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뭘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전혀 예상 못한 상황이다.

오랜만에 중학교 친구를 만나러 이쪽 동네로 왔다. 근데 이 녀석이 굳이 핵 매운 컵라면을 먹겠다더니 배탈이 났다고 난리를 치는 거다. 할 수 없이 가까운 PC방에 들어와 녀석은 화장실로 뛰었고 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입구 쪽에서 낯익은 후광이 비치는 거다. 설마 설마 했다. 우리 학교랑 여기랑 버스로 한 시간 거린데, 쟤가 왜 이리 오겠어? 싶었는데, 역시나 공찬식이다. 게다가 공찬식과 같이 들어오고 있는 저 사람은 분명 옆 학교에서 유명한 이홍빈이고.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모르겠다.

우선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녀석들은 구석진 자리를 원하는지 내 바로 뒤쪽에 와 앉았다. 서로 대화하는 걸 들어보니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다. 아... 난감하다. 누가 봐도 둘이 친하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나를 보게 된다면 쟤네나 나나 뻘쭘한 상황이 되는 거다. 최대한 애들 눈에 띄지 않게 나가, 밖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 같아서, 은밀히 일어서는데, 어디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야, 차우빈, 너 어딨냐?"

아, 저 자식 진짜. 낯익은 이름에 공찬식이 의자를 돌려 주위 사람들을 스캔하다 나랑 딱 눈이 마주쳤다. 하... 진짜 아무데라도 꺼져버리고 싶다.








비원고에 입학이 결정되고, 친구들에게 제일 많이 들은 얘기는 비원고의 전설의 밴드부 얘기였다. 밴드 이름은 A4. 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처음 밴드를 만든 선배들이 A4 한장을 앞에 놓고 이름을 지으려고 머리 싸매고 고심하다 결국 못 지어서 A4가 됐다고 하지만, 제발 사실이 아니길 빌 뿐이다. 어쨌든 우리 학교 밴드부가 유명해진 이유는 우리 구, 나아가서는 서울시에서 열리는 청소년가요제와 음악제 등등에서 옆 학교 댄스동아리 빅스와 늘 1, 2위를 다투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밴드부가 1위를 하면, 다음 번에는 옆 학교 댄스동아리가 칼을 갈고 나와 1위를 하는, 그런 식이라 두 학교가 최대 라이벌이었다. 둘 다 남고이고, 두 학교 사이에 여고가 있어서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 학교 애들하고 옆 학교 애들하고 사이가 안 좋았다. 진짜, 길가다 마주치면 서로 생판 모르는 남이라도 입고 있는 교복 때문에 으르렁거릴 정도로.

어쨌든, 그래서 입학식 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학교에 갔다. 전설의 밴드부가 당연히 가장 궁금했다. 그런데 입학식 날부터 완전 컬쳐쇼크를 받았다.

복도를 걷다 우연히 눈에 띈 학교 게시판. 거기에 여러 동아리 홍보 전단지와 모집요강이 붙어있었다. 그런데 밴드부 전단지에는 딱 세 줄만 써 있었다.

'A4 17기 모집
잘생긴 사람만
못생기면 자동 탈락'

에이, 설마, 장난이겠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우리 학교에 형이 다녀서 학교 소식에 빠삭한 반 친구에 의하면 올해 밴드부 리더가 된 진영 선배가 완전 얼빠란다. 게다가 재작년에 옆 학교 댄스동아리에게 지고 작년에 당시 리더였던 선배가 실력 위주로 사람을 뽑아 정환 선배와 선우 선배가 밴드부 소속이 됐는데, 지금이야 살빼고 안경 벗고 관리하고 해서 괜찮지만 처음엔 비주얼이 영 아니었단다. 그래서 진영 선배가 올해 리더가 되면 무조건 얼굴만 보고 뽑겠다고 이를 갈았다고. 다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선배는 100% 진심이었던 거다.

그래서 그 날, 밴드부에 오디션을 보러 간 녀석들은 다 탈락했다. 내가 보기엔 나쁘지 않은 것 같은 애들도 다 탈락했다.

그리고 다음날, 입학식 날 결석했던 공찬식이 교실에 나타나자마자 다들 쟤가 올해 밴드부에 들겠구나,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그 날 바로 선배들의 호출을 받고 불려간 공찬식은 바로 밴드부 소속이 되었다. 오디션을 몰래 훔쳐본 한 녀석에 따르면, 진영 선배가 얼굴만 보고 "합격!" 했단다. 공찬식이 다룰 수 있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고 하니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된다며 뽑았단다. 진짜 우리 학교 선배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 학교 역사상 최고 비주얼의 17기 A4밴드가 탄생했다.








그래도 공찬식은 꽤나 성실한 애였다. 어쩌다 그 녀석 옆자리에 앉게 되서 매일이 오징어인 삶을 살게 되었지만, 알게 되니 꽤 괜찮은 녀석이었다. 물론 입학식 날 왜 안 왔냐고 묻자 전날 밤새 게임하다 못 일어났다고 해맑게 말하는 게 좀 깼지만, 그래도 어딜 가도 미움받는 녀석은 아니었다. 게다가 애가 음감도 없고 박치라고 해서 진짜 밴드가 연주할 때 옆에 서 있기만 할 건가? 생각했지만 선배들한테 착실히 베이스기타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도 다 밴드부라면 껌뻑 죽는 사람들이라서, 게다가 찬식이가 조금 친해지면 대형견처럼 애교부리고 귀여움 떠는 성격이라서, 녀석이 수업 좀 빠지고 밴드부실에서 놀고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망의 학교 축제날, 17기 밴드의 첫 공연이 있었다. 와, 진짜 비주얼은 끝내줬다. 작곡 공부를 하는 진영 선배가 직접 곡을 써서, 최대한 베이스를 쉽게 만들어 놨는지, 그리고 공찬식이 꽤나 연습을 열심히 했는지, 연주도 나쁘지 않았다. 기타에 진영 선배, 키보드에 신우 선배, 드럼에 선우 선배, 그리고 보컬에 정환 선배, 베이스에 찬식이까지, 진짜 대박이었다. 찬식이가 백업 싱어까지 하는데, 목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17기 밴드가 전설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옆 학교 댄스동아리 역시 비주얼 괜찮은 신입을 여럿 뽑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 중, 이홍빈이란 이름은 우리 학교까지 알려졌다. 실제로 그 해 열린 모든 청소년가요제와 음악제는 두 팀이 비주얼로 인민학살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팀이 엎치락뒤치락하며 1, 2위를 다퉜는데, 솔직히 받은 점수 중 반은 순전히 비주얼로 받은 거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 학교의 공찬식과 옆 학교의 이홍빈, 두 이름이 꽤나 유명해졌다.









그 유명한 둘이 지금 내 앞에 나란히 앉아 내 눈치를 보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분식집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순대 떡볶이 라면 등등을 앞에 놓고 한쪽엔 내가, 한쪽엔 공찬식과 이홍빈이 앉아 있다. 주변의 여고생들이 아주 대놓고 둘을 넋놓고 보고 있다. 네까짓 게 왜 거기 껴 있냐고 가끔 뾰족한 눈길을 내게 던지며.

"그래서, 선배들 눈 피해 여기까지 게임하러 왔단 말야?"

둘이 나란히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너네 뭐냐?"
"그게 뭔데?"

되묻는 공찬식이 슬프다. 하긴, 어렸을 때부터 게임에 빠져 살았다던 네가 셰익스피어를 알 턱이 있을까.

"뭐, 그런게 있어."
"어쨌든, 너,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지?"

공찬식이 순대 하나를 떡볶이 국물에 찍어 내 입에 넣어주며 묻는다. 애교가 완전 몸에 밴 녀석이다. 그런 공찬식을 옆에 앉은 이홍빈이 잠시 째려본다. 괜스레 내가 미안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하는 둘을 보고 이게 뭔가 싶다.

공찬식 말에 따르면 처음 음악제 때 대기실 복도에서 우연히 만나 말을 텄단다. 얘기해 보니 둘 다 같은 게임을 좋아해서 언제 한 번 하자, 했는데 둘이 너무 잘 맞았다는 거다. 그런데 두 학교가 서로 으르렁 거리는 사이다 보니 선배들이 알게 되면 제대로 혼나고 다시는 같이 못 놀게 할까 봐 여기까지 게임하러 온다는 거다. 진짜,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다.

두 녀석은 다시 게임하러 PC방에 가고, 난 집으로 향했다.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비밀을 나 혼자 안다니, 왠지 우쭐해졌다. 공찬식과 한결 더 친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빠의 전근이 결정돼 난 시골로 전학을 갔다.








그래도 비원고 친구를 통해 학교 소식을 간간히 들었다. 진영 선배와 신우 선배는 수시로 음대에 들어갔다. 둘 다 작곡 공부를 하고 있단다. 그리고 두 선배가 졸업하고 리더가 된 정환 선배가 비주얼만 따지던 전 리더 때문에 이골이 났는지 무조건 실력 좋은 애들로 새 멤버들을 뽑았단다. 그래서 그 해 A4 18기가 모든 가요제며 음악제을 휩쓸었지만, 결국 그래도 비원고의 전설은 비주얼로 유명해진 17기로 남았다. 어쨌든, 화려한 수상경력 덕분에 정환 선배와 선우 선배는 졸업 후 언더에서 꽤 알아주는 인디 듀오로 활동하고 있다고. 조만간 오버로 올라올 날도 머지않았단다.

그리고 어차피 밴드에는 별로 관심 없던 공찬식과, 가산점 준다는 말에 댄스동아리에 들었던 이홍빈은 2학년이 되면서 동아리를 관뒀다고 했다. 그리고 곧 두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둘이 같이 아마추어 게임 대회에 나갔던 것이다. 거의 원수 지간인 두 학교 학생들이 같은 팀으로 대회에 참가하다니, 거의 천재지변이었다. 하지만 그 대회가 인터넷 생중계가 되어서, 둘이 1등은 못 했지만 팬들이 엄청 생겨 결국 학교가 의미가 없어져 버렸단다. 그리고 새로 생긴 프로게임단에서 둘을 영입했다고. 지금 둘은 '아이돌보다 잘 생긴 프로게이머'로 알려졌고, 둘이 같이 하는 인터넷 생방송 구독자만 수십만 명이란다.

하... 밤늦게 편의점에서 알바를 뛰고 있는 내 처지를 보니 아무래도 진영 선배가 맞았던 것 같다. 역시, 비주얼이 전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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