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발걸음으로 PC방을 나섰다. 오늘따라 왠지 게임이 너무 잘 풀렸다. 마지막엔 내가 무려 potg까지 먹어서, 겜비랑 간식비 등등을 다 빈이가 쐈다. 진짜 이게 무슨 일이래.

그나저나 빈이는 오늘따라 왜 이리 조용하지? 녀석이 게임할 때도 어디 딴 데 정신팔린 것 같더니, 지금도 그런다. 뭐지? 혹시... 겜비 내게 되서 삐쳤나? 이 녀석, 자기가 먼저 내기하자고 해놓고, 쪼잔하게...

한참을 걸어도 말이 없길래 툭 쳤다.

"야, 뭐야, 왜 그래?"

빈이는 그제서야 정신차린 듯 날 쳐다본다. 왠지 빈이 얼굴이 약간 경직돼 있는 것 같다.

"너 지금 내가 팟지 먹었다고 삐친 거지? 얌마, 내가 워낙 잘하는 걸 어떡하냐."

얘가 지금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가? 녀석이 아무 말 없이 날 쳐다보고 있어서 괜히 뻘쭘해졌다. 괜스레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산들이 형 불러서 저녁 먹으러 갈까? 뭐 맛있는 거 사달라고 그러자."
"그러지 말고..."

녀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피곤한데 그냥 집에 가자."

그러고 보니 애가 진짜 얼굴이 어둡다. 생각해 보니 나도 일본에서 막 돌아왔지만 그래도 난 오늘 하루 잘 거 다 자고 나온 건데 얘는 또 컴백 준비다, 일본 스케줄이다 해서 오늘 오후까지 바빴다고 했지. 에이, 녀석. 진작 말하지.

"그래, 그럼 가자. 밥이야 나중에 먹으면 되지."

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빈이가 내 옆을 걷고 있다.

"뭐야, 너 택시 타려면 저쪽으로 가야 되잖아. 내가 잡아줘?"

그러지 않아도 늘 우리집 근처에서 만나 미안했는데 애가 약간 비척거리니까 더 미안하다. 가뜩이나 운전도 못하는 애라서 택시 타고 다니는데, 그러는 나도 장롱면허라 차가 없으니, 이럴 때 불편하다.

방향을 틀어 반대쪽으로 걸어가려는 나를 빈이가 붙잡았다.

"무슨 말이야. 그냥 너네 집에 가서 뭐 시켜먹잔 얘기였는데."

아, 그런 거였어? 그럼 말을 제대로 하던가. 얘는 가끔 말을 필요 이상으로 아낀다니까.

결국 다시 방향을 틀어 집으로 향했다. 나도 일본에서 막 돌아와서 집이 그닥 깨끗하진 않지만, 빈인데 뭐.

집에 도착해 단골 밥집에서 김치찌개 2인분을 시켰다.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이라 난 신나게 먹었는데 빈이는 왠지 깨작거린다. 애가 피곤하니까 입맛도 없나보네. 빨리 먹고 보내야겠다.

밥을 다 먹고, 그릇을 내놓고 난 후에도 빈이는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얘가 왜 이러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야, 너 도대체 왜 그러는데? 무슨 일 있어?"

빈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양치를 하며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어딘가 뭔가가 잘못된 거 같은데, 싶다.

입 안을 물로 헹구고 화장실을 나왔다. 빈이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가글이라도 했는지, 가까이 가자 페퍼민트 냄새가 났다. 왠지 민망해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콩아, 진짜 이건 아닌 거 같아."
"넌 친구가 하는 부탁 하나도 못 들어주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빈이가 한 얘기인 즉, 새로 촬영 들어가는 영화에 캐스팅 될 수도 있다고, 첫 오디션을 합격했고 두 번째 오디션이 곧 다가온다고 했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역할인데, 약간 수위 높은 로맨틱 코미디라서 애정씬이 꽤 될 거라고. 그런데 첫 오디션 때 긴장해서인지 약간 버벅거렸단다. 어떻게 붙긴 했지만, 두 번째 오디션 때도 버벅거리면 떨어질 것 같다고, 그래서 걱정이라고. 그러니까 자기 좀 도와달라고.

여기까지 듣고 알겠다고 했다. 친구 좋다는 게 뭔데. 그런데 도와달라는 게 애정씬 '연습'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같은 남자끼리. 내가 먼저 친구니까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줄게, 라고 말은 했지만 이건 아니지.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양치를 한다고 하고 잠시 자리를 피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 난들 오죽하면 이러겠냐?"

그건 그렇지만...

"그냥 여자친구 사귀면 안돼?"
"우리 연애금지인거 몰라? 걸리면 퇴출이야."

퇴출되면 안되지. 그렇다면...

"너 아는 여자애들 없어? 걔네 중에 이런 부탁 들어줄 만한 애들 없어?"
"그건 안 돼."
"도대체 왜?"
"그러다 걔가 내 여자친구라고 떠들고 다니기라도 하면? 팬들이 아주 난리가 날 텐데."

틀린 말은 아니다. 같은 아이돌로서 공감가는 얘기다. 그렇지만...

"그러면 일반 여자애 말고 뭐, 너네 회사 애들 중 하나라든지..."
"그게 퍽이나 되겠다. 넌 너네 회사 여그룹 애들 중에 그런 부탁 할 수 있는 애 있어?"

아니지. 없지. 하지만 그래도...

"그럼 뭐 너네 팀 다른 멤버라도... 좀 그렇지만... 이해해 주지 않을까?"
"넌 너네 형들한테 이런 부탁 할 수 있어? 가족같은 사람들한테?"

당연히 아니지. 다 친형 같은 사람들인데... 하지만...

뭔가 또 다른 말을 꺼내 보려는데, 빈이가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소파에 기대 앉았다. 애가 너무 피곤해 보여서, 힘들어 보여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오죽하면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나, 싶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촬영할 때 감독님 작가님 다른 스태프 등등 다 날 예뻐해 주셨는데도 NG 한 번 내면 왠지 눈치가 보였었다. 그런데 살벌한 영화 촬영장에서는 더 무섭겠지. 친구가 영화 한 번 찍어보겠다고 오디션 준비를 도와 달라는데 그 정도도 못 해주겠나, 싶어졌다. 아, 난 너무 착해서 탈이야, 진짜.

"알았어. 할게."

빈이가 눈을 뜨고 날 쳐다보았다.

"정말?"

와, 지금까지 해달라고 졸라 놓고 해준다니까 놀라서 눈 똥그래진 거 봐. 이 녀석 완전 웃기네.

"그래. 이 형님이 너 영화 한 번 찍게 도와줄게."

그때는 저 말 한 마디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줄 몰랐다.








아, 민망함에 미쳐버릴 것 같다. 도저히 밝은 불빛 아래에서 할 자신이 없어서 불은 낮췄는데, 왠지 그게 더 이상하다. 스위치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이 손을 떼어버리면 다시 소파로 돌아가야 하니까. 하지만 여기에 정승처럼 밤새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큰 한숨을 쉬고 뒤돌아서서 소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빈이 옆에 앉는데, 이게 뭐라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긴장돼 죽겠다.

내내 내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빈이가 살짝 웃음짓는다. 아, 왜 이리 얄밉지, 저 녀석?

"긴장돼?"
"전혀 아닌데?"
"하긴, 처음이니까."
"처음 아니거든?"

나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빈이는 놀란 눈치다.

"뭐야, 너 모쏠이라며?"
"나 드라마 찍을 때 키스신 있었거든?"
"진짜?"
"와, 너 내가 찍은 드라마 안 봤냐? 이거 친구라면서 완전 웃기는 놈이네."

빈이가 키스신을 찍어봤다는 내 말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서 나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었다.

"넌 내가 나온 드라마 다 봤어?"
"아니."

당당한 내 대답에 녀석이 쳇, 한다. 뭐라뭐라 중얼거리면서.

"뭐?"
"너네 형들 나오는 드라마는 다 봤을 거 아냐?"
"당연하지. 모니터 해줘야 되니까."

또 뭐라뭐라 궁시렁거린다. 뭐래는 거야, 진짜.

어쨋든, 긴장은 약간 풀렸다. 조금 풀어진 내가 느껴지는지, 빈이가 입을 다물고 다시 나를 쳐다본다. 그 눈빛이 왠지 레이저마냥 날 꿰뚫을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빈이가 슬쩍 가까이 다가앉는게 느껴진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말을 꺼내보려는데 뭔가 입술에 와 닿았다. 놀라 순간 얼어붙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건 뭐지? 무슨 상황인 거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단단한 손이 내 뒤통수를 감쌌다. 꾹 다문 입술 사이로 뭔가가 비집고 들어온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드라마에서 찍었던 키스신은 이거에 비하면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있기를 몇 초, 아니, 몇십 초, 아니, 몇십 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해 빈이를 밀쳐냈다.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아서 쪽팔리다. 빈이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ㅅ... 숨은 쉬게 해 줘야 할 거 아냐!"

잠시 얼어붙었던 빈이가 큰 소리로 웃었다. 아이씨, 진짜. 주먹에 힘을 실어 진짜 세게 가슴팍을 쳤다.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뭐, 뭐가 웃긴데!"

가슴을 문지르던 손을 다시 내밀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키스할 때 숨은 코로 쉬는 거야, 이 바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웃고 있다. 이걸 한 대 더 때려? 싶었지만 참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이 녀석 여자 여럿 울리겠네, 생각하는데 빈이의 얼굴이 다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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