후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 말에 이중의 뜻이 있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내가 입을 다물었다.

2부가 시작되고, 1부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여전히 말은 내가 거의 다 하고 있고, 정진영은 가끔 단답만 하고 있다. 누가 보면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어다 논 것 같다. 이제 슬슬 짜증보다는 피곤이 밀려오고 있다.

드디어 대본 마지막 장이다. 이제 이것만 하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말이 빨라진다.

"네, 아쉽지만 오늘의 특별 게스트, 정진영 씨를 여기서 이만 보내드려야 할 것 같네요. 진영 씨,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하게 되는 공연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입을 여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내가 또 자문자답 한다.

"네, 아직 시차적응이 안 되셔서 정신이 하나도 없죠? 제가 대신 말씀드릴게요. 다음달..."

공연 일정까지 얘기하고, 이제 진짜 마지막 인사만 남았다.

"그럼 진영 씨, 마지막으로 한국의 팬분들께 한 마디만 해 주세요."

진영이가 잠시 머뭇거린다.

"네. 저... 보고 싶었어요."

날 보면서 하는 저 말의 뜻을 알 것 같아서,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대본으로 눈을 내린다.

"네, 진영 씨, 오늘 나와주셔서 너무 감사하구요, 그러면 오늘 끝 곡으로 진영 씨의 새 앨범..."

결국 무사히 클로징 멘트까지 마쳤다. 내가 말을 마치고 헤드폰을 벗을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던 진영이는 내가 일어서자 같이 일어났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진영 씨. 조심히 가세요."

내 말에 또 움찔한다. 아주 꼴보기 싫다. 일부러 부산스럽게 대본 정리를 하고, 헤드폰 정리를 하고, 의자 정리를 하고, 어떻게든 자리를 뜰 순간을 늦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진영이가 나간 후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나 역시 서둘러 인사하고 나왔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

하지만 그 날은 끝까지 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피곤한 눈을 비비던 손을 뗐을 때, 눈 앞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문에 기대 서서 엘리베이터 쪽을 보고 있던 녀석이 몸을 고쳐 섰다. 이제 놀랄 기력도 없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녀석은 알아서 옆으로 비켰다. 난 비밀번호를 찍고 문을 열었다. 녀석은 별 말 없이 따라 들어왔다. 나 역시 따지기 귀찮아서 그러게 내버려 두었다.

돈도 많은 녀석이니, 사람 시켜 내가 사는 곳 알아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거다. 짜증이 나서 신발을 벗어 던지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을 마시는데 녀석이 조용히 말한다.

"보고 싶었어, 동우야."

내 안에서 뭔가가 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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