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이 써지지 않는다. 벌써 몇 달째 같은 곡의 같은 마디에서 막혀 있다. 당연한 일이다. 내 머릿속은 한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데, 다른 어떠한 생각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데, 내가 깨어있는 순간 순간에 그 사람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아니, 내가 잠든 순간에도 내 꿈에 나와 나를 지켜보는데, 내가 도대체 그 사람 생각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내가 가식적으로 웃고, 가식적으로 팬들을 대하고, 가식적으로 곡을 쓰고 있다고 느껴지기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곡이 써지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을 빼면 남는 건 음악밖에 없는데, 이제 이것마저도 없어지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눈 앞이 깜깜하다. 답답하다. 힘들다. 이러다 진짜 내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팀을 나가겠다고 했다.

늘 함께 있어서 더 힘든 거다. 활동기에는 매일 매일 얼굴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하니까. 마치 네가 내겐 그냥 친한 친구인 척, 그 이상이 절대 아닌 척, 널 볼 때마다 온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떨리지 않는 척,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이러다 터져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되지 않는 척을 해야 한다. 너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보며 혼자 속으로 상처 받는 내가 이제 지긋지긋하다. 이렇게 살다가는 얼마 남지 않은 내 본모습까지 잃어버릴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다.

그런데... 힘든 건 난데, 죽을 것 같은 건 난데, 왜 네가 상처받은 표정을 하는 거지? 회의실을 나와 앞만 보고 걸어가는 내 팔을 네가 꽉 움켜쥐었다. 내려다보는 네 얼굴이 이상하다. 늘 내게 보이는 얼굴이 아니다. 이건 뭐지? 무슨 상황인 거지? 몇 년만에 네 입에서 처음 나온 내 이름 '동우'가 낯설다. 내 팔을 잡고 있는 손이 떨린다. 하지만 그 손을 가차없이 떼어내었다.

팀을 나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너를 내 인생에서 떨쳐내기로 했다. 썩어 문드러지는 팔을 잘라버리듯이, 너로 인해 내가 더 아파지기 전에, 내가 없어지기 전에 너를 잘라내기로 했다. 너는 좋은 친구 하나를 잃는 거겠지만, 나는 내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것이다. 그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죽을 것 같이 아파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아물겠지. 지금처럼 항상 아리는 통증은 이제 없어지겠지.

그래서 너를 등지고 뒤돌아섰다. 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후련할 줄 알았는데, 내가 내린 이 결정에 후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곡이 써지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회사 건물의 내 방에는 차마 갈 수 없어서, 혹시라도 너와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집에 틀어박혀 노트북에 작곡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며칠째 같은 스크린만 보고 있다. 너와 내는 마지막 앨범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최고의 앨범을 남기고 떠나고 싶은데. 도대체 이 멍청한 머리는 왜 다음 음을 생각해 낼 수 없는 거지? 가슴이 답답하다. 숨이 막혀 온다.

그 와중에 애들이 다녀갔다. 그래, 너희도 내가 어처구니 없겠지. 늘 함께할 거라고, 우린 영원할 거라고 내가 말해놓고 이제 와서 나가겠다니. 하지만 역시 착한 애들이라 원망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려 설득하려 하고 있다. 너희들을 생각하면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건데. 하지만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날 잃어버릴 것 같아, 애들아. 미안해. 겨우 이것 밖에 안되는 놈이었나 보다, 내가.

노트북 앞에서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다가 결국 일어섰다.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나갈까, 하고 자켓을 입고 차키를 찾는데 문 앞에서 멈칫했다.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떼고 싶지 않아졌다. 마치 집 안이 내 도피처인 양, 여기를 나가면 내가 위험해질 것 같아서, 그 위험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다시 차키를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자켓을 아무렇게나 소파 위에 벗어 놓고 옆에 앉아 눈을 감았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고 싶다. 며칠째 잠도 잘 오지 않는다. 곰이 겨울잠 자듯이 잔다고 애들이 놀리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참, 꼴이 우습다, 신동우.

수면제라도 먹고 자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벨이 울린다. 선우와 산들이가 다녀갔으니, 아마도 찬이겠지. 아니나다를까, 찬이의 얼굴이 뜬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되는 일이니까, 느릿 느릿 걸어가 문을 열었다. 찬이를 집 안에 들이고 소파에 다시 몸을 묻었다. 그래, 너도 나를 설득하러 온 걸 테니까, 한 번 설득해 봐.

하지만 찬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 한 말이었다.







늘 가던 길이라 다행이다. 이 정신으로 모르는 장소를 찾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내 차가 회사로 향하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찾아가고 있다. 운전대를 잡은 손과, 길을 살피는 눈, 신호등을 보고 반응하는 발과는 상관 없이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뒤범벅이 되고 있다. 찬이가 한 말들이 기억들과 뒤엉키고 있다.

데뷔하고 첫 해에는 멤버들의 생일파티를 팬들과 했었다. 진영이 생일 때, 애들과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해서 졌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선우가 내건 조건이 진영이에게 뽀뽀하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뭐를 걸어도 해내겠다, 뱉은 말이 있어서 눈 딱 감고 했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내가 이 아이를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싫어서 가슴이 떨린 게 아니라, 설레서였다는 걸.

하지만 진영이는 그 날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도대체 그게 뭐였냐며 웃어넘겼다. 해맑은 얼굴을 보며 아, 이 아이는 진짜 그게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고 알았다. 조금은 기대를 했던 내가 우스워졌다. 그래서 어떻게든 마음을 접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누굴 좋아하는 게, 아니, 좋아하지 않는 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진짜 별짓을 다 해봤다. 어떻게든 그 아이를 생각할 시간을 없애려고 들어오는 스케줄을 다 받아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연기까지 했다. 그 다음에는 이 여자 저 여자 닥치는 대로 만났다. 그러다 내가 만나는 여자애들이 찬이 말대로 다 어딘가 진영이의 모습을 반영하는 애들이란 걸 깨닫고 내 자신에게 신물이 났다. 그래서 그것도 관두고, 그 다음에는 작곡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내 손으로 음악이란 걸 만들어낸다는 게 너무 뿌듯하고 좋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에 있는 그 아이에 대한 생각들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생각들이 점점 내 자신을 잠식해 갈수록, 점점 내 자신을 잃어갔다. 제일 힘들었던 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아하는 진영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던,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늘 그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이며 넘겼다. 나는 결국 그 아이에게 딱 그만큼의 존재였던 거다. 그냥 팀 멤버 중에 하나, 그냥 유일한 동갑내기고, 같은 큰형으로서 팀을 같이 이끌어가는 사람, 그 아이가 언제 라디오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냥 좋은 친구. 그게 다였다. 그 이상일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제일 슬펐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진영이가 가면 뒤에 숨어 있었던 거라니. 사실은 나를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던 거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찬이가 뭘 잘못 안 거겠지. 아무리 찬이라도, 멤버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찬이라도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지, 싶었지만 그래도 확인해야만 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밤 늦은 시간에 멀지 않은 거리라 회사 건물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기도 전에 도착해버렸다. 차를 주차하고, 일부러 시간을 끌려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어떻게든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어느덧 나는 진영이 방 문 앞에 서 있었고, 머릿속은 여전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너도 날 좋아했었어? 라고 물어봤다가, 비웃음 당하는 건 아닐까? 너랑 나랑 둘 다 남잔데, 내가 왜 널 좋아해? 하면서 날 미친놈 취급하진 않을까? 이 생각 저 생각에 점점 저 문을 여는 게 두려워졌다. 하지만, 어차피 끊어내기로 한 거니까. 이왕 아플 거, 좀 더 아파도 괜찮겠지. 오히려 이렇게 일말의 희망도 없애버리면 그만큼 상처가 더 빨리 아물겠지.

마음을 가다듬고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다. 음악 작업에 심취하면 아무 소리도 못 듣는 애라서 늘 그렇듯이 그냥 문을 열었다. 진영이는 항상 그렇듯 헤드폰을 쓰고 모니터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한 가지 다른 건, 늘 바쁘게 움직이던 두 손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일 생각을 안 하고 있다.

그런 진영이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용기를 내 다가갔다. 잠시 망설이다가 어깨에 손을 짚었다. 내 손길에 놀라 어깨를 움추러트린 진영이가 의자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찬이 말대로 며칠 밥도 안 먹고 잠도 못 잤는지 몰골이 영 말이 아니다. 그리고... 늘 바위처럼 단단하던 진영이가 내 앞에서 무너졌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서럽게 우는 진영이 앞에서 난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내가 그동안 너를 잘못 보고 있었구나. 누구보다도 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너에 대해 난 아무것도 몰랐었나 보다. 정말 난 둔한 곰인가 봐.

손을 뻗어 진영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진영이가 아끼는 헤드폰이 땅에 떨어지는 줄도 모른 채 가득 안겨왔다. 자켓의 앞섬이 진영이 눈물에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도 눈가가 젖어들었다.

"미안해. 오래 기다리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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