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동동주를 마시면 사람이 아니다. 깨질 듯한 두통에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서 생글거리며 웃으려니까 진짜 죽을 맛이다. 옆에 서 있는 산들이 형 역시 나와 비슷한 처지다. 아니, 형은 술을 나보다 더 못 마시니까 숙취로 더 고생 중이다. 하지만 내 두통의 원인은 동동주만이 아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카메라를 보고, 옆을 보고, 앞을 보고, 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수만가지 생각이 떠다니고 있다. 어제 빈이에게서 들은 얘기들이 꿈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실성이 없다. 하지만 꿈이라기엔 마지막에 본 빈이의 얼굴이, 그 상처받은 표정이 너무 생생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끝나고 잠시 쉴 수 있게 되었다. 옷가지가 널려 있는 구석 방 한켠의 조그만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오늘 화보 촬영인 걸 알면서 술 마시고, 참 잘하는 짓이다, 라며 잔소리를 하면서도 신우 형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아이스 팩 하나를 수건에 싸 건넸다. 머리에 시원한 게 닿으니 살 것 같다. 형들이 개인 촬영하러 간 사이에 난 잠시 눈이라도 붙여볼까, 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잘 수가 없다. 자꾸 어제 들은 말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

"좋아해, 너를. 내가."

"갑자기가 아냐. 오래전부터 널 좋아했어. 아니,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던 것 같아."

"친구? 친구끼리 이런 걸 할 거라고 생각해?"

"너와 난 친구가 될 수 없어.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넌 비겁한 놈이야.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려?"

"솔직해질 마음이 생기면 그 때 연락해."


빈이의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내가 뭐랬더라?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린 친구잖아. 우린 둘 다 남자잖아, 뭐 그런 류의 말들을 계속 반복했던 것 같다. 모든 게 엉망이다.

"어때, 좀 괜찮아졌어, 똥개?"

신우 형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때, 그 첫날에 빈이가 머리를 쓰다듬었었는데. 같은 행동인데도 느낌이 완전 다르다.

"형, 머리가 깨질 거 같아요."

괜스레 칭얼거렸다. 형이 아프지 않게 딱밤을 때렸다.

"뭘 잘했다고 찡찡대는 거야, 요놈아."
"힝."

형이 다시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 손길이 너무 부드러운데도, 빈이의 손처럼 다정하지 않다. 아, 이제 모든 조그마한 일에도 녀석이 떠오른다. 머리가 더 아프다.

"형."
"왜, 욘석아."
"형, 친구끼리 막, 그, 그니까, 막..."
"아, 말을 해, 말을."

답답해 하는 형에 그냥 두 눈 꾹 감고 말을 뱉었다.

"친구끼리 막 키스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형은?"
"뭐?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야?"

형의 질문에 할 말이 없다. 그냥 얼버무렸다.

"아니, 그냥... 그게..."
"뭐, 영화 얘기야?"

제일 그럴듯한 얘기라 맞다고 둘러댔다. 형은 영화광에 드라마 덕후라, 이쪽 얘기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혹시 friends with benefits 얘기하는 거야?"
"프.. 뭐요?"
"왜, friends with benefits 라고. 얼마 전에 본 영화에서 나온 건데, 친군데 같이 뭐 그렇고 그런 거 하는 사이? 그런 표현이더라고."
"아, 그런 게 있어요?"
"뭐, 미국 영화니까. 미국에서야 그런 일이 있나보지."
"그런가..."

갑자기 들은 영어 표현에 영어울렁증이 도졌는지, 아니면 드디어 숙취가 올라오는지, 어지러워졌다. 약간 허우적거리며 머리를 고쳐 베자 형이 아이스팩을 다시 잘 수건에 감싸 관자놀이에 갖다댔다.

"으이구, 막내가 잘하는 짓이다."
"헤헤."

관자놀이가 시원해져서인지 머리가 조금은 맑아졌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미국에는 그런 게 있구나."
"그런데 난 그런 거 다 헛소리라고 생각해."

형의 말에 실눈을 떠 형을 슬쩍 올려보았다.

"형?"
"친구 사이에 그러는 게 어딨어? 그건 다 핑계야. 괜히 마음은 있는데 정작 깊은 관계가 되면 그만큼 상처받을 일이 많아지니까, 적당히 선 긋고 딱 여기까지만, 너와 난 친구니까 이 이상은 안 돼, 하는 거잖아. 완전 비겁한 짓이야. 이미 그런 관계를 시작했다는 거 자체가 마음이 있다는 소리거든. 마음도 없는데 누가 혀를 섞고 몸을 섞고 해? 다 말도 안되는 소리야."

누가 선비 아니랄까 봐 그 관계의 부적절함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형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빈이의 말들이 형 덕분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난, 정말로 비겁한 놈이다.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기를 여러 번. 전화번호를 띄워 놓고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기를 또 여러 번. 이러다 밤이 다 지나갈 것 같다. 하지만, 전화를 하면 뭐라고 말을 하지? 도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신우 형의 말을 듣고 그동안 내가 해온 생각들, 행동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말도 안되는 얘기다. 무슨 영화 오디션을 준비한다고 나랑 그런 '연습'을 한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난 넘어갔던 거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 놈인가? 그건 아니잖아. 마음 한편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으면서도 결국 계속 빈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진짜, 신우 형 말대로, 마음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단칼에 거절했으면 됐잖아. 빈이가 아닌 다른 친구가 그런 얘기를 꺼냈다면 처음부터 미친놈이라고 욕하고 너 같은 놈이랑은 앞으로 상종 안 할 거다, 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섰을 거다. 그게 솔직한 내 마음인 거다.

하지만, 그래서 뭐? 우린 둘 다 남잔데. 우린 둘 다 아이돌인데. 하루 24시간 대중들 시선에서 살아야 하는 공인인데. 이런 관계는 옳지 않다. 아니, 이런 관계는 위험하다. 그냥 여기서 끝내버리는 게 맞는 거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하지만... 빈이를 끊어내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숨도 못 쉬게 가슴이 아픈데, 할 수 있을까?

친구라는 방어막이 없어지자 현실이 너무 적나라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어쨋든, 우리 둘은 친구 사이인 거라는 변명 뒤에 숨을 수 있었는데, 내 마음을 인정해 버리면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거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면 빈이를 영영 잃게 되는 건데... 그건... 그것만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너무 늦은 밤이라 자고 있을 텐데, 내일 연습이다 뭐다 해서 스케줄이 많을 텐데, 그래도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깨우는 게 미안해서 망설였던 내가 무색할 만큼 통화 버튼을 누르고 1초도 안 되서 빈이가 전화를 받았다. 순간,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동안 모르는 척, 안 보이는 척하며 망설이기만 했던 게 미안해졌다.

"지금 올 수 있어?"

전화기 너머로 부산스럽게 차키를 찾아 헤매는 녀석의 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참을, 한참을 크게 웃었다. 그래, 너와 난 친구가 될 수 없어, 이제는. 아니, 이제는 내가 친구하기 싫어. 나도, 아마,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했던 것 같아. 내가 드라이브 하는 거 좋아하는 줄 알고 같이 드라이브 하려고 차까지 산 너를. 게다가 나한테 멋있게 보이려고 온갖 폼은 다 잡으며 운전하는 너를. 항상 말은 틱틱거리면서도 늘 다정한 너를. 지금까지 몰랐던, 아니, 알면서도 못 본 척했던 네 모습들을 이제 제대로 봐 줄게. 그러니까, 이제 친구가 아냐, 너와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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